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 장르: 판타지, 로맨스 | 태그: #종교 #사제 #아린 #마니 #제사 #판타지 #로맨스 #음악
  • 평점×898 | 분량: 81회, 2,812매
  • 소개: 마니족의 사제 마누는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사제였고 젊은 남자였으며 파계한 자였으며 살인자였으며 이상주의자였다. 그의 부모가 아기였던 그를 신전에 데려왔을 때 마니족의 공주... 더보기

마니족의 7대왕 아나트만-1

17년 7월

아나트만왕께서는 어릴 때 부모를 잃으셨다. 카루나왕께서 왕비께 살해당하신 후 어린 왕자께서는 민간의 외가에서 신전으로 돌아오셨다. 왕자의 양육을 담당한 사제는 ‘탈루아’였다. 탈루아는 사제로서도 왕자의 양육자로서도 그리 유능한, 아니 적합한 마니가 아니었다. 차라리 일반적인 사제들처럼 냉담했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불행히도 탈루아는 심적으로 전혀 안정되지 못한 마니였다. 그 자신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 했다는 것이 더 불행한 일이었다.

 

탈루아의 피후견 사제는 ‘아우라’였다. 탈루아는 또래였던 아우라와 아나트만 왕자를 남매처럼 함께 길렀다. 아우라는 말이 없고 조용했고 아나트만 왕자께서는 산만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말썽을 피우곤 하셨다. 왕자께서는 일부러 탈루아가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셨다. 탈루아는 왕자나 아우라가 아주 작은 잘못을 해도 과도하게 큰 벌을 주곤 했다. 탈루아에게는 감정 중 신경질과 짜증과 분노만 남아 있는 듯 했다. 탈루아가 왕자의 글씨가 바르지 못하다고 왕자와 아우라에게 신경질을 내며 폭언을 퍼부었을 때 아우라는 묵묵히 그 폭언을 다 들었지만 왕자께서는 몰래 탈루아의 예복을 다 찢어 놓고서는 키득대셨다. 그 다음날 탈루아가 예복을 찢은 게 누구냐고 바락바락 성질을 부렸을 때 왕자는 “신께서 그리하셨나 봅니다”라고 딴청을 피우셨고 아우라는 아무 말 없었으며 탈루아는 아우라를 몰아세웠고 왕자는 “당신이 뭔데 아우라한테 소리를 질러!”라고 탈루아에게 화를 내셨다. 아우라는 화내는 걸 모르는 양 왕자에게도 탈루아에게도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고 늘 조용했다.

 

시간이 흐르고 왕자께서는 왕위에 오르셨다. 왕위에 오르고 나서부터 왕께서는 통치에 쏟으시는 시간보다 종교에 쏟으시는 시간이 더 많으셨다. 그러나 초기까지만 해도 왕께서는 종교에 심취하지는 않으셨다. 왕께서 종교에 몰입하시게 된 건 혼인을 거부한 후부터였다. 빨리 왕비를 들이고자 했던 사제들과 마니들의 바람을 왕께서는 뚜렷한 이유없이 거부하셨다. 그리고 아우라를 찾아 가셨다.

 

“아우라, 너와 혼인하고 싶어. 너와 함께 살고 싶어.

“왕이시여, 저는 사제입니다.

“환속해 줘. 그럼 되잖아.

“그래도 신께서는 저를 왕비로 선택하시지 않을 겁니다.

“신께서 마니족 왕가를 내 대에서 끊고 싶지 않으시다면 널 왕비로 선택하실 거야.

“신은 전능하십니다. 왕께 어울리는 마니로 하여금 왕비가 되어 왕가의 대를 잇게 하실 겁니다.

“내게 어울리는 왕비는 너밖에 없어.

