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 장르: 판타지, 로맨스 | 태그: #종교 #사제 #아린 #마니 #제사 #판타지 #로맨스 #음악
  • 평점×898 | 분량: 81회, 2,812매
  • 소개: 마니족의 사제 마누는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사제였고 젊은 남자였으며 파계한 자였으며 살인자였으며 이상주의자였다. 그의 부모가 아기였던 그를 신전에 데려왔을 때 마니족의 공주... 더보기

마니족의 1대왕 카르마 전기

17년 3월

마니족이 아직 숲 속에서 살았을 때는 마니족도 아린족처럼 집 없이 살았다. 잠도 그냥 나무 아래에서 잤다. 대제사장은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아서 숲 속을 마냥 걷고 있었다. 밤이슬이 축축하게 밟혔다. 벌레 우는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숲은 조용했다. 그 날 밤, 한 마니가 대제사장을 찾아왔다. 그가 훗날 ‘카르마’라는 이름을 받고 마니족 최초의 왕이 된 마니였다. 눈매가 날카롭고, 누군가를 응시할 때면 상대를 궤뚫어 버릴 것 같은 시선이었다. 달빛이 나뭇잎 사이로 들어와서 카르마를 비추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다가와서 아무 말 없이 대제사장을 잠시 바라보기만 했다. 눈에서 마치 안광이 나는 듯 했다. 어두운 밤인데도 대제사장은 그 눈을 마주보기 어려웠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면 다른 마니들이 깰 듯 하니 다른 곳으로 같이 가 주셨으면 합니다.

대제사장은 그 젊은 마니의 눈빛을 더 이상은 받아내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가 가는 대로 그의 뒤를 따라 더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벌레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달빛이 두 마니를 비추었다. 카르마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마니족은 숲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대로 계속 숲에 머물면 먹을 게 없어서 서서히 굶어죽고 말 겁니다. 이미 마니족의 수가 줄고 있습니다.

“숲 밖으로 나가면 뭐가 있는가?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숲 밖이 아무리 험하고 거칠다 해도 굶어 죽거나 인어에게 홀려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카르마의 눈이 아닌 코와 입술 사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렇게 하니까 조금 더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자네는 육체를 위해 신을 버릴 텐가! 신께서는 이 숲에 계시네.

카르마는 차분하게 조목조목 설명했다.

“정말로 마니족이 믿는 대로 그 크고 하얀 나무에 신께서 깃들어계십니까? 정말 그 신께서 마니족을 위하신다면 마니족이 이렇게 될 때까지 놔두셨겠습니까? 나무에 신이 계시다면 다른 곳에도 신이 계실 것이고, 저 나무의 신이 ‘진짜’ 신이시라면 숲 안에서나 밖에서나 마니족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숲을 벗어나면 신을 숭배하지 못 한다고 하신다면, 숲에 머무르다가 마니족이 멸족해도 신을 섬기지 못 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기에 머물든 아니면 떠나든 모두 신께서 결정하실 것이니 신께 맡겨야 하네. 신께서 우리를 멸족할 때까지 놓아두시진 않으실 테니 계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게.

대제사장은 단호하게 말을 끝맺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는 약간은 뿌듯하고 조금은 긴장되는 마음으로 카르마의 말을 기다렸다. 찰나 카르마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듯 했다. 대제사장은 뒷걸음질치려는 자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정말로 신께서 현신하신다면 저 젊은 마니를 닮으셨을 것이다. 카르마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알겠습니다”라고 짧게 답했다.

그는 밤이슬 맞은 풀을 밟으며 등을 돌려 다른 마니들이 잠든 곳으로 걸어갔다. 대제사장은 카르마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뒷모습이 당당하고 확신에 차 있다. 카르마가 멀어져 가고 숲 속에는 대제사장 혼자 서 있다. 여태껏 아무리 밤에 돌아다녔어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갑자기 무섬증이 든다. 우스운 일이다. 지금은 인어도 아린도 모두 잠들어있다. 혼자 있는 마니를 공격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무엇이 이렇게 무서운 것일까. 아까 그 젊은 마니의 형형했던 눈빛이 무서운 건지도 모르겠다고 대제사장은 생각한다. 아니다. 그 눈빛은 그렇게 강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제사장은 아침이 되면 그 마니를 불러다가 다시 보기로 했다. 그래도 무서움이 가시지 않아 대제사장은 옷자락에서 바람이 일도록 뛰다시피 걸어서 다른 마니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너무 빨리 걸었는지 심장이 쿵쿵 뛴다. 대제사장은 자기의 심장을 달래며 잠이 들었다.

언제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밤이 가면 아침이 왔다. 아침이 오면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들어왔다. 그 햇살에 벌레들은 울음을 그쳤고 새들은 깨어나 노래했다. 차가웠던 밤이슬은 영롱한 아침이슬이 되었다. 그 때쯤 되면 마니족은 주섬주섬 잠에서 깨어 일어났고 아린족은 벌써 온 숲을 헤집으며 사냥을 하고 있었고 인어들은 수면위로 뽀글뽀글 기포를 만들어 올렸다. 대제사장은 조그만 지류의 물을 떠서 세수를 했다. 세수를 마치고 속을 파낸 빈 나무열매의 껍데기에 물을 담았다. 햇살이 그 물에 비쳐 반짝였다. 신이 깃들어 계시다 하여 신성시하는 나무뿌리 근처에 그 물을 뿌렸다.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눈을 감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다른 때에는 아침에 머릿속이 맑았는데 오늘은 머릿속이 어지럽다. 어젯밤 꿈이 뒤숭숭해서 그런가.

꿈에서 대제사장은 지금처럼 이 나무로 왔다. 그런데 나무는 없고 그 젊은 마니가 나무 대신 나무가 있던 자리에 있었다. 그는 어젯밤에 그랬던 것처럼 등을 돌려 걸어갔다. 그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대제사장은 숨을 헉헉대며 따라갔다. 그 마니는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 젊은 마니는 숲 밖으로 나갔다. 숲 밖에는 거대한 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불길이 거셌다. 카르마는 망설이지 않고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제사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불 속에 발을 들여놓았다. 뜨겁지 않았다. 불길 속으로 들어가자 불은 꺼지고 드넓은 평원이 나타났다. 나무에는 과일이 주렁주렁 열려있고 맑은 강물이 흘렀다. 흰사슴이 떼를 지어 몰려 다녔다. 풍요로 가득 찬 땅이었다. 대제사장은 카르마를 보았다. 그는 대지에 굳건히 서 있었다. 곧 그의 팔은 나뭇가지가 되고 그의 발이 나무의 뿌리가 되었다. 숲 속에 있는, 마니족이 섬기는 그 나무였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 마니를 따라서 숲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일까. 꿈에서 봤던 것처럼 숲 밖은 풍요의 땅일까. 혹시 신께서 그를 보내신 것은 아닐까. 대제사장은 평소보다 명상을 일찍 끝냈다. 나무 아래에는 죽은 흰사슴 두 마리가 와 있다. 아린족이 보낸 것이었다. 숲 속에는 아린족과 마니족이 동시에 충분히 먹을 만한 과일과 짐승은 없어서 사냥을 하다 보면 두 부족이 같은 사냥감을 노리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럴 때면 결국에는 아린족이 사냥감을 차지하게 되었다. 아린들은 가끔 마니족을 불쌍히 여겨 먹을거리를 갖다 주었다. 그래보았자 마니족에게는 부족한 양이었다. 마니족이 아린족이 보낸 흰사슴 고기를 먹고 난 후에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을 불렀다. 카르마를 데려오라고 했지만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카르마의 행방을 물었지만 아무도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지 못 했다. 어젯밤에 숲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카르마는 한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마니족은 만성적인 영양결핍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다. 늙은이들과 어린아이들은 잘 견디지 못 했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았다. 대제사장은 카르마의 말을 마음속으로 자꾸 곱씹었다.

