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보여줄 게 있어서 왔지.”
한밤중에 왕이 뭔가 기다란 상자 같은 것을 끌고 왔다. 무덤에나 들어가야 할 관이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왕께서 죽이셨나요? 제가 유소의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뭐든지 하겠다고 했는데도…….”
왕께서 관 뚜껑을 열어젖히셨다. 피투성이가 된 시신이 얼핏 보였다. 이데아는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눈을 가렸다. 왕께서 거칠게 이데아의 손목을 잡아 관 앞으로 끌고 가셨다.
“내가 죽인 건 아린이야. 유소는 내가 죽이지 않았어. 사냥이 끝나고 보니 유소가 저 아린 옆에서 자살을 했더라고.”
관 속의 두 시신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죽은 아린 여자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이데아와 꼭 닮아 있었다. 그 아린은 임신 중이었다. 달 수가 비슷한 것만은 분명했다. 유소는 입가에 보일듯 말듯한 미소를 띄운 채 죽어 있었다.
“유소에게는 누가 누구 대신이었을까? 이데아 당신이 저 아린의 대신이었을까 저 아린이 당신 대신이었을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꼭 살아서 돌아와 주세요”라고 이데아가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애원했을 때 유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소에 대한 배신감과 그의 죽음에서 오는 슬픔과 왕을 행한 분노가 터져 올랐다. 아무것도 붙잡을 게 없었다. 이데아는 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난 유소와 이 아린 여자를 합장을 해 줄 생각인데. 아린의 방식으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유소가 택한 것은 아린 여자다.
“지금까지 유소의 얼굴에 표정이 있는 것을 딱 세 번 봤지. 한 번은 당신을 처음 보고 미 소지었을 때였고 한 번은 어젯밤에 나를 찾아와서 흰사슴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눈물 흘렸을 때였지. 마지막 한 번은 지금 저 시체의 미소고. 난 유소에게 당신을 데려오게 해서 당신과 유소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고 오늘은 저 아린을 사냥했지. 유소가 말했던 흰사슴이 저 아린이었는지는 몰랐지만.”
“잔인해.”
“글쎄? 유소와 당신과 나와 진수화 제사장 중에 누가 잔인한 걸까? 당신 뱃속의 아이의 아비는 누구지? 나? 유소?”
“내, 아, 이, 야.”
왕께서는 미친 듯이 웃으시더니 관을 끌고 나가셨다.
안개가 짙게 깔렸던 새벽이었다. 안개가 온 세상을 덮어 버려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흰사슴의 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청녹색 천으로 눈만 빼고 온몸을 가린 사제가 흰사슴을 타고 왔다. 그는 타고 온 흰사슴에 보랏빛 천으로 온몸을 가린 여자를 태웠다. 흰사슴은 짙은 안개 속에서도 바람처럼 빠르게 부드럽게 달렸다. 사제는 내내 흰사슴의 고삐를 꽉 잡고 있었다. 흰사슴은 한참을 달리다가 멈춰 섰다. 궁궐의 뒷문이 열렸다. 사제가 잠시 망설이다가 여자를 보고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지은 죄입니다. 왕을 탓하지 마시고 저를 탓하십시오. 죽을 때까지 저를 증오하십시오. 죄송합니다.”
흰사슴은 문을 통과했다. 자줏빛 옷을 입은 사제가 나와 있었다. 청록빛 옷을 입은 사제는 자줏빛 옷을 입은 사제에게 여자를 인계하고는 돌아갔다. 여자는 사바왕의 어머니이신 라가 왕비께서 감금되셨던 곳에 갇혔다. 자줏빛 옷을 입은 사제가 말했다.
“나는 제사장 진수화다. 이데아 그대의 존재를 아는 건 나와 왕, 유소 밖에는 없고, 그대는 평생 그 곳에서만 살게 될 것이다.”
유소는 왕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오면서 아무 일 없었나?”
“아무 일 없었습니다.”
왕은 손가락으로 유소의 턱을 올리셨다.
“날 보고 똑바로 말해라. 오면서 아무 일 없었느냐고 물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누구나 맛있는 건 먹어 보고 싶고 좋은 소리는 들어 보고 싶고 아름다운 건 만져보고 싶어하지. 오는 동안 한 번도 그 여자를 안아보고 싶지 않았나? 안개가 껴서 아무도 볼 수 없었을 텐데. 아니면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고 싶지 않았나?”
“그런 마음은 조금도 품지 않았습니다. 왕이시여, 의심치 마십시오.”
“그런가? 그럼 오늘 자정에 복도 끝, 궁궐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으로 오라. 내 어머니가 유폐되셨던 곳이다.”
그날 밤 왕은 휘장 뒤에서 이데아를 강제로 취하셨다. 이데아의 보랏빛 옷이 찢겨저 나가고 여린 살에 피멍이 맺혔다. 그녀의 길고 검은 머리채는 왕의 손아귀에서 헝클어지고 한줌씩 뽑혔다.
“눈동자가 마치 아린의 눈동자 같군. 기분 나빠. 머리까지 헝클어지니까 더욱 아린같군 그래.”
