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른은 바엘론을 놓쳤고, 스스로가 레시니아 밖에서 활동하는데 방해가 될 짐만 하나 들었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느냐, 방법을 갈구해야지 않겠느냐? 카다른은 지하 유산을 본 사람 중 하나이고 거기서 붉은 모래의 여인 레시니아에게 도움을 청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레시니아는 청을 들어주어 사일런 가드 카다른의 검 루칠란이 희생자의 피를 마시도록 해주었다. 덕에 카다른은 자신만 주의하면 그가 살해한 자식들의 어머니가 내린 저주로부터는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하나의 저주로부터만 말이다. 다른 건 저주가 맞았는지, 마법사들만이 알을 게다. 난 아니라 믿는 쪽이다. 바엘론이 노래를 불렀던 연회 때, 카다른이 살해한 카나린 공주와 모트릭 왕자의 어머니인 왕비 밸리아스는 살아남은 마지막 아이인 아실란 공주를 살리고자 했다.
왕비 밸리아스가 바다 여신의 힘을 빌었다만, 카다른에게도 그를 가호해주는 신이 없었던 건 아니지. 바다 여신 란이 대신 지혜를 나누어주어 공주 아실란을 남쪽으로 내려가 레시니아 사막으로 가게 했다. 카다른은 아실란이 자신의 고향인 레시니아로 갈 거라 생각이나 했겠느냐. 신 레시니아가 도와준다 한들 붉은 모래의 여인은 이유 없는 살생을 벌이는 자에게는 등을 졌다.
카다른은 일부러 비밀을 입에 담고 내뱉지 않는다면 살려주겠다는 식으로 경고하여 겁에 질린 바엘론을 놔둔 채, 레시니아 사막으로 간 아실란을 찾아 뒤늦게 남쪽으로 갔다.
제국 황후 에슐리안이 부추겨 전쟁을 일으킨 센다트와 신 레딜센 왕국 간의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걸 독수리 다리에 묶인 쪽지를 통해 들어왔던 카다른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아실란이 센다트에게 가서 불어버리면 모든 게 끝나는 게지. 웃기게도 여인 레시니아는 아실란 공주를 가엾게 여겨, 더 남쪽으로 붉은 사막 레시니아 아래 군주 센다트의 아란드 군과 만나지 않게 모래 바람으로 가려주어 게으른 사막으로 가도록 도와주었다.
레시니아가 축복해준 카다른의 루칠란 검은, 카다른이 자신 앞을 막는 아란드 인들의 피를 모두 마시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발을 헛디디면 피 웅덩이에 빠질 정도지, 검 루칠란이 피를 흡수하게만 만들었지 피를 많이 흘리게 하는 검 날 자체는 바뀌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붉은 모래가 여신 레시니아의 피로 이미 젖어있어서, 아란드 인들의 피가 땅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붉은 모래 표면 근방에 머물게 되었다.
레시니아 사막이 아란드 인들의 피를 붉은 모래 속에 머금게 되어, 붉은 모래에 디디면 땅바닥에 두껍게 쌓인 눈처럼 발이 빠졌다. 심하면 몇몇은 몸이 붉은 모래 속으로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해 숨이 막혀 죽기도 했지. 아란드 인의 피가 퍼지며 아실란 공주가 남쪽으로 도망간 게으른 사막이 붉게 물들었다. 카다른 자신을 두려워해 길을 내어준 아란드 인들을 지나서 아실란 공주를 쫓다가 모래 속에 빠졌다. ‘게으른 사막을 지나고, 붉은 모래에 빠졌다가 그대를 잊지 않고 튀어나왔지.’