카르마가 사라진 지 사십사일째 되던 날 저녁이었다. 노을이 붉게 타오르는 저녁이었다. 하늘이 불타는 것 같았다. 붉게 물든 구름이 하늘 위에 길게 떠 있었다. 노을을 배경으로 나무들이 검게 보였다. 사납고 광기어린 붉은 노을이었다. 검은 나무들이 잔바람에 잎새와 가지들을 서로 부딪으며 소리를 냈다. 숲의 저편에서 새들이 날카롭게 울며 날아올랐다. 인어들이 붉게 물든 호수를 어지럽게 휘저었다. 아린족이 “캬아”하는 소리로 무엇인가를 위협했다. 흰사슴들이 이리저리 급하게 내달렸다. 마니족이 아이들을 불러들였다. 무엇인가가 숲의 저편에서 오고 있었다.

그것이 다가올수록 숲 속은 점점 조용해졌다. 마니족은 신성한 나무 아래 동그랗게 모여서 벌벌 떨었다. 긴장감이 숲속을 채웠다. 그것은 점점 마니들이 모인 쪽으로 다가왔다. 마니족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끌어당겨 안았다. 모두 숨을 죽였다. 어떤 마니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은 마니족 앞으로 나섰다. 지팡이를 쥔 대제사장의 손에 땀이 찼다.

마침내 그것이 보였다. 카르마였다. 그가 이상한 짐승을 타고 왔다. 그는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 했는지 깡말라서 눈빛만 형형했다. 머리카락은 마구 헝클어져 있었고 옷은 헤지고 찢어졌다. 찢어진 옷 사이로 상처가 보였다. 상처가 깊고 컸다. 그는 제대로 걷지도 못 했지만 눈빛은 전보다 더 광채를 발했다. 그가 짐승에서 내리며 말했다.

“신께서 보내신 겁니다. 나무에 묶어 두십시오.

머리에 크고 날카로운 뿔이 달린 그 짐승은 흰사슴보다 몸집이 크고 성질도 사나웠다. 카르마가 내리자마자 씩씩대고 콧김을 뿜으며 발로 땅을 차고 뿔로 대제사장을 들이받으려 했다. 제사장들이 그 짐승을 신성한 나무에 묶었다. 목에 줄이 묶여있지 않았다면 마니족 몇은 뿔에 받혔을 것이었다. 짐승은 발굽이 단단하고 다리가 튼튼하고 곧았다. 짐승의 길고 부드러운 검은 털이 저녁의 햇빛에 빛났다. 대제사장은 조금 떨어져서 그 짐승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이제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 한 짐승이었다.

“걸을 수 있겠는가?

대제사장이 카르마에게 불었다. 그는 고통이 심한지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지팡이를 주신다면 조금.

사제 하나가 나뭇가지를 꺾어 지팡이를 만들어 카르마에게 주었다. 카르마는 지팡이를 짚고 힘들게 한 발짝씩 걸었다.

“따라 오게.

대제사장은 카르마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앞장서 걸었다. 그들은 카르마가 숲을 떠나기 전 이야기를 나누었던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붉던 하늘이 어느새 먹푸른 빛으로 변했다. 어디선가 “끼이”하는 작은 짐승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아린족이 구멍쥐를 잡아먹나 보다. 그 외에 숲은 조용했다. 카르마는 힘든지 땅바닥에 길게 누웠다. 아무리 다쳤다고는 해도 새파랗게 젊은 마니가 대제사장 앞에서 드러눕는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짓이었다. 그러나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 카르마를 보면서 대제사장의 마음속에는 외경심과 연민이 두 마리 뱀처럼 서로를 휘감았다. 헤지고 때 타고 피가 묻어있는 옷. 헤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상처. 더럽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깡말라서 광대뼈가 도드라진 얼굴.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위엄과 강한 기운이 이 마니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대제사장은 까닭 없이 그가 두려워졌다. 도망가든지 공격하든지. 아주 잠깐, 대제사장의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 딱 감고 지금 이 마니의 정수리를 지팡이를 내려친다면 더 이상 이런 두렵고 껄끄러운 감정은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이런 생각을 부정하려는 듯이 아버지가 아들을 염려하듯 부드럽게 물었다.

“그 동안 어디서 뭐 하고 지냈는가?

“신께서 저의 자질을 시험하셨습니다.

카르마는 감은 눈을 뜨지도 않고 말했다. 대제사장은 그가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차라리 반가웠다.

“숲 밖으로 나갔습니다. 숲 밖에서, 신을 영접했습니다. 신께서, 마니족의 미래를 보여 주 셨습니다.

지면 안 된다. 이 마니에게 지면 안 된다. 나는 대제사장이고 이 자는 일개 마니에 불과하다. 밀리지 말자. 이 헛소리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대제사장은 속으로 되뇌었다.

“자네가 꿈을 꾸었나 보군. 신께서는 마니가 숲을 벗어나는 것을 허용치 않으시네. 신께서 숲에 계시는데 어느 마니가 숲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신께서 저를 숲 밖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저 나무가 아닌 진짜 신께서. 지금의 마니족이 믿고 있는 신은 신이 아니라 그냥 큰 나무일 뿐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천지만물을 빚으시고 마니족을 보호하시는 신은 숲 밖에 계십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카르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제사장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물병을 끌러 카르마에게 물을 먹여주었다. 카르마는 말을 이었다.

“저 나무가 어떻게 신이 되었습니까. 다른 나무들보다 크니까 비가 오면 저 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고, 밤이면 쉬고, 그러면서 저 나무가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믿게 되고, 그래서, 숭배하고, 신성시하게 된 것 아닙니까. 숲 밖에는 우리가 만든 신이 아닌, 우리를 만든 신이 계십니다. 그 신들께서, 제게 풍요로 가득한 마니족의 미래를 보여주셨습니다.

“자네 말을 내가 어떻게 믿겠는가? 만일 자네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왜 신께서 대제사장도 아닌 일개 마니에 불과한 자네에게 그걸 보여 주셨냐는 말이야.

“신께서 마니족을 숲 밖으로 이끌 ‘왕’으로 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징표로 저 짐 승을 보내어 저를 시험하셨습니다.

말을 할수록 카르마의 말은 점점 짧아졌고 목소리도 작아졌다. 대제사장은 망연히 서 있었다. 이 마니가 타고 온 짐승은 충분한 징표였다. 사납게 발버둥치던 거대한 짐승. 카르마를 태우고 있을 때는 순하게 잘 길들여진 듯 했는데 다른 마니가 짐승을 인계받자마자 짐승은 사납게 날뛰었다. 그 짐승의 야생의 눈이 이 마니의 눈과도 닮은 것 같다고 대제사장은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는 어찌할 텐가.

대제사장은 차분하게 물었다. 카르마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눈빛이 전보다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신들께서, 대제사장님께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전 많이 다쳤습니다. 이대로 절 여기에 버려 두시면 전 죽게 될 겁니다. 절 마니족을 이끌 왕으로 인정하시고 아린족에게 데려가 약을 구하신다면 전 살겠지요.

