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가 왕비의 시신은 죄인에 대한 처리 방법대로 숲에 버려졌다. 며칠 후 왕비를 교살했던 사제가 숲과 가까운 나무에 목을 매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제 왕과 왕비의 살해에 관련되었던 사제들은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아직 살아있는 사제 하나는 훗날 마니족 최초로 단독 제사장이 되는 진수화였다.
라가 왕비께서 서거하신 후 진수화는 사바 왕자를 안고 아무도 모르는 밤에 비밀스럽게 제단으로 나아갔다. 왕자의 별이 가장 높이 떠 있었다. 별빛이 내리꽂히는 제단 앞에 두 남녀가 아기를 안고 서 있었다. 진수화는 한 눈에 그들이 마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진수화여, 이 아이도 축복하라.”
남자가 아기를 내밀며 말했다. 손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의 생년월일은 어떻게 됩니까?”
여자가 아이의 생년월일시를 말했다. 왕자와 똑같았다.
“아이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유소’라 이름붙이라.”
분명히 계속 그 남녀를 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진수화는 한날한시에 태어난 사바 왕자와 유소에게 한날한시에 축복의 의식을 행했다.
왕자와 유소는 진수화가 맡아 기르게 되었다. 다른 사제들은 아비드야 왕과 라가 왕비의 아들을 께름칙해 했다. 사제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왕자는 자라서 왕위에 오를 것이다. 계파가 없던 진수화는 ‘미래의 왕’을 양육함으로써 신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왕자는 자랄수록 그 부모를 닮아가셨다. 체구는 라가 왕비를 닮아 작았지만 이목구비는 아비드야 왕을 빼닮아서 크고 뚜렷했다. 반골기질도 부모에게서 이어받으셨다. 명철하고 엽렵한 성격으로 반골 기질을 감춰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은 부모보다 한 수 위였다. 왕자에게는 늘 폭풍 전야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변성기를 지나면서부터는 목소리마저 낮고 음침해지셨다. 진수화는 왕자를 뵐 때마다 범우형을 생각했다. 범우형 제사장이 이 왕자의 부모가 왕과 왕비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죽었단 말인가. 그들이 왕과 왕비가 되면 왕자는 왕이 된다. 왕자의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으셨다면, 최소한 사제를 죽이지만 않으셨으면 범우형 제사장도 죽지 않았을까. 왕자는 누구보다도 뛰어나야 했다. 범우형 제사장이 왕자의 부모 때문에, 왕자가 왕으로서 인정받도록 하기 위해 죽었는데, 왕자가 범우형 제사장의 목숨값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진수화는 왕자에게 혹독했다.
“왕자님께서 그렇게 하셔서야 죽은 사제의 목숨 값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진수화는 사바 왕자께 엄하기만 했다. 사소한 실수나 잘못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왕자도 고분고분한 편은 아니셨다.
“나는 죽은 사제가 아니라 살아있는 왕자다. 내가 왜 죽은 사제까지 신경 써야 하는가!”
진수화에게는 왕자의 어느 것 하나 마음에 차는 게 없었다. 객관적으로, 왕자는 명철하셨고 왕가 대대로 내려오는 특유의 강한 기질도 있으셨다. 그러나 진수화에게는 왕자의 흠결만 보였다. 기대가 과도했던 탓이었을까.
유소는 왕자와 정반대였다. 전형적인 사제의 체형대로 작고 아담하고 늘씬한 몸매의 유소는 이목구비가 크고 뚜렷한 사바 왕자와 달리 선이 가늘고 부드럽고 섬세한 얼굴이었다. 왕자의 부리부리한 눈동자에 분노와 반항과 의심이 뒤섞인 감정들이 이글거리고 있는데 반해 유소의 속쌍꺼풀진 눈에는 어딘지 처연한 슬픔이 감돌았다. 그 아버지에게서 통제되지 않는 야성을 물려받은 왕자와 달리 유소는 늘 조용하고 침착했다. 사바왕자의 낮고 음침한 목소리와 대비되게도 유소는 미성이었다. 신께서 그의 찬가를 듣기 위해 그를 내셨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어릴 때부터 유소는 사바왕자의 그림자였다. 둘은 왕자께서 제왕학을 공부하시고 유소가 찬가를 부를 때를 제외하고는 늘 함께였다. 유소는 단 둘이 있을 때라도 늘 왕자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었고 왕자도 유소를 철저하게 하대하셨다. 유소는 단 한 번도 왕자와 나란히 걷거나 앞서간 적이 없었다. 그림자처럼 늘 한두 발짝 뒤에서 걸었다. 왕자 앞에서 눈 한 번 똑바로 뜬 적이 없이 늘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았다. 왕자 앞에서는 철저히 몸을 낮추는 유소였지만 학식이든 신실함이든 성품이든 모든 면에서 유소가 왕자보다 더 낫다는 것이 사제들의 중론이었다. 무엇보다도 유소에게는 사제를 죽이고 신을 부정한 음탕한 부모가 없었다.
