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족의 5대 왕 아니디아-6

17년 6월

왕께서는 막연한 희망을 품으셨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만약 폴리테이아 선왕비의 말씀이 맞다면. 아버지 사바왕을 부정할 수 있을까. 잔인한 미치광이, 아니디아왕께 베푸셨던 그것이 부정(父情)을 가장한 광기였을 지도 모른다고 받아들일 수 있으셨을까. ‘빛’이셨던 아니디아왕. 그는 촛불이셨고 야광석의 빛이셨다. 불을 밝힐수록 그 자신은 소진되어 버리는 촛불이셨고 낮에 빛을 받아야만 밤에 그 빛을 도로 내놓을 수 있는 야광석이셨다. 누구에게 사랑받지도, 누구를 사랑하지도 못 하여 가여웠던 사바왕을 위해 아니디아왕은 촛불이 되셨고, 사바왕의 빛을 받아 빛나는 야광석으로 살아오셨다. 사바왕께서 원하시는 대로 빛이 되고 목소리가 되고 모두에게 사랑받고 모두를 사랑하셨어야 하셨다. 아니, ‘모두’는 아니었다. 진수화 제사장과 폴리테이아 왕비는 예외였다. 아버지 사바왕께서는 정말 아니디아 왕을 사랑하셨을까. 왜 유소의 목소리를 내게 하시고 아린 사냥을 하지 못 하도록 문신을 새기셨을까. 아니디아왕은 빛을 향해 무모하게 뛰어드는 부나방이 되셨다. 곧 부모가 될 터였다.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사바왕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디아왕께서는 아포리아왕비와 함께 알부타로 향하셨다. 왕궁과 신전과 마니족의 일은 폴리테이아 선왕비께서 대리통치하고 계시다. 떠나시기 전 선왕비와의 대화가 떠올라 왕의 머릿속이 복잡하다.

“왕께서는 저를 권력에 미친 냉혹한 마니로 보시는군요. 아직도 제가 오직 마니족과 권력을 위해 베를 자르지 말아달라는 청을 거절했다고 원망하시는 게지요.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왕께서는 죽은 생모는 흔적이라도 찾으려 하시면서 선왕의 또 다른 피해자인 나는 이해조차 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아무도 모르는, 아무도 내 편이 아닌 이 궁에서 할 수 있 는 일이 치수하고 통치하는 일 외에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왕비께서 왕을 통해 여쭈셨다.

“선왕께서 서거하신 후에는 왜 궁 밖으로 나가 재혼하지 않으셨어요?

“이미 마음이 돌처럼 굳어버렸으니까요.

“아니디아와 선왕비님 둘 다 잘못이 없는데, 둘 다 서로에게 이렇게 할 수 밖에는 없었겠지요.

유소와 이데아가 처음 만난 곳, 이데아의 고향인 알부타로 향하시면서 왕께서는 왕비의 손만 만지작거리실 뿐 말씀이 없으셨다. 왕비께서도 손을 왕께 내맡기신 채 말씀이 없으셨다. 왕께서 궁을 떠나신 이후로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마니족의 왕자를 잉태하신 왕비까지 동반하시고 궁을 떠나계시는 왕을 마니족은 이해하지 못 했다.

“아포리아, 너는 네 부모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

‘부모에 관한 건 모두 잊고 싶어. 내 어머니는 날 한 번도 안지 않았어. 난 내 부모를 절대 닮지 않을 거야. 우리 아이에게는 정식 부부인 부모가 있을 거고, 난 아이를 안고 젖을 물 릴 거야.

“아포리아, 난 내가 아버지의 광기를 물려받았을까봐 두려워. 내가 선왕비님께 매정하게 하는 걸 너도 보잖아. 우리 아이도 물려받을까봐 두려워.

‘네 아버지가 누구시건 네 어머니가 어떤 분이시건 넌 본성이 따뜻해. 나한테는 참 잘 해주잖아. 넌 아기가 태어나면 자장가를 불러주고 아기가 자라면 이름을 불러 줄 거야.

“아포리아, 나는 궁금해. 내 아버지가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내가 아버지께 어떤 존재였는지.

 

알부타는 숲과 인접한 변방의 제법 큰 마을이었다. 늘 흐린 곳. 해가 나지 않는 날이 해가 나는 날보다 더 많은 곳. 기후 조건이 좋지 않다 보니 다른 마을에서 남는 곡식을 지원받아 먹고 산다. 원래 숲이었던 땅을 카르마왕 때 아린족을 몰아내고 마니족의 마을로 만든 곳이었다.

“아포리아, 유소가 내 어머니를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널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을까.

왕과 왕비는 알부타를 구석구석 순시하셨다. 숲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라 아린에 대한 공포가 다른 곳보다 더 했다. 척박한 곳이라서 그런지 마니들의 성품도 거친 편이었다.

