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갑을 두른 기사가 말을 몰아 풀 한 포기도 없는 황야를 가로질러서 용의 성으로 달렸다. 와이번과 그리핀이 서로를 향해 앞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 붉은 망토가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껴 펄럭였다.
기사의 등장에 그를 위해 꽃을 뿌리고 환호하면서 응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사의 말이 낡아빠진 성문을 향해 돌진해 박차고 들어갔다.
성에서 잠을 청하던 용은 멀리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깨어난 용은 기다리고 있다가 날개를 펼쳐 기사를 맞이했다.
“왔는가, 새로운 도전자여.”
용이 말하는데, 기사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기사는 건물 안으로 가버리고, 용은 몸집 때문에 그를 따라가 들어가지 못했다. 용은 바깥에서 기사가 어디로 갔는지 쥐구멍을 보듯 찾아다녔다. 그는 바짝 몸을 엎드려 1층에 남겨진 말을 발견했다.
“도전자?”
용은 기사를 불렀고, 대답은 없었다. 그는 기사가 보이지 않아 답답해했다. 용이 헤매는 동안 누군가 상자를 열고 금화가 투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하! 거기 있었군.”
용이 얼굴을 창문에 가까이 댔다. 그는 쌓인 보물을 뒤적거리는 기사를 지켜보았다. 기사는 손으로 금화를 퍼 올렸다가, 손을 기울여 도로 상자에 흘려버렸다. 기사는 보물 더미에서 황금잔과 황갈색 도자기 병을 한 손에 집어 들었다. 기사가 코르크 마개를 입으로 물어 빼고 도자기 병을 코에 가져가 안에 담긴 포도주 냄새를 맡았다.
기사는 탁자 위 촛대에서 불이 켜진 초를 하나 빼서 벽난로에 던졌다. 벽난로 안의 땔감에 불이 붙어 타올랐다. 기사는 주운 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금으로 도금된 의자에 앉았다. 그가 탁자에 다리를 올리고 잔을 내려놓았다. 기사가 얼굴을 가렸던 투구를 벗자 긴 금발의 머리칼이 어깨에 흘러내렸다.
“이보게.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용이 기사가 잘 보이는 위치를 찾아 이 창문 저 창문 옮겨 다녔다. 커튼에 가려진 창문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용이 닫힌 창문을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당겨 열어 커튼을 걷었다.
“흠, 흠.”
용은 머리를 내밀고 목을 뻗었다. 샹들리에가 용 머리에 난 뿔에 부딪혀 흔들리자, 용은 다른 창문을 통해 들어온 손으로 잡았다.
“마치 여기가 제집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군. 내가 누구인지 아나?”
용이 기사의 앞에서 콧김을 내뿜는데, 기사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잔을 비웠다. 용이 잔에 포도주를 따르는 그를 보더니.
“이런 웃기는 놈은 처음 보는군. 겁에 질려서 정신이 나가버리기라도 한 건가?”
용이 고개를 돌려 벽난로에 불을 뿜었고, 불빛이 아까보다 환해졌다.
“나이가 들어서 눈이 침침하단 말이지.” 용이 중얼거리고 기사와 얼굴을 마주 봤다. “어디 보자…”
용은 기사가 앉은 의자를 자신의 머리로 밀어 난로 쪽으로 옮겼다. 한쪽 눈만 뜬 채 술을 홀짝이는 그를 살펴보았다.
“갑옷에 새겨진 문장을 보니까… 와이번과 그리핀이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 났군. 불이 번지고 모든 게, 재가 되었더라도. ‘봄이 오기를 기다려라.’ 자네는 페어슈프레헨 가문 출신이로군. 옛날에 용에게 호되게 당하고 다녔던 집안이지.
내 말이 맞을 걸세. 나 레드워트 용인 락테아가 이곳 성의 프론트 케이지 탑에 갇힌 공주를 걸고 내기하지.”
용은 들어가다 창문에 팔이 걸린 손으로 기사를 가리키고 말했다.
“그리고 자네는 엘핀 왕국의 국왕인 하르푸스에게 검을 바친 기사이고. 그 늙은이가 사람을 안 보내서 늙어 죽은 줄 알았건만. 아무튼, 자네는 공을 세워 명예도 얻고 공주와 결혼을 하려 큰 꿈을 품은 채 이곳을 찾아 왔군, 그렇지?
