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께서 내리신 아름다움 육체에 문신이라는 흠집이 난 왕을 향한 불신이 채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아니디아왕께서는 왕위에 오르셨다. 왕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저수지와 수로, 관개시설을 순시하신 것이었다. 두 번째로 하신 일은 혼인이었다. 아직 성년이 안 되셨던 왕은 등활을 순시하시던 길에 또래의 어떤 소녀를 데려 오셨다. 그리고는 혼인을 하겠다고 하셨다. 눈이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그 소녀와. 외로워서 그러셨던 걸까. 선왕의 서거 후에 그 시신을 방에 그대로 두신 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축제를 즐기시고 장례가 끝나자마자 왕위에 오르신 것도 외로워서 그러셨던 것일까. 찬가를 배울 때에는 귀애해 주었던 사제들이 한 순간에 정적으로 돌변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선왕비께서 궁에 버티고 계시는 상황에서 자신이 외톨이라고 느끼셨던 것일까.
“내가 너의 눈이 되고 목소리가 될게. 너도 내 목소리와 눈이 되어 줄 수 있어?”
소녀가 왕의 말씀에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나와 늘 함께 있어 줘. 나도 그럴게.”
소녀가 더듬더듬 왕께서 내미신 손을 잡았다.
자기 나이가 몇인지 확실하게 알지 못 하고, 부모나 친척도 없이 혼자 자랐다는 소녀와 성년이 채 되지 않으신 왕의 혼인에 혼인의 신이신 라밀하나 여신을 모시는 사제들은 반발했다. 그 소녀가 아니면 안 된다면, 왕이 성년이 되실 때까지 혼인을 미루면 안 되시냐고. 왕은 단호하셨다. 혼인을 하지 않은 상태로 함께 궁 안에서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선왕비께서 제안하셨다. 휘장 뒤에 그 소녀를 숨겨 두고 만나면 되지 않겠냐고. 왕도 소녀도 본능적으로 반발했다. 눈도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없는 여자가 왕비 노릇을 제대로 하겠냐는 우려에도 아랑곳 않고 왕과 소녀는 혼인을 강행했다. 혼인식 날 마니족은 왕께서 왜 그 소녀에게 그토록 끌렸는지 조금 알았다. 활짝 미소지으시는 왕비의 얼굴은 세상의 모든 꽃을 한 데 모은 것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어린 부부는 소꿉장난하듯 재미나게 잘 사셨다. 아니디아왕께서는 어디를 가시건 늘 아포리아 왕비와 함께 다니셨다. 일과가 끝난 후에 부부는 도서관에 가셨다. 왕비께서 손으로 서가의 책을 훑으시면 왕께서 제목을 읽어주셨다. 왕비께서 책을 고르시면 부부는 나란히 앉아 책을 읽으셨다. 왕께서 왕비의 손을 끌어다가 어디를 읽고 있는지 짚어 가며 소리 내어 읽으셨다. 때로는 왕의 나직한 목소리에 왕비께서 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버리셨고 때로는 흥분해서 왕의 손바닥과 팔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마구 쓰기도 하셨다. 그러면 왕께서도 곧 왕비의 손과 팔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시며 논쟁을 이어가셨다. 왕과 왕비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공사가 완공되고, 민간에 찬가를 보급하시고, 농경에 힘쓰시고, 많은 일을 처리하시면서도 왕꼐서는 단 한 번도 선왕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셨다. 아예 잊으신 것 같았다. 개간된 평야에서는 곡식과 과일과 채소가 풍작이었다. 아샤루카타이신께 기원하던 노래는 점차 땅의 여신이신 드미트에 신 일족을 찬양하는 노래로 바뀌어 갔다. 모든 것이 안정적이었다. 왕께서 아린 사냥을 철저하게 금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풍년이 들면 아린족이 숲에서 나와서 마니족의 식량을 약탈해 갈 것이라느니 하는 여러 소문이 돌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왕과 왕비 사이에 아이도 잉태되었다. 왕은 왕비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리셨다.