“자네 말대로, 신의 뜻이라면, 신께서 인정하신 ‘왕’을 내가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께서 선택을 대제사장님 몫으로 남겨 두셨습니다. 대제 사장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카르마는 힘이 빠진 듯 다시 눈을 감았다. 대제사장은 눈을 감고 있는 마니를 보았다. 눈을 감고 바닥에 등을 대고 아무런 방어 태세도 취하지 않고 누워 있는 마니. 마니족은 광대뼈와 코가 그리 높지 않고 얼굴형이 갸름해서 별로 강한 인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 누워 있는 마니는 그 동안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는지 야윌 대로 야위어서 광대뼈가 도드라져 강한 인상이었다. 대제사장은 마니의 코 밑에 손을 대 보았다. 끊길 듯 아주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대제사장은 한참을 갈등했다. 지금 이 마니의 목숨은 대제사장의 손에 달려 있다. 지금까지 믿어 온 마니의 신앙을 뿌리 채 흔들어 놓는 마니. 이 마니를 살려 둔다면 대제사장이 승인하지 않더라도 마니들을 이끌고 숲 밖으로 나갈 것이다. 이미 그 짐승을 끌고 와서 마니족을 흔들어 놓지 않았는가. 오늘 저녁 마니족은 신 대신 그 짐승을 숭배했을 것이다. 새로운 땅, 새로운 종교. 나무에 깃드신 신의 진노는 마니족에게 재앙을 가져 올 것이다. 대제사장 자신과 사제들의 지위도 흔들릴 것이다. ‘카르마’라는 이 마니는 출생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자를 살려 두면 마니족에게 해가 될 것이다. 이 자는 마니족을 혼돈과 공포와 불확실성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지금 죽여야 한다. 굳이 지팡이로 내려칠 필요조차 없다. 그냥 내버려 두기만 해도 이 자는 죽을 것이다. 대제사장은 마니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발을 땅에서 뗄 수 없었다. 크게 다친 마니를, 그가 아무리 마니족 전체에게 공포와 혼돈을 가져온다 해도 죽으라고 일부러 내버리고 가는 것이 대제사장이라는 자가 할 짓인가? 이 마니가 죽고 나면 대제사장에게는 평생 죄책감이 기생동물처럼 들러붙을 것이다. 아니다. 지금 하려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 마니족 전체를 위한 일이다. 이 자와 대제사장, 둘만 희생하면 된다. 대제사장은 눈을 질끈 감고 두세 발자국을 간신히 옮겼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마니족을 위해서 카르마를 죽인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사실은 두려워서였다. 그 쏘아보는 듯 강렬한 눈빛이 마음 속 깊은 곳을 휘저었다. 그 눈빛을 받아내기가 너무 두렵고 힘들었다. 그 눈을 보고 있으면 대제사장인 자신이 나약하게 느껴졌다. 이 젊은 마니는 강력하고 강인했다. 대제사장에게는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어서 다른 마니들을 압도했다. 이 자를 살려둔다면 대제사장의 자리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대제사장은 자신조차도 그 동안 카르마에게 의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없는 동안 계속 그가 한 말들을 생각했다. 숲 밖으로 나가는 꿈을 꾸었던 그 날부터 대제사장은 마음속으로 계속 이 마니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서 상의하고 그에게 의존하고 싶었다. 이 꿈의 뜻이 무엇인지, 정말로, 정말로, 혹시나, 어쩌면, 만약, 숲 밖에 신이, ‘진짜’ 신이 계시다면, 그 신께서 이 마니를 보내신 것이라면 이 마니를 살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이 살려주지 않으면 신께서 살려주시지 않을까. 마니족을 숲 밖으로 이끄는 것이 이 마니의 운명이라면. 만약 그가 살아난다면 대제사장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대제사장은 다시 뒤돌아서 카르마에게 다가갔다. 어느새 밤이 되었다. 하얀 달이 차갑게 빛났다. 밤이슬이 차가웠다.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카르마의 입술은 하얗게 말랐다. 대제사장은 물을 몇 모금 그의 입에 흘려 넣었다. 카르마는 눈을 뜨지도 물을 마시지도 못 했다. 대제사장은 카르마를 들쳐 업었다. 카르마의 몸이 시체처럼 축 늘어졌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그동안 오죽 굶었으면. 대제사장은 등에 업힌 마니에게 갑자기 측은한 감정을 느꼈다. 대제사장과 카르마는 아린족의 텃세권에 들어섰다.

“툽파여, 나오라.

대제사장의 외침에 잠시 후 ‘툽파’라는 아린이 나타났다. 다른 아린족보다 몸집이 크고, 강한 이와 날카로운 손톱이 위압적이었다.

“무슨 일인가?

“이 마니가 크게 다쳐서.

“대신하여 말하지 말라. 내가 이 마니에게서 직접 들을 테니.

툽파는 갑자기 저쪽으로 갔다. 뭘 하려고? 대제사장은 내심 불안했다. 여기는 아린족 밖에 없다. 얼마 후 툽파는 약초를 뜯어왔다. 노란 꽃이 달린 풀이었다. 꽃향기가 진했다. 툽파는 돌로 약초를 짓찧어 젊은 마니의 귀 뒤와 눈꺼풀에 발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마가 눈을 떴다. 대제사장은 카르마를 나무에 기대 주었다. 툽파가 카르마에게 물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카르마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많이 다쳤다. 치료할 약초를 원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흰사슴 몇 마리가 필요하다. 마니족이 흰사슴 몇 마리와 목재와 식량을 숲 밖으로 가져가게 해 준다면 마니족이 신성시 하는 유향나무에 첫 번째 꽃이 피는 날 마니족은 숲을 떠날 것이다.

“일단 약초를 주겠다.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

대제사장은 툽파와 카르마를 보았다. 둘은 서로의 눈을 보며 대화하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살벌하게 부딪쳤다. 어느 누구도 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툽파의 눈도 카르마만큼이나 강렬하고 깊었다. 툽파가 다시 숲 저쪽으로 사라졌다가 손에 약초를 들고 돌아왔다. 초록빛 잎사귀에 잎맥과 줄기가 붉은 약초는 상처를 소독하고 독을 빼내는데 쓰였고 잔가시가 촘촘히 난 약초는 내장기관을 다스리는데 쓰였다. 하얀 솜털에 덮인 약초는 상처를 아물게 하는 효능이 있었다. 툽파는 아무 말 없이 카르마를 치료했다. 날카롭게 구부러진 손톱을 내지 않고 감춘 툽파의 손놀림이 섬세했다. 카르마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치료를 받았다.

새벽이 밝아오기 직전, 밤과 새벽의 경계가 되는 시간쯤 되어서야 치료가 끝났다. 카르마의 낯빛이 많이 편안해졌다.

“고맙다. 많이 나아졌다. 그럼 아까 하던 이야기를,

“그 이야기는 몸이 다 낫거든 다시 와서 하라. 아마 열흘 정도면 완쾌될 것이다.

툽파는 대제사장을 보며 말했다.

“이 마니가 올 때는 업혀 왔지만 이제는 걸어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옆에서 부축이나 하라.

카르마가 일어나 툽파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대제사장이 옆에서 카르마를 부축했다. 돌아오는 내내 카르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꽉 다물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대제사장이 카르마를 찾았지만 그는 또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그는 열흘이 지나서 홀연히 다시 돌아왔다. 머리도 단정했고 얼굴도 깨끗했다. 상처도 다 나았다. 대제사장은 사제들을 이끌고 허리를 굽혀 그를 영접했다. 그도 허리를 굽혀 답례했다. 지켜보던 마니들은 모두 놀랐다. 지금까지 대제사장은 다른 어떤 마니에게도 허리는 커녕 고개도 숙인 적이 없었다. 마니족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카르마는 그 웅성거리는 소리에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짐승이 묶여 있는 나무로 향했다. 지금 그의 ‘정통성’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그 짐승밖에 없다. 짐승은 가까이 다가오면 뿔로 받아버리겠다는 듯 사납게 날뛰었다. 묶여있는 나무가 뽑힐 것 같았다. 마니족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카르마는 짐승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짐승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카르마가 짐승의 목덜미에 가만히 한 손을 얹었다. 사납게 날뛰던 짐승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얌전히 그 자리에 앉았다. 대제사장이 향로를 들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마니족이여, 새로운 신탁이 내려졌다. 새로운 신께서 카르마를 왕으로 임명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숲 밖으로 인도하라 하시었다.

사제들 사이에서는 이미 다 설득이 되었지만 처음 듣는 마니들은 충격을 받은 듯 잠시 조용했다가 곧 격한 반응을 쏟아냈다.

“새로운 신? 새로운 신이라면 지금까지 섬겨 온 신은 무엇입니까?

“숲 밖이라고요? 숲을 벗어나면 신의 진노를 삽니다요!

“새로운 신께서는,

대제사장이 대답하려는데 카르마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대제사장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했다.

“어차피 이해하지 못 할 마니들에게 어렵고 자세하게 설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고선 카르마가 대제사장 대신 말했다.

“새로운 신께서는, 저 나무가 아닌 진짜 신께서는 마니족에게 굶주림 대신 풍요를 주실 것 이다. 이 어둡고 먹을 것도 없는 숲 대신 밝고 광활하고 풍요로운 땅으로 마니족을 이끄실 것이며 내가 그 신을 대신하여 길을 인도할 것이다.

카르마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위엄 있었다. 마니족은 카르마가 뿜어내는 특유의 강한 분위기에 눌려 조용해졌다.