왕자와 유소가 어렸을 때 둘은 나란히 서서 활쏘기 연습을 하곤 했다. 마음을 비우고 집중을 하지 않으면 화살은 어김없이 과녁을 벗어났다. 어느 날은 잠깐 다른 생각을 하셨는지 왕자의 화살이 과녁을 빗맞혔다. 유소는 여전히 흔들림 없이 화살을 과녁에 명중시켰다. 유소에게 졌다는 생각이 드셨는지 왕자의 화살은 다시 빗맞았다. 유소가 활을 쏘았다. 화살은 왕자보다 과녁 중앙에서 더 먼 곳에 박혔다. 유소는 화살을 정리하고 연습을 끝내려 했다. 왕자께서 유소의 손목을 탁 치셨다.
“왜 벌써 끝내려 하느냐.”
유소는 고개를 숙일 뿐 말이 없었다. 왕자는 아랫입술을 꾹 무시고 다시 활을 쏘셨다. 화살이 과녁 정중앙에 박혔다. 그걸로 끝인가 했는데 그날 밤에 왕자께서 유소를 연습장으로 불러내셨다. 진수화는 창문으로 왕자와 유소를 지켜보았다.
“못 다한 연습을 마저 다 해야 하지 않겠느냐.”
유소는 활시위를 당기려 하지 않았다. 왕자께서 과녁을 향해있던 활을 거두어 유소에게 화살을 겨누셨다.
“네가 쏘지 않으면 내가 쏘겠다.”
유소는 마지못해 활을 들었다. 화살은 과녁에 적중하지 못 했다. 왕자께서 활시위를 당기셨다. 유소는 눈을 감았다. 화살은 날지 않았다. 왕자께서 활시위를 거두시며 말씀하셨다.
“건방지게 내게 아량을 베풀 생각은 하지 마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 수 있을 뿐 그 반대는 허용하지 않겠다.”
왕자께서는 성큼성큼 궁 안으로 들어가셨고 언제나처럼 유소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진수화는 유소의 방으로 갔다. 문 앞에서 진수화를 만난 유소는 활과 화살을 뒤로 감추었다.
“왜 그렇게 왕자님 앞에서 시종이나 죄인처럼 처신하느냐.”
“저는 괜찮습니다.”
진수화는 그 후로 더 이상은 왕자와 유소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라가 왕비의 서거 이후로 신전 안팎의 분위기는 나날이 경직되어 갔다. 사제들은 경전 구절 하나하나에 집착했다. 찬가 이외의 모든 노래가 금지되고 춤이 사라졌다. 제례의식과 복장, 사제의 몸짓 하나하나가 틀에 맞춰졌다. 그 틀에서 벗어나면 어김없이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신을 부정한 왕과 왕비를 살해한 사제들은 필요 이상으로 자신들의 신앙심을 증명해야만 했다. 모든 종교 의식이 쓸데없이 복잡해졌다. 마니들은 농사짓는 시간보다 기도하고 명상하고 찬가를 부르고 경전을 공부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사제들은 마니들에게도 신앙을 강요했다. 신의 질서로 촘촘하게 짜여진 마니족의 사회를 파괴하려 한 왕과 왕비를 죽인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소출은 줄어들었다. 땅은 최소한으로만 경작되었다. 종교는 모든 마니들을 결박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닌 광기였다. 종교의 이름으로 먹고 자고 사는 모든 것이 규정되었다. 아사리왕 이후로 이렇게 많은 아린들이 사냥당한 적은 없었다. 제사는 그 어느 시기보다도 크고 웅장하게 자주 거행되었다. 종교에 모든 것이 집중될수록 마니들의 삶은 경시당했다. 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사제들은 설린 제사장과 유할란 제사장이었다. 진수화는 장차 왕이 되실 분을 양육하는 사제로서 제사장에서 두 등급 낮은 지위를 받았다. 그리고 왕자의 교육을 구실로 제사장들과 자주 만났다. 만나서 왕자에 대한 대화는 하지 않고 두 제사장을 경쟁시키고 이간질했다. 가장 높은 자리를 공동으로 차지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경쟁을 유발하는 법이었다. 설린 제사장과 유할란 제사장은 교리 해석부터 제례 예식까지 사사건건 대립했다. 진수화는 단지 둘 사이를 오가며 말 몇 마디만 했다.