“내가 아버지가 된다고……. 아무 준비도 안 되었는데……. 기쁠 줄 알았는데 그냥 혼란스러워. 내 아버지도 이러셨을까? 아포리아,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왕비께서 왕의 등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셨다.
‘네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였어?’
왕께서 왕비 옆에 드러누우셨다.
“날 사랑하셨지. 내가 다른 마니들에게도 사랑받길 원하셨고. 약한 분이셨어. 그래서 그러셨을까. 나는 내 입으로 아버지의 목소리를 대신 내야했어. 난 그걸 내 선택이라고 스스로 우겼어. 아버지를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었어.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너무 막막하고 외로웠어. 아버지가 안 계시는데 나 혼자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아버지가 하시던 대로만 그대로 하면 될까. 아니,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는데 내가 더 이상 아버지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누구랑 이 감정을 나누고 싶었는데 선왕비님과 아버지는 겉으로만 부부셨어. 사제들도 아버지와 대립했고. 마니족도 아버지를 싫어했고. 내가 느끼는 감정을 나눌 마니가 아무도 없더라고. 밖에는 축제가 한창이어서 내 아버지가 돌아가시건 말건 모두들 웃고 떠들고 있었고 안에는 아버지의 시신이 있었고. 난 시신을 방에 두고 도망쳤어. 혼란스러웠어. 아버지는, 불쌍하고 가여우신 분이셨어. 늘 어딘지 자신 없으셨고 아무와도 친해지지 못 하셨던 분이셨어. 돌아가실 때도 곁에 나 뿐이었어.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아버지보다 내 생각이 먼저 나고, 슬프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더 컸고…좋은 아버지셨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착한 아들이 아니어서 그랬을까. 아버지는 정말 좋은 아버지였는데. 날 사랑해 주셨는데.”
‘아버지를 원망해?’
왕이 도리질하시며 강하게 부정하신다. “아니야”하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게 너무 많았어? 네 인생을 아버지가 마음대로 조종하려 했다고 생각해?’
왕께서 팔베개를 하신 채 한참을 생각하셨다. 왕께서 몸을 일으켜 윗옷을 벗으신다. 등에 흰사슴이 있다. 왕비도 익히 알고 계신 그 흰사슴이다.
“이 흰사슴이 내 등에 있는 한 아버지는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겠지. 등에 아버지를 지고 다니는 거야.”
왕께서 벗으셨던 윗옷을 다시 입으시며 말씀하셨다.
“이 흰사슴, 나에게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대.”
왕은 다시 왕비 곁에 누우셨다.
“아포리아, 네 부모님은 어떠셨어?”
‘내 부모는 날 좋아하지 않았어. 가정이 있는 마니들끼리 사랑에 빠져서 낳은 아이가 나였거든. 내가 임신되지 않았다면 불륜이 발각되지 않았을지도 몰라. 아니면 내 어머니가 태 중에서 날 죽이려 했을 때 내가 죽었다면. 내 아버지는 바로 형을 받았고 내 어머니는 내가 젖을 뗄 때까지 형을 연기 받았어. 날 맡으려는 마니가 없었거든. 어머니는 날 한 번도 안지 않았대. 어머니가 형을 당하고 내가 걸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마을을 떠났어. 마니들은 내가 눈이 보이지 않고 말을 할 수 없는 건 내 부모가 욕정에 눈멀고 거짓말로 각자의 식구들을 속인 벌을 내가 받는 거라고 수군댔어.’
“아니야. 넌 네 눈과 목소리를 내게 준 거야. 등활에서 널 처음 보았을 때 넌 환하게 웃고 있었어. 내 눈이 밝아지고 목이 탁 트이는 것 같았어. 내가 전국을 순시했던 건 마니들 해 석대로 ‘선왕을 계승하겠다는 뜻의 표명’이 아니라 도피였어. 왕위에 오르긴 했는데 막막한 건 여전해서 어떻게 시간 좀 벌어보려고 했던 거였어. 널 보고 들었을 때 나를 짓누르고 있던 무엇인가가 사라지고 내가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네게 청혼했던 건 내가 혼자서 선택한 거의 최초의 일이었어.”