“그저 나무 그늘의 범위 안에서 비바람으로부터나 마니족을 보호하는 지금의 ‘신’과 달리 새로운 신들께서는 어느 곳에나 계시며 어느 곳에서나 마니족을 보호해 주실 것이다. 마니 족에게서 아기가 태어나지 않은 지 꽤 오래 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마니족은 멸족할 것이다. 그 전에 숲 밖으로 가야 한다. 신들께서 마니족을 번성케 하실 평원으로.

카르마가 말을 마치자 대제사장이 나섰다.

“며칠 동안 같은 꿈을 꾸었다. 숲을 벗어나자 큰 불길이 있었지만 그 불길을 뚫고 나가니 풍요로운 새로운 땅이 보이는 꿈을.

대제사장은 그 꿈을 떠올리는 듯 눈을 감았다. 카르마는 그 정도면 할 말은 다 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사제들께서는 불을 피우고 의식을 준비하고 계십시오. 대제사장께서는 저와 함께 어디 좀 잠깐 다녀오셔야 겠습니다.

대제사장은 다시 카르마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마니족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것. 사제들이 의식을 준비하기 시작하면 마니들은 함께 의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의식 하나가 끝나면 또 무엇인가 마니족에게 충격을 줄 만한 것을 하고 또 다른 의식이 있고 할 일이 있고 그러면서 마니족을 정신없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갈 것이다.

카르마는 말없이 앞장서서 아린족의 텃세권에 들어섰다. 숲속은 나무들이 울울해서 어두웠다. 툽파가 카르마와 대제사장이 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다른 아린들을 데리고 나와 있었다.

“몸은 다 나았는가?

“보다시피 아주 건강하다.

“저번에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려고 왔는가?

“그렇다.

“증인이 필요하다.

“마니족의 대제사장을 모시고 왔다.

“아니. 마니족과 아린족 외의 제 삼자가 필요하다. 인어의 호수로 가자. 인어들이 증인이 되어 줄 것이다.

아린들이 먼저 인어의 호수로 향했다. 카르마와 대제사장도 그들을 따라갔다. 인어의 호수는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인어들이여, 나 툽파를 비롯한 아린족들과 마니 둘이 왔다. 우리가 그대들의 영역에 들어 가도록 허락해 주겠는가?

툽파가 외치자 인어들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일인가?

“아린족과 마니족의 협정에 인어가 증인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러 왔다.

인어들은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곧이어 호수 속의 모든 인어들이 수면위로 상반신을 드러냈다.

“좋다. 증인이 되어 주겠다. 우리의 영역으로 와 협정을 맺어도 좋다.

카르마가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마니족의 왕으로서 아린족에게 부탁한다. 첫재, 마니족은 앞으로 5일간 흰사슴을 생포할 것이다. 이 흰사슴들은 마니족에게 양보해 달라. 둘째, 마니족이 한달 간 먹고 지낼 열매와 풀을 숲에서 가져가겠다. 마니족의 생활에 필요한 돌과 나무도. 셋째, 앞의 두 가지를 지켜 준다면 마니족은 첫 번째 유향나무의 꽃이 피는 날 숲을 떠나서 평원에 정착할 것이며 더 이상 아린족과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대제사장은 말 그대로 기분이 나빴다. 그래도 명색이 대제사장인 자신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린 카르마가 심히 불쾌했다. 이것은 자신을 무시한 처사가 아니고 대체 무엇인가. 이런 중대한 일을, 이제까지 마니족을 다스려온 대제사장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카르마 이 자는 지나치게 독단적이다.

“하나만 빼고는 다 들어줄 수 있다. 흰사슴을 생포하지 말라. 생명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이 다. 먹을 만큼 죽여서 고기를 가지고 나가라.

“마니족에게는 가축이 필요하다.

“그 어느 누구도 살아있는 것을 소유할 수는 없다.

아린족과 카르마가 팽팽하게 대립했다. 인어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어 특유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린이여, 어리석은 마니족을 내버려 두어라. 저들은 처음에는 흰사슴의 자유를 빼앗고 삶을 소유하겠지만 나중에는 마니족 그들 스스로에게 그것을 행할 것이다.

아린족은 인어의 말을 따랐다.

“아린족이여, 협정은 꼭 지키겠다.

“마니족이여, 그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겠는가?

“우리의 신께 맹세하겠다.

툽파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아린족은 마니족의 ‘신’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 카르마와 내 후손들에게 걸겠다. 만약 마니족이 이 협정을 지키지 않는다면 마니족의 왕가는 결코 번영을 누리지 못 할 것이다.

아린족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한참 동안 의논했다. 카르마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좋다. 마니족의 약속을 받아들이겠다.

카르마도 받아들였다. 인어가 차갑고 높은 목소리로 선포했다.

“오늘 인어를 증인으로 아린족과 마니족이 협정을 맺었으니 이후로 이 협정을 어기는 자는 인어들이 증인의 자격으로 벌할 것이다.

마니족의 텃세권으로 돌아오는 내내 카르마는 굳은 표정으로 말 한마디 없이 걷기만 했다. 제사장은 조금 떨어져서 카르마를 따랐다.

“아까 왜 그런 협정을 맺으셨습니까? 협정을 어기면, 왕가가 번영을 누리지 못 할 것이라 는……. 협정을 깬 대가를 왕가가 다 감당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대제사장은 자기 말투에 자기가 놀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대했던 마니에게 이제는 존대가 섞이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가 지금 걷고 있는 꼴을 보라지. 대제사장이 얌전히 카르마의 뒤를 따르고 있다. 갑자기 달라진 자신의 처지에 대제사장은 불만과 불안을 함께 느꼈다. 카르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걷던 대로 걸으면서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왕’이 대제사장보다 위라는 사실을 이렇게 사소한 것에서부터 가르치는 것이다.

“권위와 권력에는 책임이 뒤따르는 법입니다. 이 정도 희생을 하지 않는다면 마니족에게 ‘왕’을 따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대제사장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대꾸를 해야 했다. 카르마의 말 속에는 사제들은 어떤 희생도 하지 않고 권위와 권력을 누리고 있지 않느냐는 질책이 숨어있었다. 카르마는 사제들이 모시는 ‘신’조차 부정하는 자다. 사제들 정도야 무시하고도 남을 자다.

“사제들은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철저한 금욕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종교를 통해 마니족에게 평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게 나무일뿐이라고 해도 어쨌건 마니들은 심적으로 기댈 곳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래서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언제 뭐라고 했습니까?

“그냥, 사제들의 그 동안의 노고도 좀 알아주십사 하고.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가면 사제들이 제사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겠지요. 걱정 마십시오. 새로운 신들께서도 지금의 사제들을 용서하시고 받아주실 것입니다.

드디어 카르마의 입에서 대제사장이 바라던 말이 나왔다. 사제들의 지위를 보장하겠다는 말을 얼마나 조바심 내며 불안하게 기다렸던가. 대제사장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카르마의 옆얼굴을 바라본다. 아직은 힘이 약해서 어쩔 수 없이 사제들을 내버려 두는 건가? 힘을 기른 후엔 사제들을 어떻게 처리할 셈인가.

카르마와 대제사장이 마니족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사 준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카르마가 대제사장에게서 석검을 건네받았다. 그가 석검을 들고 짐승이 묶여있는 신성한 유향나무 아래에 섰다.

“나 카르마가 마니족의 왕으로서 말한다. 방금 전 인어를 증인으로 하여 아린족과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에 따라 마니족은 앞으로 5일간 흰사슴을 생포할 것이다. 또한 마니족이 한 달 간 먹고 지낼 열매와 풀을 숲에서 채집할 것이다. 마니족의 생활에 필요한 돌과 나무도. 그리고 마니족은 첫 번째 유향나무의 꽃이 피는 날 숲을 떠나서 평원에 정착할 것이 다. 첫 번째 유향꽃이 필 때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일부터 평원에서의 미래를 준비하려면 많이 바쁠 것이다. 그러나, 오늘밤은 먹고 마시고 춤추며 즐기라. 숲 밖에서의 풍요를 미리 기뻐하라.