“뭔가 이상해. 마을에 나이 든 마니가 거의 없어. 우리 또래의 젊은이들뿐이야. 게다가 이데아에 대해 물어봐도 아무도 몰라. 이데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아린을 닮은 외모에, 사제가 첫눈에 반할 정도였다면 꽤 눈에 띄는 마니였을 텐데,

이 마을에서 이데아라는 이름은 금기어였다. 왕은 묻고 또 물으시다가 겨우 대답을 얻어내셨다.

“이 마을에서 ‘이데아’라는 마니에 대해 아는 이는 없으니, 저 언덕 너머의 오두막집에서 혼자 사는 정신 나간 노파에게 혹시라도 물어보시려면 물어보십시오.

언덕을 넘어 다 쓰러져가는 외딴집 문을 열자 쾌쾌한 냄새가 확 터져 나왔다. 왕께서는 본능적으로 왕비를 품에 감싸 안으셨다. 머리가 허옇게 세고 이빨이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 피골이 상접한 귀신같은 여자가 침대 위에 앉아 있다가 충혈된 눈으로 낯선 방문객을 보았다. 노파라고는 했지만 겉모습이 늙어 보이는 것 뿐 실제로는 중년의 나이일 듯 했다. 여자는 왕을 알아보지 못 했다.

“산투아야, 산투아야, 내 아이 산투아야, 이 에미가 죽을 죄를 지었구나. 아아, 내 아이야, 나는 죽어 염낭거미로 다시 태어나고 너는 또 다시 내 아이로 태어나거라. 내가 무삼키바라 여신과 아샤루카타이 신께 날마다 말마다 기원하노니 꼭 그렇게 되리라. 그 때는 네가 내 살을 뜯어 먹거라. 그 때는 네가 나를 먹고 살아서 나오고 나는 집 안에서 죽으마.

바짝 마른 두 팔로 침대를 짚으며 쉼 없이 중얼대는 여자는 흡사 거미같았다.

“‘이데아’라는 여자에 대해 아는 게 있는가.

눈을 희번득거리며 왕과 왕비를 보던 노파가 중얼거리던 것을 멈추더니 허우적허우적 앙상한 팔을 허공에 내저었다. 왕은 주춤 물러서시며 왕비를 더 세게 품에 안아 보호하셨다. 노파는 팔만 휘저을 뿐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 했다. 노파에게는 발이 없었다.

“‘이데아’라는 여자에 대해 아는 게 있는가.

왕께서는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으셨다.

“나 죽이러 왔구나. 아샤루카타이신의 사자가 드디어 나를 데리러 왔어. 신전으로 가자. 불이 활활 타오르는 신전으로 가자. 사제님은 쓰러져 계시고 문은 열리지 않고 불은 활활 타 오르는 신전으로 가자. 산투아야, 이 에미가 무슨 짓을 한 거냐. 아이고, 내 아가야, 내가 혼자 살겠다고 무슨 짓을 한 게냐. 내 이 죄 많은 목숨이, 이 더러운 발이, 내 아이 산투아야.

“무슨 말인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신이시여, 제가 몹쓸 에밉니다. 제가, 우리 조그마한 산투아를, 꽃잎에 싸서 보내지는 못 할 망정 그 아이를, 저 살겠다고, 작고 예쁘던 우리 산투아를, 죽은 아이를 밟고 올라서서 살아 나왔어요. 저 혼자서, 제 발이 뜨겁다고 죽은 아이의 시체를 밟고 있었어요.

“그게 ‘이데아’와 관련이 있느냐고 물었다.

노파는 황급히 침대를 짚으며 겁에 질린 듯 우왕좌왕했다.

“모, 모릅니다. 저는 이데아가 누군지 몰라요. 제사장님, , 제발, 아무 것도 몰라요. 정말 몰라요. 산투아야, 대답하지 마. 안 돼. 이 어린애가 뭘 알겠습니까. 그냥 해 본 소리입니다. 안 돼요! 안 돼! 아악!

노파가 비명을 질러댔다. 왕은 완비의 손목을 잡고 허겁지겁 그 집을 빠져 나오셨다. 그러다가 왕께서는 다시 혼자 그 집으로 돌아가셨다. 여자가 손에 낫을 들고 있었다. 낫에는 피가 말라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저 낫으로 자신의 발을 스스로 잘랐을 것이다. 왕과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왕께서 무엇을 하실 새도 없이 그 낫으로 자신의 목을 베어 죽었다.

“신전에 가 보자.

왕비는 돌아 온 왕을 감싸 안으셨다. 왕의 얼굴이 왕비의 가슴에서 배로 미끄러져 내려 오셨다.

“아기야, 나는, 나는…….

왕께서는 차마 말씀을 잊지 못 하셨다. 왕비께서 한 손으로는 자신의 배를, 한 손으로는 왕을 쓰다듬으셨다.

‘아가야, 네 아버지란다.

“아기야, 나는, , 아버지란다. 아들아, 내가 네 아버지란다.

신전에 도착할 때쯤 왕의 얼굴의 눈물자국도 말랐다. 왕이 도착했음을 고하는 간단한 의식을 마치신 후 왕께서는 곧장 신전 서고로 향하셨다. 서고에는 빈 책장이 많았다.

