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 장르: 판타지, 로맨스 | 태그: #종교 #사제 #아린 #마니 #제사 #판타지 #로맨스 #음악
  • 평점×898 | 분량: 81회, 2,812매
  • 소개: 마니족의 사제 마누는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사제였고 젊은 남자였으며 파계한 자였으며 살인자였으며 이상주의자였다. 그의 부모가 아기였던 그를 신전에 데려왔을 때 마니족의 공주... 더보기

마니족의 4대 왕 사바-3

17년 4월

결혼 후 왕께서는 여론이 한창 좋을 때를 틈타 신혼의 왕비도 내버려 두신 채 일에 파묻히셨다. 사제들을 방방곡곡으로 내보내셔서 식물 표본을 반드시고 광물과 토질을 조사하게 하셨다. 사제들이 조사하고 연구한 내용은 치밀하게 기록되었다. 사제들이 정치에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도 있으셨겠지만, 사바 왕은 학문을 장려하셨다. 사제들이 학문을 독점한 결과, 오히려 후에는 사제들이 학문을 바탕으로 권력마저 독점하는 폐해가 있었다.

 

황무지였던 땅을 농토로 바꾸는 일은 예상대로 처음부터 험난했다. 그러나 왕께서는 처음부터 과감하게 일을 밀어붙이셨다.

“수로를 만들어 강물을 끌어와서 황무지를 농토로 바꿀 겁니다. 강에서 먼 지역까지 강물이 닿을 겁니다.

왕께서는 설린, 유할란, 진수화 제사장을 부르신 자리에서 지도를 짚으시며 그렇게 말씀하셨다. 약화되었다고는 해도 아직 원리주의자들의 힘이 강했던 시기였다. 신에게 어떤 해도 가면 안 된다는 이유로 농사를 최소한만 짓도록 하는 원리주의자들 때문에 마니족은 최악의 기근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신전의 사제들은 그들만의 교리해석에 빠져 있었다.

“왕이시여, 미르혼 신(강의 여신)께 감히 손을 대시겠다는 겁니까? 어찌 그런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유할란 제사장, 마니족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왕이시여, 밥으로만 살려 하십니까. 배만 채우면 뭐든 해도 된다면 짐승과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배가 고프면 짐승보다 못한 것이 될 수도 있는 게 마니입니다. 유할란 제사장님, 신전에만 계셔서 잘 모르시는 모양이니 당장 내일부터 전국의 마을들을 돌아다니시며 마니들과 똑같이 생활하고 돌아오십시오. 그 때 다시 이야기합시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전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 당장 내일 출발하십시오. 이미 짐을 다 챙겨 두었습니다.

그 때까지도 유할란 제사장은 왕께서 협박을 하신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흰사슴 등에 짐이 얹혀 있고 마을의 지도까지 있는 것을 보고서야 단순한 빈 말이 아니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흰사슴 등에 올려져 있던 짐을 다시 풀면서 유할란 제사장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마니들은 하루 한 끼 먹을까 말까 하고 베를 짤 작물조차 심지 못 하게 하니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삽니다” 라며 왕께서 유할란 제사장에게 하루 한 끼 식사와 낡은 옷 한 벌만 허용하셨기 때문에 유할란 제사장은 마을로 가는 대신 신전에서 며칠간 변변찮은 옷 한 벌만 걸치고 하루에 한 끼만 먹을 수 밖에 없었다. 왕의 단호한 명을 받은 사제들은 차마 왕을 거역할 수 없어 진수화 제사장과 설린 제사장의 눈치만 살폈다. 설린 제사장은 왕 몰래 폴리테이아 왕비를 찾아갔다.

 

“네, 알겠습니다. 왕께 사제들의 뜻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왕이라도 사제를 모독하시는 건 신을 모독하시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렇습니다. 역시 왕비님께서는 현명하십니다.

그러나 왕비께서는 설린 제사장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시며 열흘이 지나서야 왕께 제사장들을 소집하시라고 말씀드렸다. 그 열흘 동안 유할란 제사장은 꼼짝없이 고행을 계속해야 했고 설린 제사장은 속이 탔다.

“카르마왕께서 그러셨습니다. 신께서 존재하신다면 마니족을 굶어죽으라 하시지는 않으셨을 거라고요. 마니족을 굶주리게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종교이고, 종교가 아니라 사제들 입니다. 신의 뜻을 멋대로 해석해대는 것이야말로 신을 모독하는 짓입니다.

