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목의 여왕과 검은 관.

  • 장르: 판타지 | 태그: #브로파인 #브로파인의모험
  • 분량: 25회, 220매
  • 소개: 왕을 섬기지 않는 베텐 가 자제 파비엥이 계모인 사만다가 생모 파엔나의 물건들을 모두 불태우려하자 유품 목걸이만을 빼앗기지 않으려 버려진 성당 로텐으로 도망을 가 숨겨두었으나. 파... 더보기

(구) 브로파인의 모험 – 12

21년 2월

천막 안에는 검날의 끝부분이 옆으로 꺾인 검을 연한 보라색 눈의 남자가 숫돌에 갈고 있었다.

“내가 말한 모래는 가져 왔겠지? 너희들이 부탁한 일을 처리하느라 쉬지 못해 검이 달아올랐다. 희생자들 중에는 서로 간에 깊은 연으로 맺어진 자들일 수록 피를 보기를 갈망하지. 난 레시니아 사막에서 가져온 붉은 모래라 했다. 고와서 날에 흠집 안 나는 모래지. 물을 가지고는 나에게 주어진 검 루칠란을 식힐 수가 없다. 레시니아에서의 뙤약볕 말고는 데워지지 않고 차가움을 유지하는 붉은 모래만이 검의 바람을 잠재울 수 있다. 붉은 모래가 사막 여신인 레시니아의 피로 적셔져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이지. 붉은 모래를 적셨던 레시니아의 피 맛으로 루칠란이 배가 부르게 하여 잠들게 하는 것이다.”

파일은 대답하지 못 했고, 검에 시선을 둔 남자는 몸을 돌렸다.

“네놈들이 신께 제물로 바친다며 심장 빼낼 시간은 있고, 기껏 고생해서 납치 해다가 필요한 제물을 구해다준 나에게 물건 하나 갖다 줄 틈은 없는 게냐? 난 검은 교단의 사일런 가드다. 죽음을 넘나드는 시험을 통과해, 교단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일하는 내가 심부름이나 하고 있는 거냐. 자일로를 불러라. 사일런 가드인 나 다르마타는…”

다르마타가 파일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파일의 벨트에 걸린 유령 영지가 된 크로치포크 대장간에서 만든 무기를 발견하고, 다르마타가 검을 들자. 파일은 눈을 감았다. 다르마타는 파일에게서 무기를 빼앗고, 자신의 검을 내려 화로에 올려둔 쇠그릇에 담긴 물속에 날을 넣었다.

“루칠란을 차가운 물에 넣으면, 놈이 성을 내지. 끓는 물이 튀어서 데일 수가 있다. 적당히 뜨거운 물이어야 놈이 참고 성질을 죽이지. 잠시 뿐이지만.”

다르마타가 파일의 검을 빼들었다.

“유령을 베는 검. 육체가 아닌 영혼에 해를 입히려면, 무덤을 관리하는 묘지기들이 만든 무기를 사용해야지. 소녀여, 보아하니 제국에 나타나는 온갖 괴물들을 잡고 다니는 사냥꾼으로 보이지는 않은데. 이곳에는 무얼 하러 찾아온 것이냐. 호기심에 이끌려 왔다면 필시 나에게 당도하기 전에 자일로 휘하의 부하들에게 죽었겠지.

넌 지쳐 보인다, 긴장도 했고. 물이라도 한잔 마시겠느냐?”

다르마타가 잔에 물을 따랐다. 다르마타는 파일에게 잔을 주고, 남은 물은 검 루칠란을 담근 쇠그릇에 부었다. 김이 피어오르며 물이 끓었다. 천막 외부에서 창을 든 자일로의 부하들이 지나가는 게 그림자로 보였다.

“가방에 든 건 책이고, 거기 옆 주머니에는 깃털 펜이 있군. 글 쓰는 걸 좋아하나?”

파일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르마타는 빼든 파일의 검을 검집에 넣었다.

“책도 읽겠군. 헤그윌에 사는 벨롱그 레빈도르가 쓴 ‘그대가 날 부르니.’ 시집이 하나 있지. 시집이라 알려졌지만, 누군가의 애절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벨롱그 족속이자 나무 속을 파서 만든 집에서 사는 레빈도르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떠나면서, 겪게 된 이야기 중 하나를 쓴 것이지. 글을 쓴다면 그 책을 추천하겠다, 소녀여.

벨롱그 주제에 글 하나는 잘 쓰더구나. 과거에 이름 좀 남긴 글쟁이들 뺨을 칠 정도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벨롱그라는 족속이기에, 처음에 잘 알려지지 않아 옮겨 적은 사람이 대성당의 성녀 아톨리다 하나여서 책이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대가 날 부르니.’ 책의 존재를 아는 글쟁이들은 그걸 얻으려 목숨도 불사르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레빈도르 책을 얻지는 못 했을지언정, 헛소리도 섞였겠지만 일부 부분이라도 알아내며 그 갈망을 통해서 시대에 족적을 남길 명작들을 남겼다.