마니족은 당황했다. 아직 카르마가 ‘왕’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이지 못 하겠는데 새로운 신에 숲을 떠나기까지 한다는 것은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몇몇 마니들은 카르마에게 무엇인가를 큰 소리로 말하려 했다. 그러나 사제들이 마니들을 막았다. 카르마는 짐승에게 다가가 한 손으로 짐승의 뿔을 잡고 석검을 잡은 손으로 짐승의 두 뿔 사이를 찔렀다. 우드득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짐승이 마지막으로 사납게 날뛰었다. 카르마는 다시 한 번 방금 전 찔렀던 곳을 또 찔렀다. 짐승이 무릎을 꺾으며 앞으로 푹 쓰러졌다. 카르마는 끈적끈적하고 검붉은 짐승의 피를 뒤집어썼다. 피를 온몸에 묻힌 채 모닥불빛을 받은 카르마는 악귀처럼 무섭고 흉측했다. 카르마는 죽은 짐승의 날카롭게 굽은 두 뿔을 베어내어 양손에 쥐고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살점을 발라냈다. 마니족과 사제들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 하고 카르마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짐승의 가죽과 뼈, 고기, 내장을 분리해낸 카르마는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나서 정화의식을 생략한 채 짐승의 고기를 불에 구웠다. 고기에서 기름이 뚝뚝 떨어졌다. 그 때마다 불길이 더 거세게 타올랐다. 고기 굽는 냄새는 유향나무의 향보다 강했다. 짐승 가죽을 쓰고 짐승의 살점을 잘라내는 카르마의 모습은 마치 죽은 짐승이 살아나 자신의 살을 베어내는 것 같았다. 짐승은 카르마였고 카르마는 짐승이었으며 그들은 신에게서 왔다. 불길은 활활 타오르고 마니족과 사제들의 얼굴은 불빛에 일렁여 일그러져 보였다. 사제들이 구워진 고기를 잘라서 마니족에게 배분했다. 마니족은 고기를 게걸스럽게 뜯어먹었다. 온몸이 짐승의 피로 뒤덮인 카르마가 대제사장에게 고깃덩이를 건넸다. 대제사장은 기름기가 많은 고기를 보고 죽은 짐승의 가죽을 덮은 피투성이의 카르마를 보았다. 카르마가 그 형형한 눈빛으로 대제사장을 쏘아보았다. 그 눈이 생전의 짐승의 눈과 닮았다. 대제사장은 자기 몫의 고기에 입을 댔다. 고기를 굽던 불이 서서히 사그러들 때 쯤에는 원체 소식하는 사제들을 제외하고는 아이부터 늙은이까지 모든 마니들이 흡족해했다. 카르마는 또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제사장은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유향나무 아래를 서성거리며 생각을 하고 또 했다. 마니족인 언제 이렇게 먹었던 적이 있었던가. 사제들은 절제된 소식을 함으로써 모범을 보이고 마니족의 위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카르마는 마니족을 먹였다. 지금까지의 신과 사제들이 먹여주지 못 한 마니족을 새로운 신과 ‘왕’이 배불리 먹여주었다. 마니족은 이제 주저하지 않고 새로운 신을 택할 것이다.

다음날 아침, 카르마는 새벽부터 마니족을 깨웠다. 카르마는 마니족을 나누어 한쪽은 흰사슴을 잡을 올무를 만들게 하고 한쪽은 열매와 먹을 수 있는 풀을 채집하게 하고 한쪽은 돌과 나뭇가지 등을 모아오게 했다. 마니족이 일하러 숲 속으로 들어가자 카르마왕께서 대제사장에게 다가오셨다.

“시간은 촉박하고 일손은 부족합니다. 사제들께서도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예. 그렇지 않아도 곧 신께 제사지내려 했습니다.

카르마왕께서는 대제사장의 공손한 대답에 눈살을 찌푸리셨다.

“한가하게 제사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제 말은, 마니들이 가져 온 돌, 나뭇가지 등을 사제 들께서 정리하고 가공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나마 이 일이 덜 힘들 것 같아서 사제들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한가하게 제사드릴 시간이 없다’니, 그 동안 사제들이 열과 성을 다해 모셔온 제사가 그렇게 하찮다는 말인가? 사제들에게 다른 마니들처럼 일을 하라니 사제들의 격을 어디까지 떨어뜨리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사제들은 감히 항의하지 못 했다. 겉으로 드러난 왕의 태도는 흠잡을 데 없이 공손하셨고 말투와 눈빛은 거역할 수 없을 만큼 단호했다. 한참 후에야 사제 하나가 주볏주볏 말을 꺼냈다.

“왕이시여, 사제들은 사제들의 할 일이 있습니다.

“사제이기 이전에 마니족입니다. 마니족이 없으면 사제들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뒤쪽에서 어떤 사제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방법을 몰라서 못 하겠습니다”라는 핑계를 댔다. 왕께서는 딱 잘라 말씀하셨다.

“제가 가르쳐드리지요.

대제사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이 좋아 가공이고 정리지 사실은 뒤치닥거리 아닌가.

‘왕이시여, 지금은 당신의 명을 따르지만 곧 사제들이 왕을 넘어설 때가 올 겁니다.

마니족은 사슴을 산 채로 잡고 풀과 열매를 모으고 돌과 나무를 구해왔다. 사제들은 마니족이 가져 온 것들을 갈무리했다. 카르마왕께서는 그 모든 일들을 독려하시고 지휘하셨고 대제사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왕을 관찰했다. 모두가 열심히 일했다. 하루해가 짧았다. 마니족은 늦은 밤까지 일했다. 왕께서는 사정없이 마니족을 몰아붙이셨다. 일정은 촉박하고 일감은 쌓여있었다. 일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하루가 지나고 또 다른 하루가 지나고 여러 날이 지났다. 유향나무 가지 끝에 흰 꽃봉오리들이 맺히기 시작했다. 마니족의 준비가 거의 완결되어갔다. 밤마다 나무 위에 하얀 달이 떴다. 달이 둥글어질수록 유향나무 꽃봉오리도 부풀었다. 그믐달이 뜨던 날 유향나무 꽃은 마지막 꽃잎 한 장만을 오므리고 있었다. 마침내 보름달이 뜨던 밤 유향나무의 첫 꽃이 완전하게 피었다. 마니족은 조용히 대이동을 시작했다. 다음날 아침, 숲 속 어디에서도 마니족은 보이지 않았다. 마니족의 흔적만이 숲 속에 남아있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서 그 흔적들도 희미해져갔다. 한 동안은.

마니족은 숲을 벗어나 평원에서 태양을 맞이했다. 숲 밖에서 처음 맞는 아침이었다. 마니족의 눈 앞에 너른 평원이 펼쳐져있었다. 나무도 없고 풀도 듬성듬성 나 있는 메마른 평원이.

“이게 풍요의 땅이라구? 아무것도 없잖아!

“숲으로 돌아갑시다! 여긴 아무 것도 없어!

“‘왕’인지 뭔지 하는 작자한테 속은 거 아냐?

마니족 내부에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그 동안 열심히 일한 보상이 겨우 이 메마른 황무지라니. 두렵고 화가 났다. 대제사장은 속으로 웃었다. 왕은 이제 숲으로 되돌아가셔야만 할 것이다. 숲으로 돌아가면 사제들은 다시 예전의 신성하고 빛나는 지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왕께서는 숲으로 돌아가지 못 하실 수도 있다. 이미 마니족 몇이 손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쥐고 있었다. 카르마는 전혀 흔들림 없이 성큼성큼 마니족 앞으로 나섰다.

“마니족은 들어라. 이제 우리는 겨우 첫 발을 내디딘 것뿐인데 벌써부터 이렇게 분열되면 앞으로 어떻게 하겠느냐.

카르마왕께서는 그 강렬한 태양과도 같은 눈동자로 마니족을 둘러보셨다. 그 눈빛을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왕께서는 말씀을 이으셨다.