‘난 등활이 좋았어. 새로 만들어진 땅이라서 젊은 마니들이 혼자서 왔어. 마니들은 혼자서 새롭게 시작해서 거기서 다른 마니를 만나서 새롭게 가족을 이루고 살았어. 가족과 가족의 결합이 아니라 마니와 마니의 결합이었어. 드미트에 신이 아니라 마니의 땅이있고 모든 게 새롭게 시작되는 곳이었어. 거기서 아니디아 너를 만났던 거야.’
“지금은 등활도 다른 마을들과 똑같아졌어.”
아니디아 왕이 왕비의 배를 둥글게 쓰다듬는다.
“우리,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너랑 나랑 우리 아기랑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나는 왠지 두려워.”
왕비의 임신이 알려지자 마니들은 기뻐했다. 모든 마니가 왕과 왕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단 한 분만 제외하고.
“왜 선왕비님께서는 축하해 주지 않으세요?”
왕께서 왕비의 말씀을 선왕비께 그대로 전하셨다.
“내가 예의에 어긋나게 행동했군요. 축하드립니다.”
“예의상 그러지 마시고 진심으로 축하해 주세요.”
왕비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시는 왕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별 당돌하고 맹랑한 여자 다 보겠다는 투로 왕비를 보시는 선왕비의 눈빛이 왕께도 느껴졌다.
“진심으로요? 내가 어떻게 진심으로 기뻐합니까? 왕께서도 아시잖습니까. 내가 왕을 좋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머니로서 축하는 해 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열 달 동안 내 뱃속에 있던 게 천뭉치였을 뿐인데도, 선왕꼐서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불륜을 저지르셔서 왕을 낳으셨는데도, 그것도 이 궁 안에 그 여자를 몰래 가두어두시고서 그러셨는데도, 게다가 왕께서 선왕의 피를 이어받지 않으셨을 수도 있는데도 내가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을까요?”
“선왕비님,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셨어요. 선왕께서 왜 여자를 이 궁 안에 가두어요? 전 아버지의 아들이라서 아버지를 잘 알아요. 아포리아, 가자.”
“아버지를 잘 안다고요? 선왕께서 얼마나 광포하고 잔인하셨는지도 알아요? 선왕께서 아 니디아왕의 생모를 죽이셨다는 것도요?”
왕은 왕비의 손목을 잡고 도망치듯 나가셨다. 폴리테이아 선왕비는 쓰게 미소지으셨다. 아니디아가 혼인을 하고 아버지가 된다니. 세월이 빠르다. 이데아를 닮아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검고 그 눈동자는 왕가 특유의 눈빛을 이어받아 타오르듯 빛난다. 목소리는 유소를 그대로 이었고 성격은 유소와 사바왕과 이데아를 골고루 닮았다. 취향도 유소와 사바왕을 닮으신 걸까. 아포리아 왕비의 눈은 아린족처럼 흰자가 거의 없이 새까맸다.
왕비꼐서 임신하신 후부터 왕은 일을 거의 하지 않으셨다. 사바왕의 생전, 왕자셨을 때 그토록 애착을 보이시던 등활에도 발길을 끊으셨다. 찬가 일도 사제들에게 모두 미루셨다. 아린 사냥을 금지한 이래로 불안해하는 아린족을 안심시키기 위해 흰사슴을 타고 숲과 마을의 경계를 도시던 일도 하지 않으셨다. 모든 업무를 내버려 두시고 왕비와 시간을 보내셨다. 아이에 무척이나 관대한 마니족은 별다른 불만이 없었지만 사제들은 수군댔다. 그러나 왕께서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으시는 듯 했다. 아버지나 이데아에 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왕비와 함께 궁 안을 샅샅이 뒤지시기만 하셨다.