그런데 전에 이 성을 찾아온 도전자들과 달리 유독 자네 눈이 신경 쓰이는군. 약간 생기가 없다고 해야 하려나.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용이 곰곰이 생각하며 적절한 단어를 머릿속에서 찾아보는데,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턱을 쓸려다가 창문틀에 팔이 끼었다. 창문이 떨어져 나왔고 유리가 깨졌다.
“망할. 또 돈 주고 새로 고쳐야겠군. 이러다 돈이 남아나지 않겠어.”
용 락테아가 주변을 둘러봤다.
“성에 하나밖에 없는 하인이 일은 안 하고 농땡이나 부리고 있다니. 조안나? 조안나!”
락테아가 부르자, 금화 더미 속에서 왕관을 쓴 하녀가 팔을 뻗고 밖으로 나왔다.
“…네, 네! 주인님!” 뛰쳐나온 조안나가 중심을 못 잡고 “어, 어?” 넘어졌다. “조안나, 여기 있어요!”
락테아가 고개를 젓고, 조안나가 말하며 일어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조안나는 내려오며, 왕관을 벗었다. 락테아가 조안나의 앞치마 주머니에 시선이 향하자, 그녀는 웃더니 안에 든 금화를 바닥에 쏟아부었다. 그녀는 다른 주머니에 든 것도 빼내고, 귀걸이를 뺀 뒤에 왕관과 함께 내려놓았다.
“조안나, 책을 가져오게. 엘핀 왕국의 가문들에 관한 내용이 적힌 것 말일세.”
락테아가 말한 책을 조안나가 보물 더미를 뒤적거리며 찾는데 말했다.
“조금 전에 대화하시던 것 같던데, 손님이라도 찾아온 건가요?”
“날 물리치러 온 도전자가 왔다네. 도전자들이 이 성을 찾아오지를 않아서, 이제 공주와 그녀를 탑에 가둔 용에 관한 이야기가 벽난로 앞에 앉아 아이한테 들려줄 동화가 될 정도로 시간이 흐른 줄 알았건만. 시간이 내가 생각한 정도로 많이 흐르지는 않았나 보군.”
“저번에는 길 잃은 사람이 찾아와서 진이 빠져 하셨는데 다행이네요. 그때 그 사람은 주인님이 잡아먹으셨던가요?”
“내가?”
“그리고 오늘 찾아온 도전자분은 어디 계신가요? 주인님 뱃속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여기 앉아 있는 게 안 보이는가?”
락테아가 빈 의자를 봤다.
“이런 파렴치한 작자 같으니! 그새 내가 한눈판 사이에 어디로 샌 게지?”
용 락테아는 목을 빼고, 1층에 기사가 두고 간 말이 있는지 봤다. 조안나는 주인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틈에 금화를 줍다가 귀걸이도 챙겨서 주머니에 넣었다.
“말은 그대로 있는데, 어디로 간 거지.”
락테아가 기사를 찾다가 말했다.
“글쎄요.”
조안나는 용 락테아가 말한 책을 들고 벽난로 앞 탁자에 두었다. 불빛이 투구에 비쳐 반사되었다. 조안나는 기사가 남기고 간 잔을 들어 마셨다.
“탑에 가둬둔 공주에게 간 건 아닐까요? 전에 찾아온 도전자들이 하르푸스 왕의 이름으로 주인님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하겠다고 나섰잖아요.” 조안나가 잔에 포도주를 채웠다. “이번에 온 도전자는 뭐라 했나요?”
“아무 말도 안 했어. 단 한 마디도 뻥긋하지 않았네. 별의별 도전자가 다 있었는데, 그놈처럼 생기 없는 눈을 가진 인간은 한 명도 없었단 말이지!”
락테아가 마지막에 소리치고는 걸어갔다. 땅이 흔들려 조안나는 잔에 따른 포도주를 흘렸다.
조안나는 술병을 놓고 바닥에 흘린 걸 행주로 닦았다.
“죽은 눈이라도 되는가 보죠?”
그녀가 말했다.
“내가 하려던 말이 그거였네!”
조안나는 기사가 앉았던 의자로 향했다. 락테아가 움직이면서 탁자가 흔들려, 황갈색 도자기 병이 떨어졌다. 조안나가 깨질 뻔한 술병을 받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이어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