게으른 사막, 이름대로 흙이 아닌 모래로 땅이 덮여 있으나 다른 사막들과는 다르게 숲이 울창한 곳이다. 비옥한 땅이었는데, 세상이 변하면서 흙이 모래가 되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이 변화를 받아들여 땅을 떠나든지, 바뀐 땅에 적응해 살아야 했었지. 부자연스러운 변화였던 탓이었는지, 게으른 사막의 거주민들은 전에 살았던 방식대로 삶을 유지했다. 그런데 그 방식이 통하여 멀쩡히 살아가고 있지. 삭막한 경작지에서 작물이 자라고, 나무는 모래에 뿌리를 내려 살아갔다. 심지어 게으른 사막의 모래가 붉게 번졌음에도 주민들은 달라진 게 없었다. 제국에 황제가 아닌 왕이 다스리던 시절에, 왕 라밀라스가 게으른 자라 부른 걸 기점으로. 사람들은 그곳 사막 주민들을 게으른 자들이라 부르지. 또는 적응하지 않는 자, 레질러스라 하기도 한다.
게으른 사막에 방문한 이방인은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려 하지. 카다른과는 다르게 게으른 사막 주민들은 모래에 빠지지 않았다. 카다른은 비오나든을 떠올렸지, 신 레딜센 왕국의 여왕이 카다른에게 독수리로 편지를 보냈다. 레시니아가 위험하니 빨리 돌아와 달라는 말도 있지만, 비오나든이 카다른을 그리워한다 했지. 카다른은 비오나든을 잊지 않고 붉은 모래 속에서 기어 나왔다.
손을 피로 적시고 웅덩이가 맺히게 만든 침혈자 카다른이 죽을 리가 있겠느냐. 책에서는 아실란 공주가 어찌 됐는지 없다, 아실란을 쫓아서 멀리까지 간 건 적혀있다. 카다른과 비오나든의 연이 질겼는지, 카다른은 꿈속에서 비오나든이 자신에게 미소 짓는 걸 봤다. 아실란을 따라 멀리 온 카다른은 포기하지 않고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게으른 사막 아래 남쪽은 센다트의 부재로 왕국들이 갈라져 싸우던 혼란기라, 카다른은 왔던 길이 아닌 멀고 돌아서 가야 하는 쪽을 택해야 했다. 레시니아 사막에서 아란드 인들을 도륙한 카다른도 왕국들을 모두 상대하기는 무리가 있지. 카다른은 높고 가파른 산을 올랐다. 레시니아를 중심으로 남에서 올라가 서쪽에, 그 다음 북쪽까지 가게 되었지. 눈이 내리는 북쪽까지 가서, 레시니아를 향해 내려갔다. 눈이 내리는 지역이 끝나면 비가 내리고, 용의 분노로 흔들리는 북부를 지나서 비오나든에게 갔다.
지도에서 본 길은 레시니아 사막에서 오랫동안 지내온 카다른에게 짧아 보이지만, 직접 발을 땅 위에 올렸을 때는 머나먼 여정이었다는 걸 카다른은 깨달았다. 비밀을 지키고자 하는 사일런 가드의 이상과 비밀이 소문으로 퍼져나가는 현실이 더 이상 가깝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도. 하지만 카다른은 비밀을 간수하고자 하는 목적인 검을 놓지 않은 채 붙잡아 피를 흘려내어 정말로 퍼져가는 비밀을 잡아내었다.
마지막으로 카다른은 요새가 되어버린 아파텐 성 앞으로 돌아왔다. 여왕 비오나든은 카다른을 내려다 보았지. 신 레딜센 왕국을 혼란에 빠트려 노여움을 산 센다트의 군대는 붉은 모래 여인 레시니아의 시선 아래, 시신들이 붉은 모래에 덮이지 못 하고 새들에게 쪼이며 썩어 문드러져 해골만이 남았지. 스스로가 비밀을 발설할지 몰라 말없이 침묵으로 긴 여정을 떠나고 온 카다른이, 승리할 거라 믿어 기다리다 죽은 아란드 인들 유골 위에서 노래를 읊었지.
