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가 몇 명이 죽어나가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진수화는 이데아라는 여자의 죽음만은 막으려 애썼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 특출한 사제들은 망설임 없이 죽이더니 왕비도 아니고 한갓 왕과 유소의 정부에 불과했던 여자는 왜 그렇게 살리려 했는지. 진수화는 몇날며칠을 왕과 왕비의 거처에서 살다시피 하며 왕을 설득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밤새도록 비가 내려 달도 뜨지 않았던 밤에 왕께서는 이데아의 처소로 들어가셨다. 진수화가 폴리테이아 왕비와 함께 황급히 그 휘장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데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였다. 사바 왕께서는 격노하셨다.
“네까짓 게 뭔데 감히…너 따위가…너 따위가 감히 나에게 이런 식으로 반항을…….”
왕을 보시는 왕비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산송장처럼 그 자리에 뻣뻣이 서서 움직이지 못 하셨다.
“왕비님, 왕께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해 주십시오.”
진수화의 말에야 정신을 차린 왕비는 왕을 내버려 두시고 혼자 성큼성큼 처소로 돌아가셨다. 이데아를 살리고 싶었다면, 진수화가 단 한 가지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왕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면 이데아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데아는 왕께서 유일하게 마음대로 능욕하고 학대하실 수 있는 마니였으며 유소를 추락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다. 왕보다 불행하고 왕의 발아래에 있던 이데아마저도 왕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매달리지도 않았다. 마지막에는 왕이 아닌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죽음을 결정했다. 왕께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고 싶어 하셨던 이데아마저도. 유소는 이데아가 아닌 아린 여자를 택해서 왕의 화살에서 벗어났다. 왕비는 정서적 동반자가 아닌 정치적 동반자일 뿐이셨다. 왕비는 왕에게서 등을 돌려 버리셨다. 왕은 아마도 유소와 이데아의 죽음에서 오랫동안 헤어나오지 못 하실 것이다. 진수화가 범우형의 죽음을 담아두고 살듯이.
그래서 그랬다. 이데아도, 유소도, 왕도. 그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자신의 탓이 크다고 진수화는 인정했다. 유소와 이데아를 학대하시고 마니들에게 광기를 불러일으키시고 사제들을 마니들에게 하나씩 던져 주시어 죽게 하시고 왕비에게는 버림받은 왕의 손에 묻은 피가 진수화의 손에도 묻어 있었다. 광기, 열정, 갈구 ,서러움, 억울함, 그리움이 뒤섞인 왕의 눈동자는 진수화에게서도 물려받은 것이다.
진수화는 아니디아 왕자를 ‘빛’이라고 표현했다. 아기 왕자의 미소에는 마력이 있었다. 왕자의 동그랗고 반짝이는 눈과 아직 이가 나지 않은 조그만 입이 웃는 모습을 보시려고 왕께서는 하루종일 왕자를 안고 다니셨다. 손수 기저귀를 갈아주시고 목욕을 시키셨다. 진수화는 왕자를 보면서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진수화가 왕자께 눈길이라도 한 번 주려하면 왕께서는 이죽대셨다.
“한 번 안아보시게요? 그럼 뭐 합니까. 아기를 낳아 기를 수도 없는 여자신데. 이 아이가 사바의 자식이 아니라 유소의 자식이라고 믿어서 예뻐하시는 것 같은데 안 되셨지만 제가 기르는 아이는 제 자식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이는 절대 진수화님의 아이도, 유소의 아이도 될 수 없습니다. 진수화님, 그런데, 자꾸 진수화님께서 이 아이를 보시면 저는 이 아이를 미워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유소를 미워했던 것처럼. 진수화님, 자식이 아비에게 미움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아기 왕자는 왕의 품속에서 꼼지락대며 해맑게 웃으셨다. 까맣고 큰 눈이 이데아를 쏙 빼닮으신 왕자는 낯가림을 하지 않으셨다. 다행이었다. 아기가 유소도 왕도 아닌 이데아를 닮으셔서. 아기가 잘 웃으셔서. 사랑받는 아기셔서.
“나는 나를 닮은 자식을 많이 낳고 싶었습니다. 나는 마니들을 믿지 않아요. 그들은 내게 상처만 주고 나를 불신하고 끝내는 나를 배신할 겁니다. 아이는 그렇지 않아요. 아이들은 마니보다는 짐승을 더 닮았지요. 아이는 스스럼없이 내게 안기고 날 보면서 웃어주더이다. 내가 제 아비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고, 나를 좋아해주더이다. 아니디아는 어려서는 나에게 방긋방긋 웃어주고 내 앞에서 아장아장 걸어서 내게 기쁨을 줄 겁니다. 말문이 트이면 우리는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아니디아에게는 종교니 정치니 그런 것들은 가르치지 않을 겁니다. 그런 건 이 사바 혼자만 감당해도 족합니다. 아니디아는 내게 행복한 이야기들만 들려줄 겁니다. 아니디아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나는 행복해질 테니 까. 나는 늙고 이 아이는 젊은 청년이 되는 것을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겁니다. 지금은 내가 아이를 업지만 내가 늙으면 아이가 나를 업을 겁니다. 나는 손주를 보게 될 겁니다. 그 손주도 이 아이만큼 사랑하게 될 겁니다. 나는 내 부모처럼 자식 곁을 떠나지 않고 늘 아이 곁에 머물러 줄 겁니다. 내 부모는 나에게 함께 숲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서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아이는 몸에 문신이 있어서 순결하지 못 하니까 종교를 배우지도 못 하고 숲에도 가지 못 할 겁니다. 화살을 쏠 일도 없을 겁니다. 그 편이 좋습니다. 내가 화살 한 발에 목숨 여럿을 날렸으니까. 이 아이의 손에는 화살을 쥐어주기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