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의 자지러질 듯한 울음소리가 계속 들린다. 울음소리는 점차 빗소리에 가려진다. 아기의 등에 먹으로 흰사슴이 그려진다. 사바왕께서는 그 흰사슴을 그림을 따라 바늘로 상처를 내신다. 아기가 발작하듯 울어댄다. 폭우가 거세다.
“이 흰사슴은 너와 한 몸이다. 네가 자라면서 이 흰사슴도 함께 자랄 것이다. 변성기가 되면 흰사슴의 뿔을 그려주겠다.”
마지막 한 땀을 뜨고 나자 울어대던 아기는 기진한 듯 축 늘어진다. 사바왕은 이데아의 몸에서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는다.
‘아니디아.’
왕은 아기를 요람에 눕히고 흰사슴 우리로 나가신다. 여전히 비가 세차게 내린다. 왕은 화살통에 남아 있던 마지막 화살을 갓 태어난 흰사슴 새끼에 겨누신다. 습도가 높아서 활쏘기가 여의치 않다. 결국 왕께서는 흰사슴새끼를 잡아 화살촉으로 목을 찔러 죽이시고 새끼를 잃은 어미 흰사슴의 젖을 아니디아 왕자에게 먹이셨다.
왕자의 문신이 자리를 잡자 왕께서는 진수화 제사장에게 축복의식을 부탁하셨다. 진수화 제사장이 왕자를 향유로 씻기려고 옷을 벗기자 등의 문신이 드러났다.
“왕이시여, 유소를 왜 그리도 미워하셨습니까.”
“사랑하는 데에 이유가 없듯이 증오에도 이유가 없는 겁니다. 첫눈에 반하는 경우가 있듯 첫눈에 싫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하셨습니까.”
“나도, 유소도 악하지는 않았습니다. 부부도 그렇지 않습니까. 둘 다 선한 성품일지라도 성격이 맞지 않으면 마음이 멀어지고 마침내 반목 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다행히도 사바왕께서는 아니디아 왕자를 귀애하셨다. 누가 보아도 사이좋은 부자지간이었다. 더욱 다행히도 관개공사를 준비하는 중에 신께서 왕에게 왕자를 내리셨다는 것은 신의 축복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폴리테이아 왕비와 왕 사이에는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다.
“내가 침실에서까지 사제들과 싸울 전략을 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왕비께서는 동지로서는 훌륭하시지만 아내로서는 부적격입니다.”
“아내를 원하신다면 또 그 휘장 뒤에 여자를 하나 들이시든가요.”
이데아 얘기가 나오자 왕께서 분을 못 이겨 손을 올리셨다. 왕비께서는 왕의 손목을 잡으셨다.
“전 그 여자와 다릅니다.”
왕께서 잡힌 손목을 뿌리치시며 내뱉으셨다.
“나도 왕비와 다릅니다.”
그 해에는 비가 엄청나게 내렸다. 사상 최대 강우량이라고들 했다. 강물이 넘쳐서 농토를 다 집어삼켰다. 바닷물이 역류해서 땅에 소금기를 남기고 물러갔다. 신전의 사제들도 복구 작업에 동원되었다.
아니디아 왕자가 축복을 받은 해에는 유독 비가 많이 내렸다. 농토가 침수되고 집 안으로 흙탕물이 들어왔다. 강과 시내에는 누런 급류가 세차게 흘렀다. 수압을 못 이겨 외양간 기둥이 꺾이면서 가축들이 물에 떠내려갔다. 수재민이 속출했다. 수인성 전염병이 퍼져서 아이와 노인들이 죽어갔지만 묻을 땅이 없었다.
“제방을 쌓고 수로와 둑을 만들었으면 수해가 적었을 거 아닙니까! 그렇게 반대하셔서 얻은 결과가 이런 재해입니까? 신께서 마니족에게 물에 빠져 죽으라 하셨습니까?”
“왕이시여, 신께서 왜 이런 재앙을 내리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건 왕의 의지에 대한 신의 반대의사십니다.”