“아무리 왕이시더라도 천벌을 받을 겁니다. 신께서 보고만 계시지 않으실 거예요!”
왕께서는 낄낄대고 웃으셨다.
“난 그대를 왕비로 달라고 했는데 라밀하나 신(혼인의 여신)께서 거부하셨다더군. 신께서 실수하신 거야. 하기야 라밀하나 신께서는 아샤루카타이 신의 짝을 잘못 고르셔서 그 험한 꼴을 당하셨지. 당신을 유소의 아내로 주셨어야 했는데 신께서는 당신을 이 사바의 노리개로 주셨어.”
“유소라니요?”
“아직 누군지 모르나? 차차 알게 되겠지.”
휘장 밖에서 밤새 그림자 하나가 떨면서 왕의 음산한 웃음소리와 이데아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와 흐느낌을 들었다.
“이데아, 내가 왜 이러는지 아나? 당신을 사랑해서야. 하하하하.”
며칠 후 휘장 밖에 그림자 하나가 앉았다. 그림자는 꼼짝 않고 한참을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밖에, 누구시죠?”
그림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혹시, 제가 이곳에 갇힌 날 밤에 밖에 계셨던 분이신가요?”
그림자가 작정한 듯 마침내 힘겹게 말했다.
“제가, 유소입니다.”
“그래요……?”
끈이 탁 풀리고 기둥이 부러지고 받침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데아는 소매자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잘 지내고 있어요. 왕께서 저를 너무나 사랑해마지 않으셔서 숨이 막힐 정도지요. 저와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으시죠. 지나칠 정도로 사랑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다 제 죄입니다.”
“절 여기로 데려오신 것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괜찮아요. 왕명을 누가 거스를 수 있겠어요.”
“제가 당신을 보고 미소지어서 왕께서 당신을 취하신 겁니다.”
예전에 이데아가 한 사제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 순간 그 사제가 미소 지었다. 사제가 미소 짓는 것은 그 때 처음 보았다. 햇살처럼 밝고 따스한 미소였다. 이 세상 어느 누구의 미소가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었을까.
“그 때, 왜 미소지으셨어요?”
“…그냥…….”
유소의 손이 휘장 아래로 들어와 약병 몇 개를 준다.
“다친 데 바르십시오.”
이데아의 손이 유소의 손을 잡았다. 유소의 손이 잠시 긴장했다가 풀어진다. 유소의 팔이 휘장 너머로 건너오고 이어서 머리와 몸이 휘장 안으로 들어온다. 유소의 눈동자가 크고 검은 눈동자를 응시한다.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떠오른다. 눈동자에 동그랗게 파문이 퍼져 나간다. 유소의 손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이데아가 눈을 감고 유소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둘의 심장이 더 가까워진다. 유소가 상처에 약을 발라준다. 이데아가 유소를 안는다. 심장 뛰는 소리가 자장가같다. 자장자장 우리 아기 자장자장 잘도 잔다. 왕은 첫날 밤 이후로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으셨지만 강제로 휘장 뒤의 여자를 안는 건 여전하셨다. 왕이 서툴게 안으면 여자는 여전히 뻣뻣하기만 했다.
“오늘은 내가 휘장 밖에 있어줄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소에게는 이따위로 굴지 않을 거 아니냐. 유소에게는 뱀처럼 착착 감기겠지.”
“왕이시여, 이러지 아십시오.”
“당신은 그래도 되고 나는 이러지 말라고? 그게 감히 내게 할 소리냐? 말투까지 점점 유소를 닮아가는군 그래.”
왕은 이데아의 옷을 찢어발겼다. 옷이 아니라 이데아를 찢어 죽이려는 것 같았다. 살갗에서 연한 약냄새가 났다.
“유소에게 전해. 사바의 화살통에 화살이 하나 남아있더라고.”
왕은 이데아의 나신에 자신의 살을 부볐다. 짐승의 수컷들이 자신의 냄새로 텃세권을 표시하듯 왕은 자신의 체취로 약냄새를 지웠다.
“왕께서는 누구의 동정을 받을 만한 가치도 없으십니다! 짐승만도 못 해요!”
“입이 상당히 거칠군. 이데아, 당신이 유소를 대하는 반만큼이라도 날 그렇게 대해보고서 나 입을 놀리는 게 어떨까? 내 앞에서 제 목을 따려고 슥슥 칼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가축처럼 굴지 말란 말이야. 그 마지못해 끌려왔다는 표정, 아주 질려. 따지고 보면 끌고 오라고 한 나나 그런다고 순순히 끌고 온 유소나 거기서 거긴데 왜 대하는 게 영 딴판이지?”
왕은 언젠가 유소에게 넌지시 말했다.
“요새 꽤 바빠보이는데. 일은 일대로 하고 밤엔 남몰래 숲에 다녀오고 틈틈이 시간 날 때는 나 몰래 이데아도 만나야 하니까.”
“이데아님을 의심치 마십시오.”
“의심은 안 해. 확신을 하지.”
