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라고 부르셨던 아린이 죽고 왕비께서 회임을 하셨는데도 왕께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후원에서 궁술을 연습하셨다. 제사장에게도 아무 말씀 없으셨다. 왕께는 과녁이 제사장의 얼굴로 보이실 것이다. 제사장은 왕비를 찾아갔다.
“선택하십시오. 미친 왕인지 사제들인지.”
“내가 사제들을 택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사제들에게 간택받지 않으셨다면 왕비가 되실 수 있었겠습니까?”
“신께서 택하신 게 아니라 사제들이 택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사제들이 택했으니 사제들이 폐할 수도 있습니다.”
“협박하는 겁니까?”
제사장은 대답이 없었다.
“나더러 남편을 배신하라는 겁니까?”
“저희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왕비님과 태중의 아이 모두.”
“그렇다면 사제들을 택하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제사장은 왕비께 독약을 건넸다.
“이걸 왕께 몰래 드리십시오.”
왕비께서는 독약을 챙기셨다. 그날 밤, 왕비께서는 베갯머리에서 왕께 제사장과의 대화를 다 말씀하셨다. 왕께서는 왕비를 바짝 끌어당겨 안으시고 왕비의 귀에 속삭이셨다.
“제사장이 왜 내게 미쳤다고 하는지 알아요? 알면 왕비께서도 날 피할 걸?”
“그런 건 상관하지 않아요.”
그 후 며칠간 제사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왕비의 왕비를 찾아왔다. 왕비와 제사장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제가 드린 독을 제 음식에 넣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으십니까?”
“날 믿지 못 하고 내게 독약이 아닌 다른 것을 주었더군요.”
“독약이 아니라 쓴 맛이 나는 풀이었습니다. 왕비님께서도 절 믿지 못 하셨잖습니까.”
“서로 비긴 걸로 합시다.”
제사장을 죽이려 하셨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독이 아니란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일까. 제사장은 왕비를 이용하지 않기로 결정 내렸다. 그리고 각 지방 신전의 사제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어느새 마니들 사이에 소문이 떠돌았다. 왕께서 혼자 몰래 숲에 다녀오시는 것을 목격한 마니가 있다고 했다. 왕께서 사냥을 금하신 이유는 왕께서 숲의 아린들과 내통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왕께서 인어와 영혼을 거래하셨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왕께서는 해명하지 않으셨다.
“왕비시여, 선택의 기로에 서실 때는 내 아내가 아닌 마니족의 왕비를 택하십시오.”
“그 둘이 무엇이 다른가요.”
“소문이 사실이에요. 내가 아린과 내통하고 있어요.”
왕의 얼굴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왜…그러셨어요?”
왕비의 목소리는 흔들렸다.
“궁에서는 채워질 수 없는 게 있었어요. 이 공간이 나를 숨 막히게 해요.”
“…내가 있어도 그랬어요? 나는 아무 말 없이 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기다렸는데 왜 내가 아니라 아린에게 갔어요? 이유를 말해줘요.”
“아린들도 왕비도 해결책은 아니었어요.”
“뭐가 문제인데요? 뭐가 문제인데 혼자서만 그래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공기가 너무 무거워요.”
왕께서는 그 다음날 제사장에게 사냥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왕께서는 사냥으로 소문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사냥 날, 아린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왕과 사제들은 숲속으로 깊이 들어갔다. 왕께서는 제사장에게 물으셨다.
“제사장, 우리의 신은 왜 제물을 받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을 주듯 신도 아무런 제물 없이 마니족을 보살필 수 있을 텐데.”
“제물은 마니가 신께 소망의 간절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며 속죄의 값을 치르는 의미이며 신께 감사를 표하는 수단입니다. 신께서 제물을 요구하신다기보다는 마니가 바치는 것입니 다.”
“신께서 제물을 사양하시면 되지 않는가.”
“대가 없이 받기만 하면 소중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왕께서 갑자기 멈춰 서셨다. 어느새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왕과 제사장 뿐이었다.
“나를 왜 제물로 바쳤는가.”
“왕께서는 제물로 태어나신 겁니다.”
“사제들과 마니족의 뜻이 아니라 신의 뜻인가?”
“그렇습니다.”
“태어난 게 신의 뜻이라면 죽는 것도 신의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누구의 뜻인가?”