“나는 이 새로운 땅, 새로운 하늘, 새로운 신 앞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정식으로 왕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니족은 신과 왕의 보호 아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카르마는 대지의 한 가운데 섰다. 사제들이 카르마에게 흰숫사슴 한 마리를 바쳤다. 마니족이 가진 흰사슴 중 가장 몸집이 크고 뿔이 거대한 수사슴이었다. 왕께서는 대제사장을 그 숫사슴 앞으로 불러내셨다. 왕을 상징하는 그 숫사슴 앞에서 대제사장은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왕께서는 숲에서 죽였던 짐승의 뿔로 흰숫사슴을 찌르셨다. 흰사슴의 목에서 붉은 피가 나왔다. 왕께서는 그 피를 자신의 얼굴에 바르시고 피 묻은 손을 대제사장의 머리에 얹으셨다. 정식으로 카르마가 왕이 되고 왕이 대제사장을 임명한 것이다. 마니족이 평원에 둥글게 늘어섰다. 가운데로 잡털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새끼를 한 번도 낳아보지 않은 암사슴이 끌려나왔다. 마니족이 새로운 신께 바치는 제물이었다. 사제들이 찬가를 불렀고 마니들이 따라 불렀다. 사제들이 노래에 맞추어 구덩이를 팠다. 구덩이의 바닥에는 숲에서 가져 온 유향나무 이파리를 깔았다. 그리고 그 구덩이에 암사슴을 밀어 넣어 생매장했다. 왕께서는 죽은 숫사슴의 고기를 마니족에게 나누어 주어 허기를 면하게 하셨다.

대관식이 끝나자 마니족은 대관식 전보다 더 불안해했다. 대지는 광활했지만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 위에서 모두들 막막하기만 했다. 카르마왕께서는 마니족을 이끌고 끝없는 황야를 마냥 걷기만 하셨다. 가도 가도 끝없는 황야. 왕께서는 일정한 방향을 잡아서 가시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무도 풀도 없는 황야에는 물도 없었다. 어린애들이 보채기 시작했다. 흰사슴이 헉헉거렸다.

“신탁을 받으러 잠시 나 혼자 떠나있겠다. 기다리고 있으라.

왕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흰사슴을 타고 해가 지는 쪽으로 가셨다. 붉은 해는 지평선 아래로 차츰차츰 사라져갔고 왕은 검은 점처럼 점차 작아지시며 멀리 사라지셨다. 마니족은 왕을 기다렸다. 어린애들은 이제는 보채지도 못 하고 축축 늘어졌다.

“이게 풍요의 땅이라구? 물 한 방울도 없는데 무슨 풍요의 땅이야?

“그 자가 우릴 속였어! 왕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야!

“어쩌면, 신께 벌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몰라. 숲을 버리고 우리의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믿어서 벌을 받는 거야.

괄괄한 젊은이들이 마른 땅에 불이 붙듯 흥분해서 떠들어댔다. 사제들은 불쏘시개로 불을 피우듯 교묘하게 마니족을 들쑤셔댔다.

“숲이 좋지 않았소? 먹을 건 부족했지만 적어도 물은 있었는데.

“숲이었다면 이런 땡볕이 아니라 나무 그늘 아래 앉아있을 텐데.

대제사장은 말없이 왕을 기다렸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왕은 돌아오지 않으셨다. 대제사장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수습을 못 하니까 내뺀 게로군. 신탁은 무슨 신탁. 새로운 신이란 건 없었어. 그 동안 우리가 그 자에게 놀아난 거야. 사실은 별 거 아닌 자였던 게야.

닷새째 되는 날 마니들이 대제사장에게 몰려왔다.

“숲으로 저희들을 인도해 주십시오. 숲으로 돌아가 신께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이대로 그 카르마란 자만 믿고 있으면 저흰 다 죽어요.

대제사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자. 숲으로. 새로운 신 따위는 없다.

마니족은 엿새째 되던 날 다시 숲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레째 되던 날 마니족은 카르마왕과 마주쳤다. 왕께서는 이레 전 떠나실 때처럼 흰사슴을 타고 계셨다. 그러나 이레 전과 달리 흰사슴은 생기 있었고 왕의 손에는 싱싱한 나뭇가지가 들려있었다. 숲에 있던 나무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나무였다.

“뭐하는 짓들이냐!

왕께서 흰사슴을 타신 채로 호통을 치셨다.

“물이 없어서 다시 숲으로 가려다가…….

카르마왕께서는 마니족 가운데로 오셨다.

“숲으로 돌아갈 자는 돌아가라. 붙잡지 않겠다. 신앙심이 부족한 자들은 돌아가라. 인어의 노래와 아린의 송곳니가 기다리는 숲으로 돌아가라. 가서 헤매다가 햇빛도 들지 않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라. 다시는 숲 밖으로 한 걸음도 내딛지 못 할 것이다. 신앙이 부족한 자들을 아샤루카타이신께서 용서치 않으실 것이다. 신을 의심했던 자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목마를 것이다.

마니족은 고개를 숙이고 꿇어앉았다. 사제들이 잽싸게 기도했다.

“신이시여, 저희를 용서하소서. 감히 신을 의심한 저희를 용서하소서.

마니족은 카르마왕의 신께 용서를 빌었다. 눈물을 흘리는 마니도 있었고 계속 중얼거리며 기도하는 마니도 있었다. 꿇어앉아 자기 자신을 쥐어뜯으며 용서를 비는 마니도 있었다. 큰소리로 불만을 말했던 마니일수록 열심히 빌었다. 왕께서는 흰사슴들을 묶은 줄을 풀게 하셨다. 가져오신 나뭇가지를 흰사슴들의 코에 대고 냄새를 맡게 하셨다. 흰사슴들은 코를 벌름대며 나뭇가지 냄새를 맡더니 흥분한 듯 잠시 이리저리 겅중겅중 뛰다가 무리를 지어 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니족은 그 뒤를 따랐다. 흰사슴들이 갑자기 한 곳에 멈춰서 발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 곳을 파라.

왕께서 가리키신 곳을 파자 지하수가 솟아올랐다. 흰사슴과 마니들이 한 데 뒤엉켜 물을 마셨다. 난장판이었다. 서로를 밀어내가며 입을 대고 물을 마셨다. 존경받는 사제라고 사정이 다르진 않았다. 초인적인 자제력을 가진 몇몇 사제를 제외하고서는 사제들도 품위 없이 마니들과 뒤엉켜 물을 마셔댔다. 젊은이들이 먼저 물을 마신 다음에야 노인과 어린애들에게 차례가 왔다. 왕께서도 물을 드시고 그 때까지 물을 마시지 않고 있던 대제사장에게 말을 거셨다.

“걱정 마십시오. 신께서는 대제사장님께서 신과 왕을 배반했다 해도 물은 먹게 해 주실 겁니다. 설마 대제사장을 목말라 죽게 하시진 않으시겠지요. 아니, 물을 드시는 게 신의 명령이실 겁니다.

대제사장은 한두 모금 물을 마셨다. 그리고 왕 앞에 꿇어 앉았다.

“잠시나마 신을 저버린 것에 대해 마니족을 대신해서 사죄드립니다.

왕께서는 대제사장을 일으키시며 대제사장의 귓가에 속삭이셨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마십시오. 신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대제사장께서 사제들

을 시켜 마니족을 선동하고 앞장서서 숲으로 돌아가려 하신 것을요. 잘 처신하십시오.

물을 마신 마니족은 다시 흰사슴을 따라갔다. 저 멀리 푸른 평야가 보이고 강물이 보이고 야생소떼가 강가에서 물을 마셨다. 왕께서는 마니족에게 농사를 가르치셨다. 아이들이 태어났고 마니족은 번성했다. 카르마왕은 혼인을 권하는 사지들을 물리치시고 홀로 기도하시더니 발특마에서 흰사슴을 탄 처녀를 모셔오라고 명하셨다. 사제들은 발특마로 떠났고 대제사장은 밤에 은밀히 제사장들을 불렀다.

“왕께서 오늘 왕비를 정하셨습니다. 사제 쪽과 연관 있는 왕비를 들여 힘의 균형을 이뤄보려 했 는데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 처녀를 죽이거나 우리 왕비 후보와 바꿔치기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위험한 방법입니다. 왕께서 그런 것쯤 예상 못 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일단은 그 왕비를 뵙고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만들어야지요.”

