4월 2차 편집부 추천작
마리 멜리에스
로맨스, SF
아내의 기억을 좇는 한 남자의 감성 SF
연구에 열정적으로 매진한 과학자 남편, 한때 그 연구의 동반자였으나 자신을 잃고 방황하는 아내. 남편이 힘겨워하는 아내의 속마음을 미처 보듬지 못한 사이에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나 버렸다. 자살인지, 사고인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과학자 부부의 파경이라는 다소 전형적인 소재를 독특하고 비전형적인 방식으로 비틀어 구성해 낸 「마리 멜리에스」는 ‘인공두뇌 연구’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의식을 매질로 구현할 수 있는지 아닌지, 그런 이야기를 독자가 이해하는지 마는지는 중요치 않다. 아내를 잃은 남자는 아내에게 듣지 못한 마지막 진실을 찾기 위해 자신의 연구를 밀어붙인다. 과연 남자는 자신이 구해 주지 못한 아내의 마지막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의식과 기억, 그리고 기억과 감정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는 「마리 멜리에스」는 몹시도 서정적인 SF 단편이다. 아련하고 나른한 묘사가 작품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기에, 소설의 정서는 잔잔하고 쓸쓸한 쪽에 가깝다. 도입부에서 높은 화강암 절벽을 배경으로 해가 넘어가며 붉은 노을이 비치는 장면의 묘사는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차분하다. 마침내 해가 완전히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고요해진 계곡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생각에 잠긴 한 남자의 모습은 이야기의 결말과 맞물려 깊은 여운을 남긴다.
국수
추리/스릴러
국수 한 그릇에서 떠올리는 잔인한 기억
강렬한 심리 묘사와 흡인력이 인상적인 이 작품은 학대로 점철된 성장기를 보낸 화자의 기억을 ‘국수’를 매개 삼아서 더듬어 나간다. 유일한 식구와 함께 국수를 삶아 먹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자신을 버린 친어머니와 입양 가정의 이면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무척이나 매끄럽다. 상실감과 쓸쓸함이 물씬 느껴지던 이야기는 다소 잔혹한 장면들이 포함되어 있는 중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불안감을 고조시키며 스릴러다운 긴장감을 선사한다.분량이 짧지 않지만, 강렬한 반전이 있는 결말까지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가희는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늘 그렇듯이 유일한 가족인 송이와 국수를 나누어 먹으며 과거를 회상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버림받고 보육원에서 지내게 된 그녀는 동화 속에 나올 것 같은 그림 같은 가정에 입양되기를 꿈꾸었다. 마침내 이상적으로 보이는 부부가 나타나 그녀를 데려가지만, 그들의 사정이 드러나면서 잠깐의 행복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1934년 봄, 기묘한 이야기
호러
늑대가 비호하던 어느 시골 마을의 기담
1934년 경성, 신문 연재소설 ‘경성 탐정 X’로 유명했던 추리 소설가 K는 사고로 배필을 잃고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K는 얕은 생각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백두산에서 조난을 당하고 유품인 방울끈마저 잃어버린다. 다행히 백두산에서 늑대를 찾고 있던 사냥꾼 장 씨의 도움으로 K는 목숨을 건지지만, 마을로 향하던 하산길에 장씨가 경고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그것’과 마주치게 된다.
경성과 백두산, 그리고 어느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1934년 봄, 기묘한 이야기」는 전형적인 기담의 구조를 한 공포 단편이다. 이야기는 예측한대로 흐르지만, 빠른 장면 전환과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흡인력 있게 읽을 수 있다. 어설픈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 불가해한 일들을 설명하기보다는 기이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긴장감을 고조시켜 나가는 속도감 있는 전개가 인상적이다.
천명기
판타지
장대한 세계관이 빛나는 매력적인 동양 판타지
오래전 하늘의 문이 열리던 날, 하늘에서 내려온 천인(天人)들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인간들의 땅 위에 나라를 세운다. 지극히 정명한 하늘의 나라, 대 청명국 수밀. 「천명기」는 이러한 수밀황국의 신화를 중심으로, 황국의 통치하에 놓인 주변부의 신하국과 각기 저마다의 세계에 속한 인물들 간의 장대한 파노라마를 거침없는 필력으로 펼쳐낸다.
7년 전 황국을 대상으로 했던 어느 가문의 전쟁을 시작으로, 근래야 황국의 경계로 편입된 야만한 북방의 영토 ‘예주’를 지나 다시 황국의 수도인 ‘천경 아사달’로 이어지기까지, 다양한 시공간을 지나는 이야기의 갈래는 여전히 도약대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광활하고 차가운 땅 북방 예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1장과 다채로운 주법을 다스리는 술사들의 가문이 전설처럼 남아 있는 천명국의 세계를 다룬 2장의 전개가 교차되는데, 회차를 거듭할수록 서로간의 공백을 조밀하게 맞추어나갈 채비를 하려는 듯 보인다.
뿐만 아니라 운명처럼 북방을 지키는 진성, 그를 보좌하는 녹현과 도현. 천명국의 태자와 그를 지키고자 모든 일을 다하는 천위대장군 하연, 대대로 내려오는 가문의 술력이 잠재된 현원 등 고유의 개성으로 무장한 캐릭터들 역시 다채롭게 빛난다. 같은 황국에 속해 있으면서도 자립적으로 꾸려진 저마다의 세계를 다루고, 그 안에서 치밀한 분투를 이어가는 인물들의 면면까지 세밀하게 조각해내는 「천명기」는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작품이다.
두 명의 목격자
추리/스릴러
휴대폰과 택시미터기, 두 목격자가 전하는 연극 같은 이야기
어두컴컴한 새벽 한적한 도로, 갓길에 대충 서 있는 택시 한 대. 택시 뒷좌석에 목 졸려 죽은 여자의 시체가 있고, 차에서 10미터쯤 떨어진 곳에는 등에 칼이 꽂힌 채 죽어가는 한 남자가 있다. 도대체 두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두 명의 목격자」는 휴대폰과 택시미터기라는 다소 황당한 두 명의 목격자가 번갈아 진술을 하며 사건을 재구성하는 재미있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으나 작은 행복조차 찾지 못한 두 남녀의 비극은 심히 드라마틱하고, 두 사람의 감정을 극단으로 모는 극적 장치들은 과할 정도이지만 짧은 길이와 빠른 장면 전환 덕분에 그런 부분들이 장점으로 승화되어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끝까지 두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은 결말 덕분에 작품이 주는 입맛은 쓰다. 그나저나 택시미터기에 ‘영감님’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말을 걸면서 운행을 다니는 택시 기사분이 과연 정말로 있을까? 그 가능성은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