왕비의 말에 왕도 동의하셨다. 동의하셨다. 그 뿐, 왕께서는 아무 정서적인 친밀감도 표하지 않으셨다. 마침내 세 제사장이 소집되었다. 유할란 제사장은 핼쑥한 얼굴로 제사장의 복장을 갖추고 나타났다.

“유할란 제사장님은 황무지 개간과 관개 공사에 대해서, 생각이 좀 바뀌셨습니까?

“몸이 괴로우니 정신이 더 또렷해졌습니다. 왕이시여, 신께서 주시는 것에 만족하고 살아야 할 마니가 강의 물길을 바꾼다니요! 감히 미르혼 신께 도전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럼 이대로 풀뿌리나 캐고 나무 열매나 따먹고 살아야 합니까? 사실, 풀뿌리 캐는 것도 드미트에 여신께 상처를 내는 것이니 그것도 하면 안 되겠고, , 걸어다니는 것도 여신을 밟는 것이니까 우리 모두 이제부터 가만히 누워서 죽어야 겠습니다?

설린 제사장이 나섰다.

“숲을 태우면 되지 않습니까? 나무 탄 재를 거름 삼아서 농사를 지으면 드미트에 신의 영 토를 파괴하는 것도 아니고 미르혼 신을 변형시키지 않고도 농지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왕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유소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숲에 불을 지르면 안 됩니다.

갑작스러운 개입에 왕과 왕비, 제사장들이 일제히 유소를 주목했다.

“숲의 끝이 어디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요즘 비도 내리지 않는데 숲에 불을 질렀다가는 그 거대한 숲이 다 타 버리고 말 겁니다. 그러면 숲에 사는 아린족과 짐승과 새들이 모두 죽습니다. 아샤루카타이신의 피조물이 모두 사라진다며 신께서 진노하실 겁니다.

늘 유소와 한 편이던 사제들이 비아냥거렸다.

“그렇게 된다면 신께 드리는 거대한 번제가 되겠군.

왕께서 오랜만에 유소의 편을 드셨다.

“화전은 지력이 금방 쇠합니다. 그러니 숲을 태울 생각은 마시고 제사장들께서는 드미트에 여신과 미르혼 여신께 올리는 제를 준비하십시오.

진수화 제사장이 나섰다.

“왕이시여, 먼저 사제들의 반발을 다스리십시오. 원리주의 사제들을 설득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을 어떻게 그렇게 급하게만 처리하려 드십니까!

“사제들을 설득하는 건 제사장들꼐서 알아서 하십시오. 제 명을 받들어 유할란 제사장의 식사와 의복을 담당한 우현제 사제가 경질된 걸 보니 사제들에 대한 제사장님들의 통제력이 막강한 것 같던데 말입니다. 왕명을 따른 사제를 처벌하셨으니 이제는 왕명을 거스르는 사제도 좀 다스리실 차례 아닙니까?

우현제는 즉시 복권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제사, 농지 개간, 수로 건설에서 각 역할을 맡을 사제들의 명단이 올라왔다. 요직은 거의 유할란 제사장 계파의 극단주의자 사제들과 설린 제사장 계파의 온건 원리주의자들이 차지했다. 명단이 왕의 손아귀에서 구겨졌다.

“이걸 명단이라고 작성해서 올린 건가! 그 극단적인 꽉 막힌 사제들을 요직에 앉히면 일을 하겠다는 건가 말겠다는 건가! 지금 이게 왕에게 끝까지 맞서겠다는 게 아니고 뭔가! 진수화 제사장님, 대체 뭘 하시는 겁니까! 계파가 없어서 권력도 없다는 핑계는 이제 약발이 떨어질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계파가 없으면 만드시는 것도 능력입니다.

왕께서 격분을 주제하지 못 하시는데도 왕비께서는 눈썹 한 올 하나 움직이지 않으셨다.

“왕이시여, 진정하세요.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 이 정도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신다면 앞으로도 사제들과 맞서실 때마다 화를 내실 겁니까? 사제들은 감정이 없는 자들이라서 이런 감정적인 대응은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제들도 감정이 있는 자들입니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그걸 ‘신’이라는 존재에게 돌릴 뿐입니다. 그들도 감정을 이해합니다. 이해 못 하는 척을 하고 ‘사바 왕은 신의 뜻 을 거스르고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자 제 분을 못 이겨 미쳤다’고 날 광포한 자로 몰아 갈 겁니다. 아니면 내 부모에게 그러했듯이 사제들이 직접 나를 죽이겠지요. 그게 그들의 방식 아닙니까?