“설린 제사장님, 유할란 제사장님께서는 라누트 신의 경전 예순 네 번째 구절을 페아시테 신과 연관 지어 해석하셨는데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페아시테 신을 모시는 분이라서 아무래도 해석을 그렇게 하신 듯 한데…….”
“유할란 제사장님, 설린 제사장님께서는 그 구절을 드미트에 신의 경전과 연관지으십니다만 그런 해석은 유할란 님의 견해와 반대되는 것 아닙니까? 저번에도 그러시고 계속 반대로 해석을 하시다 보니 모순되는 해석도 많으셔서…….”
두 제사장이 소모적인 경쟁에 힘을 쏟고 사제들이 자신들이 죽인 왕과 왕비의 아들이신 왕자에 대해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않는 사이에 왕자는 어느덧 성년이 되셨다. 즉위식을 얼마 남겨 두지 않았던 어느 날 왕자께서 한밤중에 진수화를 만나러 오셨다. 언제나처럼 유소가 따라 왔다.
“진수화님, 협상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데아’라는 마니를 왕비로 맞게 해 주신다면 제가 진수화님을 제사장이 되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확실히 그 부모보다는 한 수 위다.
“저와 협상까지 하시는 걸 보니 신께서 왕비로 정해주실 만한 마니가 아닌가 봅니다. 신의 뜻과 어긋나는 일을 하시면 다른 사제들이 용남하지 않을 겁니다.”
“유소에게 점을 쳐 보라 했더니 결혼의 신이신 라밀하나 신께서 그 여자는 안 된다고 하셨 습니다. 사제들이 허락할 리가 없는 여자인 겁니다. 그렇지만 진수화님께서는 어떻게든 다른 사제들에게 손을 쓰실 수가 있으실 겁니다. 진수화님께서는 제사장 자리에 욕심이 있으신 것 같은데 왕이 도와주지 않으면 계파도 없는 진수화님께 제사장은 거의 불가능할 겁니다.”
“여자 하나 때문에 제게 제사장 자리를 제안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제가 왕이 되었을 때 저를 지원해 줄 제사장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진수화님께서 마음 속에 품고 계신 계획과 제 계획이 서로 비슷하지 않습니까.”
“서로 필요한 관계라면 굳이 그 여자를 그렇게 끌어들이지 않아도 서로 협력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진수화 님과 저 사이에 공동의 비밀 하나쯤은 있는 것도 좋을 겁니다.”
“그래서, 신의 뜻에 어긋나는 결혼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저는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핑계는 그럴 듯 하게 대십시오. 왕의 혼인이 정말로 신의 뜻에 따라 정해지는 것입니까? 사제들이 왕비를 간택하고서는 신의 뜻이라고 명명하는 것 뿐이라는 것은 사제이신 진수화 님께서 잘 아실 텐데요.”
왕자께서는 소리 내어 웃으셨다. 음산했다. 한참을 웃으시고 나서 왕자께서는 진수화의 눈을 똑바로 보시며 말씀하셨다.
“진수화 제사장님, 저는 신을 믿지 않습니다. 신은 나약한 자들이나 의지하는 허상입니다.”
왕자께서는 진수화의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나가 버리셨다. 유소가 할 말이 있는지 남았다.
