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냥이 끝나자마자 왕께서는 유소를 비롯한 젊고 건강한 사제만을 추려 마니족 영토의 최남단으로 가셨다. 왕과 동행했던 사제들의 말에 의하면 마니족의 영토라고는 해도 마니족이 살지 않던 그 땅에는 야생소 무리가 살고 있었다고 했다. 크고 날카로운 뿔과 단단한 발굽, 맹수처럼 이글거리는 눈을 가진 거대한 야생 숫소를 왕께서 직접 화살을 쏘아 상처 입힌 후 올가미를 걸어 잡으셨다. 왕께서는 사제들과 송아지 몇 마리와 암소를 생포하시고서 사나운 야생 수소의 등에 타시고 마니족의 마을을 지나 신전으로 돌아오셨다. 마치 카르마왕처럼. 후일 우경이 정착되었을 때 왕께서는 진수화 제사장에게 사실을 말씀해 주셨다.
“신의 계시? 그런 건 없었습니다. 책을 읽다가 카르마왕께서 잡아오셨다는 그 짐승을 길들여 농사에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44일 만에 잡아 오셨다기에 거리를 계산해 봤더니 남쪽 평원 지대 쯤이겠더군요. 그렇게 알아낸 겁니다. 생각해보니, 카르마왕께서 수완이 좋으셨습니다. 이 짐승을 신께서 내리신 거라고 하시다니. 물론 그 피를 이어받은 이 사바도 신께서 이 소들을 내리시고 농사에 쓰라고 계시하셨다고 신을 빌어 제 명령을 내렸고.”
대장간에는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대장장이들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들의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대장장이들은 뜨거운 불에 녹아서 액체가 된 모사비를 조형틀에 부었다. 틀에서 굳어진 쟁기날이며 호미날이며 삽날을 틀에서 분리되어 찬물에 식혔다. 햇빛이 농기구의 예리하고 사납고 날카로운 날 위에서 빛났다. 길들인 야생소에 멍에와 굴레가 씌워지고 마니족은 짐승의 이빨 같은 농기구로 땅을 파헤치고 갈아엎었다. 땅에 거름이 뿌려지고 농부들은 씨앗을 심었다. 왕과 왕비께서도 들에 나가 함께 농사를 지으셨다. 늘 왕을 따라 다니던 유소가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신다는 핑계를 대며 들에 나가지 않고 궁에 머물려 했다.
“고운 살결이 햇볕에 상할까 두려운 게 아니고?”
왕께서 이죽거리셨다. 유소는 잠자코 들로 나갔다. 그러나 농사를 짓지는 않고 흙을 만지며 뭐라고 중얼거리거나 소를 쓰다듬어주기만 했다. 왕은 유소에게 굳이 농사를 지으라고는 하지 않으셨다.
그 해 농사는 대풍이었다. 마니족은 남은 곡식으로 떡을 빚고 술을 담갔다. 추수제다운 추수제를 해 본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커다란 소와 추수한 곡식과 채소, 과일을 제단에 풍성하게 쌓아올렸다. 새옷을 입은 아이들은 좋아라 뛰어다녔고 어른들도 부른 배를 두드리며 술에 얼근히 취했다. 마니들은 신과 왕께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마니족이 웃는 것을 보시고, 신께 감사드리는 모습을 보십시오. 신심이 더 깊어진 것 같지 않습니까? 신께서도 오랜만에 포식하시고요.”
왕께서 득의양양한 얼굴로 사제들을 돌아보셨다. 유할란 제사장은 떫은 표정을 애써 감췄지만 어조에서 못마땅하다는 투가 느껴졌다.
“이게 진정한 신앙입니까? 기복신앙 이상 되지 못 합니다. 풍작이라고 감사드리고 흉작이면 원망할 거고. 자연스럽지 못 하고, 드미트에 여신을 괴롭히고.”
유할란 제사장의 말은 북소리 노랫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그 해 겨울은 바빴다. 왕께서는 늘 조급하셨다. 여세를 몰아서 다음 해 봄에 곧바로 수로 공사를 시작하고 싶어하셨다.
“몇 년이 지나면 마니족은 이 상태에 익숙해져 버립니다. 더 많은 농토를 확보하고 더 잘 살 수 있는 데도요. 아직 기쁨과 놀라움과 만족감과 자신감에 차 있을 때 착수해야 합니다. 관개공사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지금 시작해야 올해 태어난 아이들이 식량걱정을 덜 겁니다.”
기나긴 흉년이 끝나자 마니족의 출산율이 치솟았다. 앞으로 몇 년간은 집집마다 아이들이 태어날 것이다. 그 아이들을 먹이고 키우고 아이들이 자라서 가정을 이루고 또 아이를 낳으려면 농토가 더 많이 필요했다.