“왕이시여, 사제들을 대할 땐 평정을 유지하십시오. 그들에게 과대망상이나 피해의식 갖지 마시고요.

 

왕께서는 화를 가라앉히시려는 듯 후하고 길게 숨을 내쉬시고 “왕비와 대화 좀 해야겠습니다. 나가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진수화 제사장은 물러났으나 유소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날 가르치려 들지 마십시오. 내가 왕비보다는 사제들에 대해 잘 압니다.

“왕께서는 충고를 달갑게 여기지 않으시는군요. 왕비가 아니라 왕의 말씀에 고분고분하고 얌전히 안기는 애완동물을 원하시는 겁니까?

“나는 왕비가 아니라 아내를 원합니다. 실무자 내지 책사는 진수화 제사장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왕비께서 아무리 나를 위한다며 충고를 한다 해도 사제들이 고른 왕비이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아마.

“왕께서 밤마다 찾아가시는 그 여자는 아내 노릇을 합니까? 궁 가장 깊은 곳에 갇혀 있다는 여자 말입니다.

왕께서는 유소를 돌아보셨다. 유소는 왕의 시선을 피했다.

“왕비, 그건 나에게 말고 유소에게 물으십시오.

 

‘대화’는 그쯤에서 그쳤다. 명단은 다시 작성되었다. 원리주의자들은 대거 제사를 담당하게 되었고 온건파와 실용주의 성향의 사제들이 실무적인 일을 맡게 되었다. 진수화 제사장이 유소를 전면에 내세워 사제들을 설득한 덕이었다. 언제나 왕의 뒤에 있지만 찬가를 잘 부르고 학식이 높고 성품이 조용한 유소는 사제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다. 왕비께서는 사제와 왕 사이를 오가시며 세세한 부분을 조율하셨다. 새로운 명단이 올라갔던 날 진수화 제사장은 비밀리에 유소를 불렀다.

“신께 답을 구하고 싶네.

유소는 역사상 가장 신성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가를 부른 사제였다. 그리고 마지막 ‘공식적인’ 샤먼이었다. 유소 이후로 점성술과 접신은 비공식화 되었고 극소수의 사제들에 의해 비밀리에 전승되었다. 키리타 꽃가루와 붉은점 나비의 날개가루, 흰사슴의 뼛가루와 유향나무 추출물, 석영 가루를 섞어 태운 연기를 마시며 눈을 감은 채 묘안석 구슬을 꿰어 만들 팔찌의 구슬을 짚던 유소가 한참 만에 눈을 뜨고 말했다. 청아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강의 신 미르혼이다. 내게 경배하라.

진수화는 네 번 허리 굽혀 절했다. 미르혼 여신께서 유소의 입을 빌려 말씀하셨다.

“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마니가 감히 나 미르혼의 길을 바꾸겠다는 것이냐?

“신이시여, 어머니이신 드미트에 여신의 갈증을 푸시고 마니족에게 번영을 주소서.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 내가 형태를 바꾼다면 너는 내게 어떤 제물을 바치겠느냐?

예전에 범우형 제사장은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그 목숨값으로 진수화의 제사장 자리값이 지불되었다.

“어떤 제물을 원하십니까?

“인신공희를 하라. 아름다우면서도 추하고 순결하면서도 부정한 자를, 신의 목소리와 마니의 눈을 가진 자, 아린이면서 인어이고 짐승이며 마니이며 신에 근접한 자를 바치라.

“그게 누구입니까?

유소가 눈을 감았다. 한 줄기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게 누구입니까?

진수화가 다시 물었다. 유소가 자신의 목소리로 잔잔하게 말했다.

“신께서 제물을 정하셨습니다. 제물은 이미 제단에 올랐습니다.

 

얼마 후, 드미트에 신께 바치는 제사를 위해 사냥을 하던 날, 진수화는 몰래 유소의 뒤를 좇았다. 유소는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나 사슴을 몰고 숲속 깊이 들어갔다. 능숙하게 길을 찾는 것으로 보아 자주 와 본 듯 했다. 깊은 숲 속에는 햇빛도 바람도 들지 않았다. 숲은 ‘돌아가라’고 경고하는 듯 했다. 유소는 흰사슴을 타고 쓰러진 나무를 훌쩍 뛰어넘었다. 진수화 제사장이 탄 흰사슴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거기까지였다. 진수화 제사장은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냥이 끝나갈 때쯤 유소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냥터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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