“진수화님께서는 단 한 번도 신께 진심으로 기도드린 적이 없으십니다. 진수화 님에게도 모략과 권력욕이 아닌, 마음이라는 것이 있으십니까?”
유소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절규하는 것보다 더 격했다.
“유소, 나는 ‘단 한 번’ 신께 진심으로 기도드렸던 적이 있네.”
범우형 님께서 살아돌아오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러나 신께서는 그 기도를 외면하셨다. 그 후로 신께 진심으로 기도드리지 않았던 것은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던 신에 대한 반항이었다. 유소는 진수화를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진수화도 저런 눈으로 신께 기도드렸었다.
“그런데, 신께서는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네.”
유소의 눈빛이 한풀 꺾였다. 짙은 체념이 눈가에 내려앉았다.
“한갓 마니가 신의 뜻을 어찌 알겠냐마는, 그래도 신께서 한 번만 뜻을 접어주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셨더라면 좋았을 것을…….”
진수화의 말끝이 사그라든다. 방 안에 달빛이 들었다.
얼마 후에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라 칸타밀레 사바(사바 왕을 축복하소서).” 사제들의 찬가가 울려 퍼지는 속에 사바 왕께서는 신의 뜻에 따라 마니족을 이끌 것을 맹세하셨다. 자신은 왕이 아니라 ‘아비드야’일 뿐이라고 하셨던 사바 왕의 아버지와는 달랐다.
사바 왕께서 왕위에 오르시자마자 하신 일은 아비드야와 라가를 정식으로 왕과 왕비로 추존하는 것이었다.
“왕이시여, 무모하십니다. 지금 사제 중에 왕의 편이 있습니까? 왕위에 오르시자마자 사제들에 반하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왕위를 굳건히 하신 후에 하셔도 충분하십니다.”
“진수화님, 저는 왕위를 굳건히 하기 위해 이러는 겁니다.”
왕은 진수화의 충고를 무시하시고 사제들을 소집하셨다. 왕좌는 사제들의 자리보다 한 단 높은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사제들께서는 신과 마니족을 대신하여 아비드야 왕과 라가 왕비를 정식으로 역사에 올리시고 기둥에 조각을 하는 절차를 밟아 주셨으면 합니다.”
사제들의 반발이 터져 나왔다.
“아비드야는 신을 부정했습니다. 그런 자를 마니족의 왕으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부정한 동거를 한 남녀를 어찌 마니족의 왕과 왕비로 인정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비드야와 라가가 왕과 왕비가 되면 그들을 죽인 사제들은 반역자가 된다. 지금의 사제들은 그 때의 사제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다. 연관이 없는 사제는 범우형 아래에 있던 진수화 뿐이다.
“사제분들께서 경전에 해박하시니 잘 아시겠지요. 드미트에 신과 하타 신께서 카르마왕을 내시고 드미트에 신의 일족과 아샤루카타이신께서 왕을 승인하시어 카르마왕의 자손이 왕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아비드야 왕께서 카르마왕의 핏줄이라는 점은 부인하실 수 없으실 겁니다. 그 분을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 바로 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아버지가 왕이 아니시라면, 그 아들인 저는 왕입니까 아닙니까?”
사제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머리가 허연 사제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왕이시여, 아비드야는 카르마왕의 후손이시지만 죄를 지으셨습니다. 죄 지은 자를 왕으로 인정하는 것이 왕가의 권위를 오히려 무너뜨리는 겁니다. 왕은 누구보다도 도덕적이어야 하고, 모든 마니들의 모범이 되어야 카르마왕의 후손으로서 권위를 갖는 겁니다. 아비드야는 그걸 어겼습니다. 왕이시여, 왕께서는 죄인의 아들이시나 신께서 승인하셨으므로 왕이 되신 것이니 왕의 정당성에는 문제가 없으십니다.”
“그렇다면 제가 말을 좀 바꾸지요. 왕이 아닌 자의 아들이 왕이 될 수도 있다면 사제들께서 내 자식이 아닌 다른 마니를 데려와도 신의 승인만 받으면 그가 왕이 될 수 있는 겁니까?”
왕의 면전에서 답하기는 참으로 곤란한 질문이었다. 사제는 우물쭈물하다가 “예”라고 짧게 답했다.