“관개공사를 할 수 있는 지식을 갖춘 사제를 소집하시고, 마니족을 얼마나 동원해야 하는지 보고하십시오. 내년 봄에 바로 시작할 수 있게 채비를 하시라는 겁니다. 더 이상은 못 미룹니다.”
왕께서는 지나치게 급하셨다. 기한을 정하시고 그 안에 모든 것을 매듭지으려 하셨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시려는 태세였다. 진수화 제사장은 왕께 자료를 전달받았다. 자료를 보아하니 꽤 오래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해 오신 것 같았다.
“유소, 왕께 너무 조급하게 일은 하려 하시지 말라고 설득하게.”
“저는 왕을 설득하지 못 합니다.”
“그렇다면 내일 다른 사제들 앞에서 신의 뜻을 구할 수는 있는가?”
“그것은 해 보겠습니다.…제사장님.”
“할 말이 있는가?”
“우리의 신께서는 자애로우십니까, 공명정대하십니까, 용서하시는 신이십니까, 처벌하시는 신이십니까?”
“신의 크고 깊은 뜻을 어찌 알겠는가. 또 신의 오묘함을 어찌 알겠는가. 축복이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재앙이기도 하고 징벌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용서와 가르침이기도 한 것을.”
“전에 신께 간절히 기도하셨을 때 신께서 들어주시지 않으셨다고 하셨습니까?”
“그랬었네. 글쎄, 그 때 내가 사제가 아닌 마니의 마음으로 기도해서 그러셨는지, 왜 그러 셨는지 모르겠네. 그런데 그런 건 왜 묻는 것인가?”
“그냥 여쭙고 싶었습니다.”
그 때 유소의 사정을 알았더라면, 유소에게 왜 그러는지 더 캐물었더라면 한 번 더 마음으로 신께 기도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
대회의장에는 촛불 몇 개만이 빛나고 있었다. 마름모 모양의 얇은 보라색과 청록색 보석판을 연결하여 장식한 옷을 입은 유소는 별자리의 위치를 계산해가며 원탁 위에 보석과 산가지들을 배열해 나갔다. 붉고 푸른 보석이 원탁 위에 흩뿌려진 듯 했다. 중요한 별의 위치마다 수정이 세워졌다. 비어 있던 원탁의 한 가운데에 향로가 놓였다. 유소가 두 손으로 향로를 세 번 만졌다. 그가 보석의 위치를 하나하나 바꾸면서 점괘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자만심을 갖지 말라. 강의 흐름을 바꾸는 것도 새로운 땅에서 곡식이 영글고 과실이 여무는 것도 마니의 손이 아닌 신의 뜻이 한 것이라. 너희가 곧 신의 영광과 축복을 보게 되리라.”
유소는 마지막 점괘의 해석은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신께서 제게 내리신 신탁이십니다.”
신의 뜻이 대회의장 안의 모든 사제들에게 전해졌다. 이제 아무도 관개공사에 반대할 자는 없다.
“진수화 제사장님, 공연 잘 봤습니다. 제사장님께서는 오늘 신탁이 이렇게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겠지요.”
왕께서는 진수화 제사장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이시고는 대회의장을 빠져 나가셨다.
유소는 부쩍 밤마다 몰래 신전을 빠져나가 숲으로 가는 일이 잦아졌다. 낮에도 어디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가끔 방에서 혼자 무엇을 쓰고 있기도 했다. 언제 다 하는 것인지 찬가에 대한 연구들을 쏟아냈다. 후계자를 정해서 찬가와 점성술을 전수하려고도 했으나 후계자가 될 사제가 유소 그 자신만큼 잘 하지 못 하자 더 이상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 교본을 집필했다. 유소의 눈가에 아스라이 깔리는 그늘이 더 짙어졌다. 날이 갈수록 야위고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러다가도 때때로 더 이상 고통도 희망도 없는 평온함이 얼굴에 떠올랐다.
왕께서는 담당 사제에게 활과 화살을 주문하셨다. 크기는 작지만 시위가 탄력있는 활과 촉이 크고 뾰족한 화살이었다. 왕께서는 종일 궁술 연습을 하셨다. 활이 부러질 듯 팽팽하게 휘었다.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 과녁에 꽂혔다. 턱 소리가 나며 과녁의 정중앙이 뚫렸다. 왕께서는 화살통의 화살이 하나만 남을 때까지 활을 쏘셨다. 늘 마지막 화살은 화살통 안에 남겨 두셨다.
해마다 그래왔듯이 그 해 겨울, 그러니까 이듬해 봄이 오기 전에 사냥이 있었다. 유소는 그 날 숲에서 죽었다. 죽은 아린 여자 옆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사제들이 유소의 시신을 수습하려 했을 때 아린 여자와 유소의 시신은 사라지고 없었다. 왕께서 메고 계신 화살통에는 여전히 화살 하나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