그만큼 레빈도르가 쓴 걸작이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다. 하지만 내용에 담긴 필력만이 중요한 건 아니다. 레빈도르의 책을 얻어내려는 글쟁이들 보다 더 적은 수의 존재들은, 책에 숨겨진 재결합이라는 핵심에 의의를 두지. 레빈도르 책 ‘그대가 날 부르니.’의 다른 이름은 유나텔 콜리안이다. ‘재결합’이라 부르기도 한다. 필력 하나로 훌륭하지만, 왜 그 책에 미치도록 끌렸을까?

소녀여, 너도 책 콜리안에서 나오는 시를 알고 있을 것이다. 주로 뱃사공들이 많이 불렀지. 책의 첫 부분에서 시작하는 시를 말이다.

‘그대가 나를 부르고, 나는 그대에게 갔소.’ …누군가 자신을 불렀다. 자신을 찾은 이에게 갔지. 이 시는 한 연인의 비극으로부터 시작했다. 황후의 노여움을 사서 상인 무리를 위협한다는 죄를 뒤집어쓴 붉은 모래 부족은, 레시니아 사막에서 사라졌고 그들의 조상이 세운 왕국 레딜센이 과거에 세운 아파텐 성으로 피했다.

제국군을 보냈다만, 얻은 건 사막에서의 낮과 밤의 열기와 추위로 죽은 시신들뿐이었다. 레시니아 사막에서 붉은 모래로 항아리에 담아둔 음식을 보관한다. 썩지 않고 오래 보존되기 때문이지, 죽어서 모래로 덮였던 시신이 불어오는 바람에 모습이 드러나면 제국군은 겁에 질렸다. 의외로 추위에 많이들 목숨을 잃었지.

황후 에슐리안 시기는 여제 레이븐이 왕좌에 앉은 지금과는 달리 말단 병사로 귀족 자제가 있을 정도로 계급 차이의 선이 뚜렷하지 않았다. 졸병이 아니어도 솔선수범해서 전장에서 싸워야 했지. 겁쟁이처럼 뒤에서 숨는 지금과는 달리 말이다. 그때는 일개 병사 뿐 아니라, 장교와 기사에 속한 귀족 자제들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궁전 안팎에서 압력을 넣어 제국군은 붉은 모래 부족과 싸우는 경우는 적었다.

황후 에슐리안의 부추김에 붉은 모래 부족을 괴롭힌 건, 레시니아 아래 남쪽 사막 지역에 위치한 아란드 왕국의 군주 센다트였다. 왕후 에슐리안이 서쪽으로 오가는 상인을 위협한다는 명목이 먹혔던 건, 위험하기는 하지만 레시니아 사막이 서쪽과 동쪽을 나눠진 두 세계를 이어주는 중요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에슐리안이 아란드 왕 센다트가 점령을 못 하고 당해보라 한 건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센다트가 레시니아를 차지하면 제국은 서쪽과 교역하고 싶음, 그에게 통행료를 주어야겠지. 센다트는 레시니아를 차지해 교역로를 통제하고 싶었던 게고, 왕후 에슐리안은 일부러 그의 진출을 허용했지.

소녀여, ‘그대가 날 부르니’의 시에 나온 널브러진 해골들이 누구 것 같으냐? 어리석은 아란드의 센다트를 따라 나온 졸개 놈들 것이지. 붉은 모래 부족은 센다트에게 맞서려 잊히고 남은 과거의 잔해를 주워 담았다. 조상들의 나라를 다시 세운 게지, 레딜센 왕국이 무대 위로 재등장하고 책의 주인공인 연인이 나타났다.

신 레딜센 왕국의 여왕 비오나든과 피로 땅이 잠기게 한 침혈자 사일런 가드 카다른이다. 비오나든과 카다른이 각자 해야 할 일 때문에 헤어지면서 ‘재결합’의 이야기가 시작되지. 모두가 두려워 할 이야기가.

붉은 모래의 여인인 레시니아가 물이 없어 갈증으로 고통 받는 부족을 가엾게 여겨 자신의 피로 모래를 물들였고, 모래에 스며들고도 넘쳐흘러 남은 피로 만들어진 샘을 부족의 적들로부터 지키고 위치를 비밀로 간수하는 자들이 사일런 가드였다. 신 레딜센 왕국이 사리지고, 검은 교단에 사일런 가드인 속하게 되면서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말을 하는 것도 물 낭비이고 실수로 샘의 위치를 노출 시킬 거라는 우려에 말을 안 하다시피 했다.

사일런 가드 카다른은 붉은 모래 부족이 신 레딜센 왕국을 세워 아파텐 성으로 가서 아란드 군주 센다트의 침략에 항전하면서, 아란드 군이 레시니아가 내려준 선물인 샘들을 쓰지 못 하게 막았다. 카다른은 아파텐 성 안 우물을 관리하면서, 여왕 비오나든과 함께 옛 레딜센 왕족이 남겨둔 지하 유산을 발견했다. 서로 가까워져갔다, 지하 유산을 어찌 처리할 지에 의견이 갈리면서 관계이 틈이 생겼지만. 하지만 연인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진실은 남아있다만, 갈등은 존재했다. 카다른은 아란드 군주 센다트의 위협이 사라지고 잠잠해지면, 위기 때문에 생겨난 신 레딜센 왕국은 비오나든 재위 후에 몇 대를 못 가서 부족 단위로 나눠질 걸 알아 지하 유산에 손을 대는 건 외려 외부로 새어나갈 원인이 될 거라 했다. 마지막으로 불을 붙인 건, 레시니아 사막 변두리 출신이라 말한 바엘로라는 자가 샘에 나타나면서였지.