“아포리아, 배 속의 아이를 사랑해?”
‘아직은 잘 모르곘어. 하지만 분명히 사랑하게 될 거야. 나는 나를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니까 우리의 아이도 사랑하게 될 거야.’
날이 갈수록 왕비의 배가 달처럼 불러왔다. 왕은 이유를 밝히지 않으시고 도서관과 궁 곳곳을, 신전 구석구석을 수색하셨다. 왕비는 이유를 알고 계셨다. 궁궐의 가장 깊숙한 곳, 자줏빛 휘장이 쳐진 방이 점점 가까워졌다. 왕비께서 왕의 소매를 잡으셨다.
‘아니디아, 그만 두자. 지금처럼 딱 이대로만 있어도 아무 문제없잖아.’
“난 내 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어.”
‘그럼 아버지는?’
“폴리테이아 선왕비님의 말씀은 다 거짓이야.”
‘거짓이라고 믿으면 지금 왜 이러는데? 사실이라고 믿고 있잖아. 네 아버지께서 네 어머니에 대해 왜 아무 말씀 안 하셨을까?’
“아포리아…….”
아포리아왕비의 눈에 눈물이 고이셨다. 아포리아 왕비께서 왕의 손바닥을 끌어당겨 글씨를 쓰셨다. 손톱으로 꾹꾹 눌러 쓰셔서 아프다.
‘제발 그만 두자. 아니디아, 나는 남들처럼 행복해지고 싶어. 아니디아, 지금의 내 행복을 깨지 말아줘, 제발.’
“아니디아, 날 낳아준 어머니를 한 번도 보지 못 했어. 어머니가 그리워. 분명히 좋은 분이 셨을 거야. 선왕비님과는 다른, 너 같은 어머니셨을 거야. 내가 어머니를 기억해 드리고 싶어.”
‘그럼 네 아버지는 뭐가 되는 거냐구.’
아니디아왕께서 왕비를 끌어당겨 안으셨다.
“아버지는 라밀하나 여신께 죄를 지으신 분이고, 내 어머니를 학대하신 분이고, 나도 너처럼 불륜에서 태어난 아이야.”
‘자식은 아무 잘못도 없어.’
결국 왕께서는 자줏빛 휘장을 걷으셨다.
‘아!’
왕비께서 왕의 손을 놓으셨다.
‘아기가 움직였어…….’
왕께서 왕비의 배에 손을 올리셨다. 뱃속의 아기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사랑해…사랑해…보고 싶어……. 너무나도 보고 싶어…….’
휘장이 걷힌 방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왕께서는 침대를 쓱 쓸어보고 누워보셨다. 등에 무엇인가 배기는 것이 있었다. 칼로 이불을 찢으셨다. 광택이 도는 보라색과 청록색으로 표지를 싼 책이 나왔다. 이데아와 유소가 직접 쓴 책. 왕께서는 이야기책 읽듯이 왕비의 손을 짚어가며 소리 내어 책을 읽으셨다. 중간중간 멈췄다가, 입술을 깨무시며, 간신히 읽으시면서도 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셨다.
“모두들, 미쳤던 걸까……? 나는, 나는 누구지? 아버지는, 왜…….”
‘안아 줄까?’
아포리아 왕비께서 아니디아왕을 보듬으셨다. 아기가 두 분 사이에서 움직였다.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싫어하면서도 부모를 닮는다던데…….”
‘넌 좋은 남편이니까 좋은 아버지도 될 수 있을 거야.’
“만약, 만약에 내 생부가 유소라면…….”
아포리아 왕비께서 아니디아 왕의 흰사슴을 쓰다듬으셨다.
“내 쌍둥이 형제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어. 유소와 아린 여자 사이의 그 아이는 죽고 나는 태어났어…아포리아…….”
‘아니디아, 괜찮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