“아마 만만한 여자는 아닐 겁니다. 공개적으로 제사 드리는 것을 거부하시고 혼자 기도하시는 게 아무래도 신께서 고르신 왕비가 아니라 왕께서 직접 고르신 왕비를 맞이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신의 뜻이었다고 우기시면 알 게 뭡니까? 혹시 신께서 택하신 왕비라 해도 신께서 카르마 왕의 왕비를 만만한 여자로 정하셨을 것 같습니까?”

사제들이 발특마에 도착했을 때 한 시골처녀가 흰사슴을 타고 있었다. 수수한 농민의 옷을 입고 있었으나 왕비다운 기품이 있었다. 그 처녀가 ‘아노미’였다.

“왕께서 나와 혼인하시고 싶으시다면 직접 오시라고 전하세요.

사제들을 믿고 따라갈 수 없으니 왕께서 직접 오셔서 데려가라는 거다. 사제들은 그냥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왕께서 그 말을 전해 들으시고 웃으시더니 직접 아노미를 모셔 오셔서 혼례를 치르셨다. 대제사장은 왕과 똑바로 눈을 맞출 수 있는 마니를 처음 보았다.

 

왕께서는 농기구를 개량하셨다. 왕의 재위 기간 내내 농기구의 개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평야 정착 초기에 마니족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태어났다. 농지가 부족했다. 황야를 개간했는데도 농지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이제는 더 넓힐 땅이 없었다. 대제사장은 남몰래 미소지었다. 그는 왕 앞에 허리를 굽혔다.

“왕이시여, 방법이 없습니다. 숲을 개간해야 합니다. 아린족과 충돌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 습니다.

“대제사장께서는 내가 아린족과 맺은 협정을 알면서도 말씀을 잘 하십니다. 차라리 날 제거하고 사제들은 숲으로 돌아갔으면 한다고 노골적으로 말씀을 하시지요.

“왕이시여, 방법이 없습니다. 농지가 부족합니다. 마니족은 굶주림을 피해 숲을 버리고 평야로 나와서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땡볕아래서도 일했습니다. 그런데도 농지가 부족해서 굶주린다면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왕의 옆에 앉아 계시던 아노미 왕비께서 한 말씀하셨다.

“대제사장은 지금 감히 왕을 협박하는 겁니까?

대제사장의 미간이 가늘게 찌푸려진다. 그러나 겉으로는 얼굴을 찌푸렸는지 아닌지 알아보기 힘들다. 나이가 들어 얼굴에 주름이 자글거리기 시작하고부터는 표정을 숨기기 쉬워졌다. 지금 미간을 찌푸리는 것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기 힘들만큼 미묘하다. 아노미, 이 여자는 지나치게 똑똑하다. 대가 센 여자다. 왕께 어울릴 만하다. 왕비께서는 왕을 대신해서 대제사장과 설전이라도 벌이실 태세다. 왕께서는 왕비를 제지하시며 말씀하셨다.

“농지가 부족하다기보다는 마니의 수가 너무 많은 겁니다. 수를 좀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린족에게 마니족을 좀 던져줍시다. 마니족이 아린족의 숲을 빼앗으려면 아린족도 마니 족의 목숨을 뺏을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대제사장은 왕의 말뜻을 알아차린다. 왕께서는 지금 무서운 생각을 하고 계시다. 아린족과의 전쟁에서 마니족을 의도적으로 희생시켜 마니족의 수를 적정한 수준으로 줄이겠다는 계획이다.

“왕이시여, 그 뜻을 이해했습니다.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희생이 뒤따르는 법이긴 합니다. 아린족과의 협정을 깸으로써 왕께서 희생하실 것처럼.

왕께서는 대제사장을 매섭게 쏘아보셨다. 대제사장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왕비의 목소리가 대제사장의 숙인 고개 위에 떨어진다.

“왕가의 고뇌를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제사장님 말씀대로 농지를 늘리기 위해서는 슬프지만 왕가도 마니족도 희생을 감수할 수 밖에 없겠지요. 대제사장님과 사제들도요.

숲의 남쪽에 있는 평야는 마니족의 땅, 평야의 북쪽에 있는 숲은 아린족의 땅이다. 숲을 개간하려면 아린족과 싸울 수 밖에 없었다. 아린족의 저항은 거셌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갈고리처럼 뾰족한 손톱, 빠른 다리를 가진 아린족에게 많은 마니들이 희생당했다. 아린족의 인구가 줄어들 정도였다. 왕께서는 후퇴를 명하지 않으셨다. 왕께서는 도리어 숲과 평야 사이를 차단하셨다. 나무와 돌로 만든 농기구로는 아린족을 이길 수 없었다. 마니족이 가장 두려워했던 아린은 ‘툽파’였다. 그는 아린족을 이끌고 마니족을 공격했고 나무 위에서 무거운 돌을 던져 마니족을 죽였다. 그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니족이 멸족하게 되는 건 아닌가 했을 때 카르마왕께서 ‘모사비’라는 금속을 발견하셨다. 왕께서 모사비로 무기를 만들 것을 명하셨다. 모사비로 만든 무기를 들자 상황이 역전되었다. 모사비는 아린족의 이와 손톱보다 강했다. 카르마왕께서는 아린족을 무참히 죽였다. 나무가 베어지고 불태워졌다. 왕께서는 곳곳에 덫을 치고 함정을 팔 것을 명하셨다. 며칠 후 달빛이 미친 듯이 괴괴하게 빛나던 밤 툽파가 함정에 빠져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사지를 묶인 채 카르마왕 앞에 마주섰다. 툽파와 왕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툽파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왕께서는 그 눈을 똑바로 응시하시며 칼로 툽파의 심장을 찌르셨다. 살아남은 아린족은 깊은 숲 속으로 도망쳤다. 왕께서는 새로 얻은 영토에 궁궐을 세우시고 툽파를 제물로 바쳐 신께 감사드렸다. 그 때 왕께서는 세운 궁궐이 지금은 궁 겸 신전으로 쓰이는 이 곳이다. 모사비로는 농기구를 만들게 하셨다. 모사비로 만든 농기구는 돌과 나무로 만든 농기구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대제사장은 설마 했었다. 설마 왕께서 자신의 백성을 죽이시기까지야 하겠는가. 대제사장에게 밀리지 않기 위한 단순한 위협인 줄 알았다. 사제들을 시켜 농지가 부족하다고 마니족을 선동하고 부추기고 민심을 흉흉하게 들쑤셔놓기는 했지만 그것은 왕을 압박해서 스스로 물러나시게 하거나 마니족이 왕을 끌어내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설마 정말로 마니족의 상당수가 죽어나갈 때까지 지켜만 보실 줄이야. 모사비는 아린을 사냥하기 전 이미 발견되어 있었다. 그리고 툽파를 죽이실 줄이야. 약초로 자신의 목숨을 구했던 툽파를 죽이실 정도면 대제사장도 못 죽이실 이유가 없다.

“왕이시여, 이제 아린족과 마니족이 적대관계로 돌아선 이상, 아린족이 숲을 벗어나 마니 족을 공격하지 못 하도록 아린족을 통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린족이 마니족을 공격하지 못 하도록 아린의 수를 줄이고 기를 꺾을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기 적으로 아린족을 사냥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반 마니들이 아린을 사냥한다면 위험하기도 하고 기강에 혼란이 올 수도 있으니 아린족을 신께 바치는 신성한 제물로 삼아 사제들이 아린족을 사냥함이 좋을 듯 합니다.

“사제들께서 그런 위험한 일 하실 필요 없습니다. 왕이 직접 하겠습니다. 영원히 대를 이 어서 협정을 어긴 벌을 받을 수 있도록.

카르마왕께서는 곧 왕비 아노미께 왕자를 얻으시니 그가 2대왕 ‘아사리’셨다. 왕자는 이목구비가 뚜렷하셨다. 눈빛은 부드러우셨지만 다른 생김새는 카르마왕을 빼닮으셨다. 왕자를 안아보신 왕의 표정에는 후련함과 서운함과 기쁨과 미안함과 희망과 불안과 슬픔이 섞여 있었다.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카르마왕께서는 왕자가 태어나시고 얼마 후 서거하셨다. 자살로 처리되었다. 툽파의 심장을 찔렀던 칼로 자신의 목을 베셨다고. 그러나 사실은 아니었다.