“그래요? 그 말씀은 사제들이 왕보다 높다는 뜻입니까?”
“신께서 왕과 사제보다 우선하십니다. 신께서 승인하시는 자가 왕이 됩니다.”
“‘신의 승인’이라는 것은 사제들이 마음만 먹으면 조작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신께서 노하셔서 처벌하신다 해도 사제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한 이후니까 사제들이야 당장 자기네들이 원하는 대로 ‘신’을 핑계로 뭐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왕께서는 지금 사제들을 모독하시는 겁니까!”
“사제들께서 먼저 신과 왕을 모독했습니다. ‘신의 승인’이라고 하셨습니까. 아비드야 왕을 죽인 사제들이 모두 죽은 것이 신의 뜻이십니다.”
“그건 신이 아니라 인어의 짓이었습니다.”
“신께서 인어보다 우월하신데도 인어들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사제들이 더 나서기 전에 왕이 매듭을 지으셨다.
“진수화 사제를 제사장으로 임명할 것입니다. 신의 승인을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진수화, 설린, 유할란 제사장께서는 아비드야 왕과 라가 왕비를 추숭하는 의식을 행하십시오.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잘못 된 것이라면 신께서 저를 처벌하실 겁니다.”
진수화는 당황했다. 이런 식으로 진수화에게 다 떠넘겨 버린 것이다.
“진수화, 자네가 왕을 부추겼군!”
“왕을 부추겨서 겉으로는 아비드야와 라가의 추존을 행하고 속으로는 범우형 사제의 복권을 꾀한 것 아닌가?”
“진수화, 그렇게도 제사장이 되고 싶었는가?”
“신께서 저를 제사장으로 승인하시는지 아닌지만 보시면 되잖습니까. 말씀들은 그 이후에 하시지요.”
진수화는 몸과 정신을 정화하고 제단 위에 반듯이 누웠다. 제사장들의 신이시자 역사의 신이신 페아시테 신의 신상 앞에서 향운이 피어올랐다. 설린 제사장과 유할란 제사장이 신상 앞에서 절을 했다. 유소가 나와서 신의 뜻을 묻는 점을 쳤다.
“나 페아시테는 진수화를 제사장으로 임명한다.”
설린 제사장이 활을 들어 진수화를 쏘는 시늉을 한 후 유할란 제사장이 제사장의 옷과 신발을 진수화에게 가져왔다. 진수화는 제단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신발을 신었다. 진수화가 페아시테 신 앞에서 제물을 바치자 도열해 있던 사제들이 일제히 절을 했다. 설린 제사장과 유할란 제사장은 표정을 감추고 있었지만 영 떨떠름해 보였다. 그날 밤에 왕께서 진수화를 부르셨다.
“축하드립니다. 진수화 제사장님.”
“왕께서는 험한 길을 택하셨습니다. 아까 보셨듯이 사제들은 아비드야 왕과 라가 왕비를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진수화 제사장님께서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 일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할 일이 있으니 추숭 문제는 되도록 빨리 완결지어 주십시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요.”
“진수화 제사장님, 들에 나가 보셨습니까? 카르마왕께서 인도하신 이 비옥한 평야에서 마 니족이 지금 굶주리고 있는 것 보셨습니까? 드미트에 신을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며 사제들이 농사를 자꾸 금하고서는 굶주리는 것은 신의 뜻이라며 신께 이 굶주림을 끝내 달라고 기도드린다며 얼마 있지도 않은 식량을 거두어 가니까 마니족이 이렇게 못 먹고 있는 겁니 다. 사제들 입에서 ‘신의 뜻’이라는 소리만 안 나오면 마니족은 예전처럼 잘 살 겁니다.”
“사제들과의 일전도 불사하실 겁니까?”
“필요하다면 합니다.”
“신과 사제를 부정하십니까?”
“왕의 개인적 신념과는 별개로, 마니족의 신앙과 사제를 일소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개혁할 뿐입니다. 그 개혁의 첫 단계는 드미트에 신(땅의 신)께 상처를 내지 않기 위해 농사를 짓지 말고 채집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는 극단적 원리주의 사제들입니다. 그들은 제 정신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