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 장르: 판타지, 로맨스 | 태그: #종교 #사제 #아린 #마니 #제사 #판타지 #로맨스 #음악
  • 평점×898 | 분량: 81회, 2,812매
  • 소개: 마니족의 사제 마누는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사제였고 젊은 남자였으며 파계한 자였으며 살인자였으며 이상주의자였다. 그의 부모가 아기였던 그를 신전에 데려왔을 때 마니족의 공주... 더보기

마니족의 8대 왕 마라-2

17년 8월

마라왕께서는 카마 왕비의 장례를 치르신 후 모든 의욕을 잃으신 듯 했다. 마니들이 중단했던 사냥을 재개하여 숲을 개간하자 해도, 사제들이 새 왕비를 들일 것을 건의해도 왕께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왕자께서 태어나시고 카마 왕비께서 서거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바니타스 선왕비께서도 서거하셨다. 왕께서는 눈물 한 방울 없이 ‘어머니’를 떠나 보내셨다. 이따금 왕자를 돌보실 뿐 왕께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다.

“사냥을 재개하십시오. 왕 때문에 사냥이 어그러졌으니 왕께서 사냥을 다시 시작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래 사냥을 하다 보면 돌발 상황도 생기는 법이오. 그것에 관해서는 제사장이 대처를 잘 했어야 하지 않은가.

“왕께서 떠나셨는데 사제들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계속 사냥을 진행할 순 없잖습니까.

“왕을 그렇게 걱정했습니까. 자알 하셨습니다.

“왕이시여, 사냥을 재개하셔야 합니다.

“그만 좀 합시다.

자금우 제사장은 담판을 지을 기세였다.

“왕이시여, 왕비님께서 서거하시건 말건 왕의 책무를 다하십시오. 극복하십시오. 언제까지 왕비님의 서거를 안고 사실 겁니까?

왕비께서 서거하신 후 처음으로 왕의 눈이 번들번들 빛났다. 왕의 눈에 불꽃이 튀어 올랐다.

“극복이라고? 이 정도면 잘 극복하고 있는 것 아닌가. 왕비가 죽었는데 어떻게 쉽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사냥하고 새 왕비를 맞아들일 수 있는가? 언제까지 안고 살 거냐고? 아마도 평생이겠지.

“배우자가 죽은 마니들이 다 왕처럼 사는 줄 아십니까? 시간 지나면 잊고 재혼하고 재혼한 배우자에게서 아이를 낳아서 삽니다. 다들 그렇게 삽니다.

“그 마니들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냥을 할 때도 카마 왕비가 아닌 여자를 안을 때에도 카마 왕비가 생각날 것이다.

“그래서 평생 이렇게 사실 겁니까?

“이렇게 폐인처럼 살지 말고 즐거이 사제들의 꼭두각시 인형 노릇을 하라는 말인가? 사제들이 바라는 대로 사냥을 하고 사제들이 정해주는 여자와 재혼해서?

“사제들 뿐 아니라 마니족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왕께서는 마니족의 왕이십니다.

왕께서는 이따금 자신이 태어났다던 곳에 가시곤 했다. 휘장을 걷으신다. 아무것도 없다. 이 휘장 너머에서 왕의 아버지는 왕의 어머니를, 죽은 여자를 사랑하시어 왕을 낳으셨다고 하신다.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 말을 믿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카마 왕비를 화장하여 장례지내어 떠나보내지 않고 그 시신을 휘장 뒤에 두어, 죽은 왕비를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 왕께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인 어린 왕자 밖에 없다. 사제들도 마니들도 왕의 편이 아니다. 왕을 이해해줄 수 있는 마니는 아무도 없다. 왕자를 안고 어르시던 왕께서는 문득 생각나신 듯 왕자께 ‘모크샤’라는 이름을 지어 주시었다.

 

왕께서는 사냥 준비를 시작하셨다. 왕의 곁에는 이제 사제들과 맞서 싸워 주실 바니타스 선왕비도, 왕궁과 신전의 곡식을 불태워 마니들과 대립할 카마 왕비도 계시지 않다. 사제들은 숲을 개간하여 농토를 넓혀야만 한다고 마니들을 선동했다. 농토가 넓으면 넓을수록 좋겠지. 하지만 왜 필요 이상 넓어야 하는가? 왜 다 먹지도 못 할 곡식을 창고에 쌓아두고 해를 넘겨 묵혀야 하는가? 신께서는 마니를 굶기지 않으신다고 믿는 자들이. 천재지변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면 지금 수준으로만 비축해도 충분하다. 왜 창고에 쌓아둔 곡식에서 만족을 구하려 하는가? 왕이시여, 머리로 이해하기에는 왕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마니의 가슴은 탐욕스러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그게 마니의 본성이고 그 본성 덕에 관개시설을 정비하고 농기구를 발전시켜 지금의 풍요와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마니족의 왕이고 마니족을 창조하신 신을 모시는 왕이니 마니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어야만 하겠지. 그래야만 하겠지.

왕께서는 숲으로 떠나시기 직전 모크샤 왕자를 안아 보시며 바니타스 선왕비께서는 홀로 어떻게 자신을 기르셨을까를 생각하셨다. 왕과 사제들은 숲을 향해 떠났다.

그 사냥에서 왕께서는 돌아오지 못 하셨다. 무엇엔가 홀리신 듯 아린을 따라 숲 속 깊이 들어가셨던 왕은 심장에 자신의 화살이 박힌 채 발견되셨다. 소름끼치는 인어의 노래가 그 날 하루 종일 숲 속을 떠돌았다. 제사장은 사냥을 계속할 것을 명했지만 왕의 시신 앞에서 사제들은 동요했다. 사냥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그 후 몇 년간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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