“왕이시여, 저는 누구의 짝도 될 수 없습니다. 환속하여 평범한 마니가 된다 해도 그럴 겁니다. 왕께서 보시기엔 제가 침착하고 사려 깊고 평온해 보이지만 그건 제 겉모습일 뿐입 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저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아우라, 난 네 마음 깊은 곳이 어떤지 알아. 나와 같을 거야. 나도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이상 없어 보이지만 내면은 전혀 그렇지 못 해. 난 어렸을 때 외가를 돌아다니며 살았어. 친척들은 잘 해주셨지만 난 내 사촌들과는 달리 왕자였고 이모나 삼촌들의 자식도 아니어서 늘 겉돌았어. 탈루아님께 사랑받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어. 관심을 끌고 싶어서 일부러 미운 짓도 많이 했어. 그런데도 잘 안 되더라. 아우라, 내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마니는 너밖에 없었어. 그리고 넌 언제나 네 자리에 있었으니까 난 너와 언제나 영원히 같이 있을 거라 믿었어.

아우라는 눈물만 흘릴 뿐 말이 없었다.

“아우라, 나에겐 말 높이지 마. 그래야 편하게 대해 줘. 그래야 나도 네게 편하게 기대지.

“아나트만 왕이시여, 제게 편하게 대해주지 마십시오. 제게 어떤 감정도 품지 마십시오. 저는 사랑받는 건 포기했습니다. 상처만 안 받으면 됩니다. 상처받지 않으려면 아무 것도 바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전 누구에게도 바라는 게 없습니다. 왕께도 바라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 왕께서도 제게 어떤 것도 바라지 마십시오.

“거짓말. 포기하기는. 넌 아직도 탈루아님께 사랑받고 싶어서 늘 고분고분하잖아. 착한 아이가 되려고 하잖아. 사랑받고 싶어서. 나처럼.

“아닙니다. 증오하기 싫을 뿐입니다. 조금이라도 ‘이게 아니야’, ‘싫어’가 제 밖으로 나오면 제가 저 자신을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다음 날, 왕께서는 별다른 이유 없이 탈루아의 직급을 낮춰 버리셨다. 탈루아는 왕을 양육한 사제에게 이럴 수 있냐며 항의했고 제사장도 인사권 침해라며 탈루아에게 동조했지만 왕은 보기보다는 영리하셨다. 제사장만 따로 조용히 부르시어 탈루아에게 그럴 만한 죄가 있어서 그렇게 처리했고 그나마 추방시키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시고서는 말씀을 아끼셨다. 탈루아가 왕께 달려왔지만 왕은 죄를 인정하라는 말씀만 하셨다. 제사장은 탈루아를 추방시키셨다.

 

결혼의 신이신 라밀하나신을 모시는 사제들은 기어이 신탁을 받아왔다. 아우라는 아니었다. 아우라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왕은 남쪽 지방에 신전을 세울 것을 명하셨다.

‘신이시여, 신께서는 제게 부모를 앗아가셨습니다. 그리고서는 저를 탈루아 손에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에 관해서는 신을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제 아내만큼은 제가 원하는 마니로 주십시오. 그게 그렇게 어려우십니까? 저는 아내마저도 제 마음대로 맞이하면 안 됩니까? 저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잖습니까. 좋은 옷과 음식과 궁궐은 제가 이 왕좌에 앉아 있는 대가일 뿐이고 이 왕좌도 제 것이 아닙니다. 다 사제들 것입니다. 왕이 그들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면 왕도 제거할 자들 겁니다. 이런데도 제가 단 하나, 아우라와 혼인하는 것도 안 된다는 겁니까?

너무도 쉽게 아우라가 아닌 다른 여자를 왕비로 선택하셨던 신께서는 왕의 기도에는 응답하지 않으셨다.

“그 여자, 아니, 라밀하나신께서 정해주신 여자와 결혼하십시오.

무표정한 얼굴로 아우라가 그렇게 말했을 때 왕께서는 아우라에게 다시 청혼하셨다.