카다른은 여왕 비오나든의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그대가 날 위해서가 아니라 부르려 노래를 불렀고
난 노래를 따라 부름에 응해
그대 앞에 왔으니]
카다른이 우려했던 대로 비오나든은 얼마 못가 사라질 신 레딜센 왕국을 지키고자, 아파텐의 지하 유산에 손을 대었던 게다. 비오나든은 카다른을 그리워해 불렀던 부름의 노래는 지하 유산이 준 영향으로 사랑이 아닌,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구 레딜센 왕국이 버리려했던 영속의 욕심이 앞섰던 게다. 인연이 만나려 한 부름은, 의미가 변색되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허한 부름이 되었다.
비오나든은 신 레딜센 왕국의 종속을 위해, 스스로가 지하 유산을 이용해 불멸자가 되려 했다. 카다른은 여왕 비오나든의 마음을 바꾸기에는 늦었다는 걸 알게 되었지. ‘이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레딜센 왕국이 가지려 한 영원함의 치명적인 결함을 비오나든이 알게 될 때까지의 ‘기다림?’일까. 불멸을 버리고 시간 끝에 다가올 죽음을 비오나든이 받아들일 것인가. 아님 카다른 자신이 생을 다해 죽으면서 비오나든이 영속에 매달려 고통 받는 걸 막지 못한 한탄만이 기다리고 있을 건가. 고뇌하는 카다른을 붉은 모래의 여인 레시니아가 부른 새들이 지켜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비밀을 지키려 한 카다른도 비오나든과 같은 길을 걸을 것에 대한 신의 의구심이 보였다.
카다른이 틀렸고, 모든 걸 놓아 하늘로 떠나갈 새들과 같은 생각을 했을까, 비오나든은 불멸을 추구한 선대 구 레딜센 왕들과는 다른 결정을 내릴 것인가. 비오나든의 마음과 아파텐 성문은 닫혀 있었다. 성문으로 갈 길인 다리도 올려져있었지. 발걸음을 돌려서 여정으로 돌아가 이어 떠날지, 비오나든이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릴지 카다른은 고민했다. 하지만 모두들 몰랐다.
[그러나 다들 몰랐네]
모두들 레시니아 사막의 연인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서로가 각자를 사랑하며, 한쪽이 관심이 사라질지언정 반대쪽은 상대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카다른은 비오나든이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그녀를 위해서 곁에 갈 것임을. 카다른 자신이 옛 사일런 가드가 아닌 다른 자가 되었고, 후에도 다음으로 전과는 달라진 카다른 자신이 서 있을 것을.
카다른이 비오나든의, 여왕이 사일런 가드의 손을 잡아 주었다. 떨어져 있던 연인은 다시 만나 ‘재결합’했고 무서울 게 없어진 둘은 신 레딜센 왕국이, 또 하나의 구 레딜센 왕국이 될 때까지 피로 레시니아 사막을 적셨다. 비밀을 발설하려 하는 자, 레시니아를 손에 넣으려는 자 모두 쓰러졌다. 침혈자 카다른과 여왕 비오나든 둘이 사라지고, 붉은 모래 부족이 일부를 제외하고 검은 교단에 흡수된 지금까지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레시니아의 연인 비오나든과 카다른은 커져가는 각자 가진 힘을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둘은 힘을 포기하고 내려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지하 유산을 손을 대었던 비오나든은 원하던 영생을 누리나, 바엘론처럼 피를 마셔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지하 유산이 찾지 못 하도록 숨겨두었던 이유가 있었던 게다. 비오나든이 방치되었다면 역사가 달라져 신 레딜센은 번영했을 테다, 피의 저주라는 어두운 이면이 세상을 뒤덮었겠지. 카다른은 비오나든이 피로 인해 괴로워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굶주림으로 인해 끓어오르는 피에 고동치는 여왕 비오나든의 심장을 찔렀다. 피를 원해 갈증으로 달궈진 심장이 검 루첼란을 녹이려 했고. 비오나든은 검을 붙잡아 놓질 않았다. 카다른은 검을 비틀었고, 비오나든은 숨이 끊어졌지.”
다르마타는 검 루칠란의 꺾인 부분을 파일에게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