왕자께서 태어나시고 며칠 후 그믐달이 뜬 밤이었다. 시종이 대제사장에게 왕의 편지를 가져왔다. 대제사장은 봉투를 뜯었다. ‘지금 바로 제단 앞으로 오십시오.’ 대제사장은 시종에게 “곧 가겠다고 전해 드려라”고 하려다가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시종이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을 희번덕거리며 사지에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냐? 대체 왜 이러느냐?

당황한 대제사장이 허둥대는 사이에 시종은 이미 혀를 빼물고 축 늘어져 죽어버렸다. 입술과 혀가 퍼랬다. 독살이었다. 방 안에 독살당한 시체와 단둘이 있는 것이 무서웠다. 대제사장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발뒤꿈치가 무엇인가에 턱 걸린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니 문지방이다. 대제사장은 방문을 쾅 닫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달음에 제단까지 달려갔다. 심장이 뛴다. 등에 땀이 축축하다. 헉헉거리는 대제사장의 숨소리를 들으셨는지 왕께서 돌아보셨다. 낮은 목소리로 물으셨다.

“죽었습니까?

“왕께서 그리하셨습니까?

대제사장의 떨리는 목소리에 왕께서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으시고 대답하셨다.

“오늘 밤 대제사장님께서 여기 오신 것, 곧 일어날 일을 아무도 알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 랬습니다. 그 독은 강해서 시체를 녹여버릴 테니 그 시체마저도 오늘밤이 지나기 전에 사 라질 것입니다.

왕께서는 허리에 차고 계시던 칼을 뽑아 대제사장에게 건네셨다. 칼날에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툽파를 죽였던 칼입니다. 이걸로 제 심장을 찌르십시오. 제가 툽파에게 했던 것처럼.

“왕이시여,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니족의 첫 번째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은 모두 끝냈습니다. 마니족을 평야로 이끌어 그들 에게 농사를 짓게 했으며 아린족과 마니족을 죽여 마니족에게 농사지을 땅도 주었습니다. 신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마니족 중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신을 믿지 않는 자는 없습 니다.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 더 왕좌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카르마왕은 담담해보였다. 늘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같던 눈빛도 그냥 보통 마니의 눈 같았다.

“할 일이 남이있지 않으십니까? 사제들을 무찌르시고 왕권을 강화하셔야 하지 않으십니 까? 왕비님의 남편, 왕자님의 아버지 역할도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왕께서는 밤하늘을 바라보셨다. 구름이 달을 가리며 흘러갔다. 어디선가 꽃향기가 아련하게 흘러들어왔다.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왕께서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길게 뱉으시며 말씀하셨다.

“그 일은 내 아들의 몫입니다.

왕께서는 제단 위에 올라가 반듯하게 누우셨다.

“예전에 대제사장님께 날 죽일 건지 살릴 건지 결정하시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대 제사장님께서는 나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 툽파도 나를 살렸습니다. 그 결과는 대 제사장님께서 보신 그대로입니다. 툽파는 나에게 죽었고 협정은 깨졌고 사제들은 왕의 신 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나를 죽이십시오. 날 똑바로 보며 내 심장을 찌르십시오.

“왕께서는 어찌하여 신께서 주신 목숨을 함부로 끊으려 하십니까?

“이것이 신의 뜻이십니다.

대제사장은 칼을 든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왕께서 재촉하셨다.

“신과 왕을 거역하시겠다는 겁니까?

대제사장은 머뭇거렸다. 왕께서는 향유가 들어있는 단지를 들어 향유를 머리위로 부으셨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아실 겁니다.

제물을 바치는 방식이었다. 아린들을 죽여서 향유를 부어 번제를 드렸었다. 대제사장이 마침내 칼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가 왕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지 마지막이었다. 칼끝이 왕의 피부를 찢고 들어가 심장에 닿았다. 칼이 심장을 관통하여 심장을 터뜨렸다. 뜨겁고 붉은 피가 대제사장의 얼굴과 옷에 튀었다.

대제사장은 카르마왕을 보았다. 주름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 흰 머리카락이 한 올도 섞이지 않은 머리카락. 죽기에는 너무 젊었다. 쿵쾅거리며 뛰고 있는 대제사장의 심장과 이제는 뛰지 않는 왕의 심장. 대제사장은 제단에서 물러나 복도를 달렸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 피를 씻어내고 싶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것처럼 들렸다.

갑자기 누군가가 대제사장의 앞에 나타났다. 대제사장은 놀라서 그 자리에 멈췄다. 그는 대제사장을 가로막고 말했다.

“이 밤중에 어디서 무엇을 한 것이냐.

그 여자는 대제사장을 하대했다.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다. 목소리는 들렸지만 어디서 들리는지 모르겠다.

“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대제사장을 잠시 보다가 사라졌다. 대제사장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고 몇 발짝을 걸었을 때 다시 누군가가 나타났다.

“왜 네 옷과 얼굴에 피가 묻어 있느냐.

“저도 잘, 잘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대제사장을 한 번 보더니 사라졌다. 대제사장은 벽을 짚고 한 걸음씩 걸었다. 복도가 이렇게 긴 줄 전에는 알지 못 했다. 다리가 아직도 후들거린다. 눈앞에 방문이 보였다. 시종의 시체는 다 녹아 없어졌을까? 그 때 세 번째로 낯선 이가 나타났다.

“왜 떨고 있느냐. 왜 두려워하고 있느냐.

“아닙니다.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낯선 이는 사라졌다. 대제사장은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갔다. 방에 누군가가 있었다. 베 짜는 소리가 들렸다. 베를 짜던 여자가 고개를 돌려 대제사장을 보았다.

“나는 수명을 결정하는 여신 테오게이아다. 대제사장이여, 왕의 남은 목숨을 네 목숨에 이 어 붙여 주겠다. 왕은 수명을 다 하지 못 하고 죽었지만 너는 네 수명을 넘겨서 살 것이 다. 왕의 후손이 네 목숨을 끊어주기 전까지 너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 하고 오래오래 살 것이다. 늙고 추한 채로.

아까 복도에서 만난 분들도 모두 신이셨던가. 대제사장은 털썩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아닙니다.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자살이셨습니다. 저는 왕의 뜻을 따랐습니다. 제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너희 사제들과 마니족이 왕을 죽였다. 왕은 아린족과 마니족을 죽였다. 왕은 죽음으로써 죄에 대한 벌을 받았다. 그러니 사제들과 마니족도 왕을 죽인 것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저희들이 왕을 죽인 게 아닙니다!

그러나 테오게이아 여신도 홀연히 사라져버리셨다. 대제사장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피를 씻으려고 한 발짝 움직였을 때 무엇인가가 물컹한 것이 밟혔다. 다 녹고 얼굴만 남은 시종의 시체였다. 그 죽은 얼굴은 “네 죄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잿빛으로 변해가며 쭈그러들더니 녹아 없어졌다.

장례는 다음날 바로 치러졌다. 왕은 마니족의 풍습대로 화장되었다. 상복을 입으신 왕비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셨다.

“반달배를 저어 죽음의 하늘을 건너 죽은 자를 데려가소서. 카르마왕의 환생을 기 원합니다신께 비오나니 하늘 너머 죽은 자의 땅에서 카르마왕을 다시 환생 시키소서.

송가가 하늘 높이 땅속 깊이 울려 퍼졌다. 대제사장은 왕의 시신을 태우는 불길이 꼭 생전의 왕의 눈빛 같다고 느꼈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왕의 강렬하고 격렬한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왕을 추종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활하고 잔인한 왕의 모습에서 공포와 불신과 밀려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사제들을 시켜 마니들을 선동하기도 했고 왕과 대립하기도 했다. 왕을 이기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질투였는지도 몰랐다. 왕께서는 대제사장이 가지지 못 한 것들을 가지고 계셨다. 젊음과 위엄과 카리스마와 가족. 마음 한 구석이 허하다. 어쩌면 질투가 아니라 동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왕께서 안 계신다고 생각하자 대제사장은 자신이 기댈 곳 없어진 어린 아이처럼 느껴졌다. 대제사장은 고개를 떨구었다. 송가가 울려 퍼지는 내내 대제사장은 조용히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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