바엘로의 출신이 거짓이라 여겼고, 사일런 가드가 샘의 위치를 비밀로 지켜야 할 의무를 하려 카다른은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그녀를 끝낼 셈이었다. 여왕 비오나든은 바엘로가 살기 위해 거짓말 한 것임을 아는 눈치였지만, 살려주며 샘물을 마시게 해주었다. 카다른의 우려대로 바엘론이 아파텐 성 지하 유산에 손을 대었다. 유산의 주인이 아니었던 바엘론은 저주를 받아 필멸자의 피로 목숨을 연명하게 되었지. 도망가는 바엘론을 잡아야 할 사람은 카다른 뿐이었다. 그를 제외한 사일런 가드는 아란드 군주 센다트가 샘을 쓰지 못하고 말라 죽게 만드느라 바빴다. 카다른 자신이 바엘론을 막을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 했다는 생각이 그가 혼자 나서게 만들었다.

침혈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가 시작되지. 바엘론을 잡기는 어려워도, 그녀와 접촉할 수 있을 아란드 인들을 죽였다. 바엘론이 레시니아 사막을 벗어나자, 카다른은 거기까지 따라가서 대화를 나눈 자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살해했다. 사막의 샘이 어디에 있는지와 지하 유산에 대해 알려지면, 신 레딜센 왕국이 건재한 시기가 지나고 사일런 가드와 붉은 모래 부족만으로는 침략자들을 막기 어려워질 테다. 그리고 레시니아의 자식인 붉은 모래 부족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겠지. 그만큼 붉은 모래 부족의 존폐가 걸릴 정도로 중요했다.

바엘론에게서 레시니아의 비밀을 들은 자들이 악의가 없어도 퍼트리고 다녀서 자신들 모르게 붉은 모래 부족의 멸망에 일조할지 모르는 일이 아니더냐. 레시니아 사막이 어찌되든 누가 차지하는 게 문제로 걸린 세력이 아니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은 없으며 자기 일에만 몰두 한다. 무고하면서도 아는 것이 없는 죄로 죽는 게지. 구 레딜센 왕국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샘의 위치가 노출되고 아파텐 성 지하 유산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지 않게 알아서들 입단속을 했다면, 사일런 가드가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죽일 이유가 생기지 않았겠지.

바엘론이라는 자는 목숨만은 건지고 싶었는지 레시니아의 비밀을 바구니에 든 꽃잎처럼 뿌렸지. 비밀을 주워들은 희생자들을 차례로 죽이는데, 평범한 사람부터 시작해서 베기에는 감당이 안 될 자들로 이어졌다. 비밀을 알게 된 희생자들에게 검의 시선이 향한 동안, 바엘론이 음유시인으로 정체를 숨기고 살아갔다. 바엘론은 전설적인 가수 렌드리달의 제자라 속이고 사람들을 유혹해, 그들의 피로 연명하던 어느 날. 한 왕국 왕자와 공주의 초청으로 거절은 못 하고 가서 노래를 불렀지. 카다른이 바엘론 자신이 생각한 시간 보다 빨리 왔다. 카다른은 손님으로 들어가 기다렸지. 그가 비밀을 지키려 사람을 죽인 게지, 살인에 맛을 들여서 손에 피를 묻혔던 건 아니었다.

바엘론은 요청에 축제 때에 흩뿌리는 꽃잎이 되어 노래 불러 연회에 온 이들의 귀에 레시니아의 비밀을 속삭였다. 레시니아 사막의 비밀이 연회 손님들의 눈앞에 흩날렸다, 카다른은 검 루칠란을 꺼내어 해야 할 일을 했지. 당시 검 루칠란은 사막에서 사람의 몸에 담긴 피와 물을 흘러넘치게 만들어 출혈로 죽게 하는 방식이었다. 새하얀 식탁보가 붉게 젖었지. 검 루칠란에 한 번이라도 베인다면, 레시니아 사막을 벗어나기도 전에 피를 많이 흘렸고 그와 함께 오는 갈증에 죽는다.

공주와 왕자의 어머니인 왕비 밸리아스는 바다의 여신 란에게 빌어 피를 부른 바엘론과 카다른에게 저주를 내렸다. 바엘론에게는 두 번째가 되겠지. 카다른은 고향인 레시니아가 아닌 곳에서 자신과 희생자 중 하나의 피라도 땅에 닿으면, 카다른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해온 추악한 행위와 지키고자 했던 비밀이 만천하에 들어날 거라 했다.”

쇠그릇에 담긴 물은 증발했고, 다르마타는 검 루칠란을 꺼내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루칠란을 다르마타는 천으로 물기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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