“책과 문서의 양이 적습니다.

사제가 공손히 답했다.

“예전에 화재로 전소되었던 신전을 복구하면서 문서들은 복구하지 못 했습니다.

“화재 전에 이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에 관한 정보가 모두 소각된 셈이군.

왕께서는 서고 뒤 쪽의 창문을 보셨다. 책장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이 곳의 창문과 모든 문이 봉쇄될 때 저 창문은 미처 발견되지 못 했을 것이다. 미친 여자는 달궈진 바닥이 뜨거워서 죽은 아이를 밟고 저 창문으로 탈출했을 것이다. 노파 외에 저 창문으로 탈출한 다른 마니들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데아를 알고 있거나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마니들은 모두 이 곳에서 이데아에 관한 기록과 함께 타 죽었다. 이데아가 워낙 눈에 띄는 외모였고 조그만 마을에서 이웃의 사정이란 뻔 한 것이다 보니 당시 마을 주민의 거의 대다수가 이 신전에서 죽었다. 살아남은 마니는 말 못 하는 어린 아기들뿐이었다. 이 마을에서 ‘이데아’라는 이름은 확실히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죽음의 상징이었고 언급조차 금기시되었다.

‘아버지, 왜 그러셨어요. 굳이 그렇게 하셨어야 했어요? 문서 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있는 기억들까지 다 그렇게 태워 없애신 이유가 뭔가요. 마니들을 죽이시고, 어머니를 증오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드시면서까지 그렇게 하셨어야만 했나요?

“전임 사제께서도 화재 때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제 후견 사제셨습니다. 화재 당시에 서책과 문서를 구하시려다 돌아가셨습니다.

“사제가 주민은 안 구하고 서책과 문서를 구하려다가…….

“사후(死後)가 없는 사제에게 기록은 목숨보다 중요합니다. 사제는 오직 기록으로만 기억되고 추모되고 그로써만 죽음 이후의 삶을 사니까요. 사제가 아닌 마니에게도 기록은 중요합니다. 대는 끊길 수 있지만 자신에 관한 기록은 화재와 같은 사고만 없다면 영원불멸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신전 서고는 역사의 신이신 페아시테 신의 성소이지 않습니까.

“네. 참 영웅적이신 행동을 하셨습니다.

말과는 달리 그다지 칭찬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 왕의 태도에 사제는 무엇인가 자랑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당시에 진수화 제사장님께서 친히 방문하시어 수습하시고 장례를 주관하시고 신전 복구를 지시하셨습니다.

사제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 했지만 왕의 얼굴은 더 어두워지셨다. 왕께서 왕비의 손에 글씨를 쓰셨다.

‘진수화 제사장께서 개입하셨구나. 진수화 제사장, 늘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하면서도 공허감을 지니고 있던 사제였지. 아버지와 함께 일하고, 아버지를 돕는데도 아버지는 제사장을 싫어하셔서 나와 제사장을 떼어놓으셨지. 제사장이 항상 먼 발치에서 안타까움과 연민, 죄책감이 섞인 눈빛으로 날 바라모아서 나는 마음속으로 제사장이 어머니였으면 좋 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기는 했어. 안쓰러워서. 제사장은 죽을 때 내게 미안하다고 했어. 그게 이 일을 두고 한 말이었을까.

진수화 제사장은 그 사건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신전 서고에 불이 붙었고, 불을 끄려던 마을 주민들과 사제가 그만 타 죽고 말았다’로 처리했다. 왜 어린 아이들까지 위험하게 신전 서고로 왔는지, 왜 서고 밖으로 빠져 나온 마니가 없었는지 의문점이 한 두 개가 아니었지만 진수화 제사장은 모든 언급을 막았다.

“외딴 집의 여자, 어떻게 된 겁니까.

“미친 지 꽤 오래 되었습니다. 남편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죽고 유복자로 낳은 자식도 화재 때 죽었답니다. 그 노파 말로는 자기가 자식을 죽였댑니다. 자식이 죽고나서부터 미쳤습니다. 낫으로 자기 발을 잘라버리고 밤낮 헛소리를 해 대니 친척들한테까지도 버림받을 수 밖에요. 그나마 신전에서 간간이 양식이라도 챙겨줬으니 지금까지 목숨 부지하고 있긴 합니다. 목숨이란 게 참 질기지요. 식구들 다 죽고 다른 이들에게 버림받고 제정신 아 니고 몸도 불구이면서 어찌 세 끼 밥을 지어 그걸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는지. 무삼키바라 신께서 가혹한 운명을 내리시고 테오게이아 신께서 그 운명을 길게 하셨으니 신께서는 대체 무엇을 바라셨는지.

“그 여자, 죽었습니다. 친척도 없으니 신전에서 장례를 지내야 할 듯 합니다.

“네? 그럼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왕께서는 숨을 가다듬으셨다.

“화재로 숨진 마니들을 추모하고 싶습니다. 서고에서 기도드릴 채비를 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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