어디선가 인어의 노래가 들려왔다. 나무 사이사이로 하나 둘 아린들이 보였다. 바니타스 왕비를 닮은 아린, 카마 왕비를 닮은 아린, 마라왕을 닮은 아린, 두카 왕비를 닮은 아린……. 아린들은 여럿인 듯도 했고 아린 하나가 서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왕은 천천히 활을 들어 올리시어 시위를 당기셨다. 화살은 전에 제사장이 쏘아 죽인 아린의 이마에 박혀 있던 화살이었다. 제사장의 심장에 화살이 박혔다.
그 날 사냥에서는 아린을 하나도 잡지 못 했다. 역시나 내통을 하신 것이라고들 했다. 숲과의 경계에 있는 마을에서 인어의 노래를 들었다는 마니가 나왔다. 아린들이 숲과 마을의 경계까지 얼씬거린다고 했다. 왕께서 아린들과 밀약을 맺으셨다고 했다. 아린들이 제사장을 죽였다고도 했다. 왕께서는 정벌을 거부하셨다. 왕은 이제 마니들의 적이었다. 마니들은 사제들에게 왕을 페위해달라며 기도를 청했다. 마니들은 제물로 소와 흰사슴을 바쳤다. 왕께서는 제물을 바친 마니들을 잡아 죽여 정의의 신이신 투란실카 신께 제사를 지내셨다. 이 인신공희에 마니들은 경악하고 분노했다. 왕께서 다시 한 번 제단에 올라 신의 용서를 구하시기를 기대했던 마니들은 왕에게서 완전히 돌아섰다.
“왕비께서 묵인해 주시면 왕을 폐하고 태중의 아이를 왕으로 삼겠습니다.”
“폐위된 왕은 어찌 되는가.”
“그건 마니들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제들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겠다는 것인가.”
문을 두드려 대는 마니들은 이미 폭도였다. ‘왕을 죽여라’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왕비께서는 주위를 둘러보셨다. 궁 안에는 사제들뿐이었고 궁 밖에는 광분한 마니들뿐이었다. 왕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왕비의 물음에 왕께서는 평온한 얼굴로 답하셨다.
“내가 죽는다면 신의 뜻일까요 마니의 뜻일까요 내 뜻일까요?”
왕께서는 궁 문을 여셨다. 먹잇감에 달려들어 다리를 물어 떼는 개미떼처럼 마니족이, 아이와 놀아주고 늙은이를 공경하던 마니족이 왕을 에워쌌다. 그제서야 사제들이 마니들을 제지했다.
왕과 왕비는 궁궐 안 가장 깊은 곳, 휘장 뒤에 감금되었다. 왕을 폐위시키고 나서야 공황에 빠져 버린 마니들을 궁에서 내몰고 왕좌를 차지한 사제들은 숲 언저리의 나무를 베고 아린을 사냥하여 영토를 손바닥만큼 늘렸다. 마니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왕을 잊었다.
그 와중에 왕비께서는 아이를 낳으셨다. 마니족 왕가 최초의 공주셨다. 난산이었다. 왕비께서는 고통에 몸부림치셨다. 왕비께서는 공포에 질린 채 몸속에 있는 누군가와 사력을 다해 싸우고 계신 것 같았다. 공주의 머리가 왕비의 몸 밖으로 빠져 나왔을 때 왕비의 생명은 공주를 놓았다. 공주께서는 자기 힘으로 왕비에게서 자신의 몸을 빼내셨다. 태어나신 공주께서는 울지도 않으시고 눈을 똑바로 뜨시고 그 자리에 있던 산파와 의원들을 하나씩 보셨다. 그 눈빛은 갓 태어난 아기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 눈빛을 본 자들은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왕께서는 공주를 안고 중얼거리셨다.
“공주라고…어미를 죽이고 태어난 공주라고…이 아이가 끝을 보겠구나…….”
어미 없는 딸을 안아 보신 왕께서도 얼마 후 갑자기 서거하셨다. 사제들이 죽어가는 왕의 머리맡에 공주님을 데려다 놓으셨다. 왕께서는 손을 허우적대시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괴로워하시며 무슨 말씀을 하실 듯 하실 듯하시다가 숨을 거두셨다. 공주님께서는 울지도 웃지도 않으시고 아기답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가신 왕의 얼굴을 내려다보기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