“우리는 아직 어리고 약하고 탈루아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덕스러워서 무서웠을 때 너는 묵묵히 속으로만 네 감정을 삭히고만 있어서 난 널 안쓰러워 하면서도 네게 의지했어. 이제는 네가 내게 의지할 수 있게 해 줄게. 나는 이제 다 자랐고 왕이니까 네가 네 감정 삭히고 조용히 참고 있지 않을 수 있게 해 줄게.

“신의 뜻에 따라 저는 사제로서 왕을 위해 기도드리겠습니다. 더 이상은 제게 바라지 마십시오.

“너는 아직도 ‘아우라’가 아니고 신실한 사제이고 싶은 거야?

“전 제 욕망이 없습니다. 바라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우라, 탈루아는 이제 없어. 그리고 우리 둘이 이 궁을, 신전을 떠나 버리면 넌 그냥 너 자신으로 살 수 있어.

“그럴까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저희 둘이 살면 착한 아이 노릇, 왕 노릇, 사제 노릇 안 하고 그냥 나 자신으로만 살아도 서로에게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 수 있을까요. 전 탈루아 사제께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왕께 사랑받고 싶어서 착한 아내 노릇을 하게 될 것 같은데…….

“그냥 내게 반말 좀 해 봐. 아우라, 제발.

왕게서는 아우라를 보듬어 안으셨다. 아우라는 평소와 다르게 말이 많다.

“아나트만, 난 항상 사랑을 갈구했는데 막상 사랑받으면 너무 두려워. 만약 내가 고아가 아니어서 신전에 오기 전에 평범한 아이였다면, 내 후견 사제가 탈루아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왕께서는 아우라를 더 힘주어 안으셨다.

“나 네 방에서 자고 가도 될까? 남들 눈에 안 띄게 새벽에 나갈게.

왕께서는 손수 이부자리를 정돈해 주셨다. 왕과 아우라는 왕의 침대에 나란히 누워 한 이불을 덮었다. 다음 날 새벽, 왕께서는 소름끼치도록 차갑고 딱딱한 감촉에 놀라 일어나셨다. 아우라는 밤 사이 독약을 마시고 왕의 곁에서 자결했다.

 

왕게서는 곧 라밀하나신의 듯에 따라 혼인하셨다. 왕비는 아름다우셨지만 왕의 얼굴은 결혼식 내내 시체처럼 굳어 있었다.

‘나는 아우라가 왜 죽었는지 모르겠어…….

그 생각이 들 때마다 왕께서는 종교에 심취하셨다. 뭐라도 붙잡을 것이 필요하셨던 것이다. 아니면, 신에게, 사제들에게 복수하고 싶으셔서 마니족의 노동과 땅을 총동원해서 신을 섬기셨는지도 모르겠다. 지나치게 까다롭고 정교하고 격식 있고 호화로웠던 제사와 각지에서 지어대는 신전, 엄격하게 적용되는 종교 규율 때문에 마니족은 신께 이 고통을 끝내달라고 기도했다. 사소한 규율만 위반해도 가혹한 형벌이 뒤따랐다. 사제들은 광기에 휩싸인 듯 규율과 격식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제사의 절차가 세분화되고 신상의 옷자락의 주름이 몇 개여야 하는지 따위의 규정이 정해질수록 사제들의 권력은 강해졌고 그들의 관심사는 신전 안에 고립되었다. 마니들의 얼굴에는 사제들의 얼굴에서처럼 표정이 사라졌다. 축제의 밤 만이 마니들이 살아있는 날이었다. 통제되었던 것들이 죄악으로 분출되었다. 살인과 강간과 강도가 지나간 축제가 지나가면 또 다시 숨 막히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신이 내리신 비옥한 땅에서 나는 곡식은 마니가 아닌 신에게로 갔다. 민간에서는 파괴와 악과 추를 담당하시는 아샤루카타이신을 섬기기 시작했다. 사제들은 나신으로 조각되던 아샤루카타이신의 신상에 옷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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