유소는 궁에서 이데아가 웃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휘장 뒤에서 평생을 갇혀 살아야만 하는 여자가 웃을 수 있을까.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다. 들판의 햇살, 웃음, 춤과 노래, 맨발에 닿는 보드라운 흙의 감촉, 가족, 친구, 미래, 모든 것. 얻은 건 뭘까.
“유소 당신을 알았잖아요.”
유소는 이데아의 검고 숱 많은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절 평생 동안 증오하십시오. 절대 용서 같은 건 하지 마시고.”
“왜 자꾸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가 당신을 여기 가두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왕명을 따르신 것 뿐이에요.”
유소가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왕께서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당신을 여기로 데려오는 길에 저는 흰사슴의 발길을 돌렸어야 했습니다. 이데아 당신과 함께 왕궁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야 했습니다.”
“왜…그렇게 하지 못 하셨어요…….”
유소가 힘없이 말했다. 그가 어린 아이처럼 작아보였다.
“자신이 없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살려면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사제여서 신전 밖의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당신과 단둘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 자신이 없었습니다. …제가 당신을 그만큼 사랑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천장을 쳐다보았는데도 이데아의 검고 큰 눈에서는 눈물이 나왔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으려 했는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그 결과가, 지금 이건가요?”
“제가 나약하고 이기적이어서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유소는 그 날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시는 건 저에 대한 동정심인가요, 죄책감인가요?”
“저 자신을 위한 겁니다. 전 신의 뜻을 저버리고 당신을 안았습니다. 당신을 이렇게 가둬 두고 저는 자유롭고 싶었습니다. 당신에게선 맑은 날 들에서 느껴지는 그 밝은 빛이, 생생한 흙내음이 나서, 물과 햇빛만 받으며 살고 싶어져서…….”
“당신은, 어린애 같아요. 약하고, 자기만 알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려들고, 끊임없이 사랑 받고 싶어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데아는 임신했다. 이데아의 아이였다. 사바왕이 화살 통에 하나 남은 화살을 만지작거렸다. 미르혼신(강의 여신)은 유소를 제물로 요구하셨다. 유소는 한밤중에 혼자 점을 쳤다. 사바왕이 흰사슴을 죽일 것이다.
‘신이시여, 살려 주십시오. 살고 싶고 살리고 싶습니다.’
신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셨다.
‘살려 주십시오.’
간절한 기도에도 신께서 응답하시지 않으실 때도 있다고 했다. 신의 뜻을 마니가 감히 어찌 알 수 있을까. 여자를 사랑한 죄에 대한 처벌이었을까 수로공사의 대가였을까 인연을 끊으라는 뜻이었을까 살아서 함께 할 수 없다면 죽어서 함께 하라는 뜻이었을까. 유소가 죽고 나서 몇 달 후 이데아는 아들을 낳았다. 폴리테이아 왕비가 이데아를 찾아왔다. 빈틈없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왕께서 나더러 당신의 아이를 내 아이인 척 해 달라시더군요.”
왕비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이데아는 갓난아기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내 아이에요. 왜 왕께서 이 아이를 마음대로 하려 하시죠?”
“유소의 아이인가요?”
“어느 누구의 아이도 아니에요. 내 아이에요.”
“왕께서 그 아이를 곁에서 기르시고 싶어 하시는 듯 해요. 왕위를 물려 주고 싶어 하세요. 나는 왕의 피가 섞인 아이를 낳을 생각은 없으니까.”
아이를 이 휘장 뒤에서 기를 수는 없었다. 왕궁이 또 다른 감옥이라 해도 이곳에 갇혀 사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왕비시여, 이 아이를 길러주실 건가요?”
“나는 아이를 기를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아이를 좋아하지도 않아요.”
“그럼, 그럼 제가 기른다면…….”
“왕께서 이 아이를 내가 낳은 것처럼 해 준다면 뭐든지 해 주겠다고 하시기에 당신을 없애 달라고 했어요, 난 불확실한 것은 싫어하니까요. 왕께서 너무 쉽게 그러겠다고 하시던데요. 그래도 조금은 망설이실 줄 알았는데.”
“이제 유소가 없으니까 저도 필요가 없는 거겠죠.”
“유소가 당신을 사랑했다면서요.”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잘 모르겠어요.”
폴리테이아 왕비는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이데아를 보고만 계셨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당신은 마니가 아니라 꼭 아린 같아요. 당신이 아린을 닮은 건지, 아린이 당신을 닮은 건지. 아린족을 보면 당신 얼굴이 떠오를 거야, 아마도. 제사 때마다 제물을 보면 당신이 떠오르겠지.”
“부탁 하나만 드릴게요. 이 아이, 사냥은 하지 못 하게 해 주세요.”
“아이는 너무 어려서 당신 얼굴을 기억하지 못 할 텐데요.”
“절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약속해 주세요. 그렇게 해 주신다고.”
아린의 옆에서 죽은 유소를 위해서다.
“알겟어요. 그건 약속하죠. 아이 이름은 당신이 지어요. 축복은 받아야 하니까.”
“아니디아.”
폴리테이아 왕비는 준비해 온 바구니에 아기를 담아 등을 돌려 복도 끝으로 점점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