“그럼 제사장께서 어디 한 번 신께 기도해보십시오. 제방 공사를 하지 않으면 이 비를 그쳐 주실 거냐고.”
사제들이 제사를 지냈는데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사제들이 제사를 지내는 동안 왕께서는 왕궁의 창고와 빈 방들을 수재민들에게 개방하시어 마니족의 마음을 얻으셨다. 사제들이 제사를 지내도 비가 그치지 않자 마니족 사이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사제들 중에 인어를 섬기는 자가 있다. 신께서 마니족에게 이런 엄청난 수해를 내리실 리가 없다. 왕이 잘못을 하셨더라도, 설사 사제들이 주장하는 대로 관개공사를 하시겠다는 결정이 잘못된 것이었다 해도 왕의 잘못을 마니족에게 돌리지는 않으시겠다고 신은 약속하셨다. 마니족이 잘못한 것은 없다. 열심히 신을 섬겼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수해는 신이 아닌 인어의 짓이다. 인어와 사제가 내통하는 거다. 신 대신 인어를 섬기는 사제가 있다.’
“왕이시여, 헛소문을 퍼뜨리는 자들을 색출하시어 사형에 처하십시오!”
“제사장님, 이미 마니족은 소문을 믿고 있습니다. 누가 소문을 퍼뜨리는지도 잡아낼 수 없 습니다. 그랬다가는 소문만 더 커지고 소요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이 비가 그칠 때까지 사제들 몇을 희생시키십시오.”
왕의 말대로 소문은 점점 커져 갔고 비는 그치지 않았다. 마니족이 신전 문을 두드렸다. 마니족의 손에는 낫이며 삽이며 흉기로 쓰일 수 있는 농기구들이 들려 있었다. 태고어를 연구하는 찬가부 사제들부터 희생양이 되었다. 사제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이제 더 이상 사제가 아니라는 표식으로 신께서 내리신 그 아름다운 육체에 먹바늘로 문신을 새기고 죄수의 회색 옷을 입고 맨발로 끌려나갔다. 몸부림치는 것을 막기 위해 밧줄에 살이 눌려 벌겋게 될 정도로 꽁꽁 묶었다.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그런 사제를 다른 사제가 끌고 나왔다. 자신이 제물이 아님에 안도하면서.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고 눈동자가 흔들리는 젖은 눈을 회색 천으로 가리고 기둥에 묶었다. 군중들은 욕을 하고 침을 뱉었다. 제사장이 활시위를 당겼다. 끌려나온 사제들은 인어를 섬겼다는 누명을 쓰고 변명할 기회도 얻지 못 하고 눈을 가린 채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삼일마다 한 명씩 분노한 마니들 앞에서. 심장을 관통하는 한 발의 화살에 사제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사제들에게 누명을 씌워 하나씩 죽였던 광란의 시기에 사바왕께서 유할란제사장에게 말을 건네셨다.
“제사장이 인어숭배의 배후가 아니십니까? 일체의 치수공사를 가장 열렬히 반대하셨지요. 그래도 인어숭배까지는 좀 심하신 것 아닙니까? 사제가 인어숭배라니요. 더군다나 제사장이신데.”
뜻밖의 말씀에 당황한 유할란이 왕의 말을 반박했다.
“왕이시여, 오직 신만을 섬겨왔고 신을 위해 반대한 제가 어찌 인어를 숭배했겠습니까! 왕께서 미치셔서 공연히 남을 의심하시는 건 아니십니까?”
인어 숭배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러나 없어도 있는 것이 인어숭배였다. 인어숭배가 있기는 한데 자신은 아니라고 해야 했다. 모두들 인어숭배자가 있다고 믿고 있으니까. 그 분위기에서 왕의 의혹의 말 한 마디는 유할란 제사장의 목숨을 거두기에 충분했다. 왕께서 하신 일은 그저 유할란 제사장에게 말을 건네신 것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