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우 제사장은 일생동안 싸웠다. 사제들의 권력을 지켜내려 왕가와 싸웠고 마라왕의 사후에는 마니족과 싸웠다. 마라왕의 장례식을 왕의 장례식보다 격을 낮춰 치름으로써 마라왕이 바니타스 왕비의 아들이 아니라 아우라 사제의 아들이심을 분명히 했다. 장례 후 자금우 제사장은 곧바로 가뭄과 직면해야 했다. 왕궁과 신전의 창고는 카마 왕비께서 불태우신 후로 거의 비어 있었고 마을의 창고도 곧 바닥났다. ‘사냥에 성공했어야 했다’고 제사장은 중얼거렸다. 아린을 사냥하여 기우제를 지내려 했지만 사제들은 사냥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겨우 나간 사냥에서 아린 몇을 잡았을 뿐이다. 제사장은 아린의 고기를 사제들에게 먹였다. 신전 안에도 식량이 별로 없었다.
시절이 어려울수록 괴소문은 빨리 퍼지는 법이다. 마니족은 이 모든 게 제사장 때문이라고 했다. 왕의 탓을 했던 자들은 제사장 탓도 할 수 있는 법이다. 왕께서 서거하신 것도 사냥이 실패한 것도 가뭄이 닥친 것도 다 제사장 때문이라고 했다.
“마니들은 책임지기 싫어하지. 자기네들은 늘 순결한 피해자일 뿐이야. 아무 잘못 없이 불 쌍하게 신께 벌을 받고 있다고만 믿어. 모든 책임은 다 왕께 전가하고. 왕이 없으면 사제에게 돌리고. 다 왕이, 사제들이 잘못해서 신이 노하신 것이니 ‘그들’이 책임지라는 거지. 그러라고 존재하는 게 왕이고 사제니까. 왕과 사제들은 마니족이 신께 바친 산 제물이니까.”
자금우 제사장은 마니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마니들의 불만을 무마시키는 방법은 숲을 정벌하여 마니들에게 새로운 농토를 주는 방법뿐이라고 고집스럽게 주장했다. 급기야는 숲에 불을 지르자고 까지 했다.
“숲에 불을 놓았다가 바람이 역방향으로 불어 불이 마니족 영토에 옮겨 붙으면 어쩌려고 하십니까? 지금 날씨도 건조하고 불을 끌 물도 없는데.”
“신께서 마니족을 지켜주실 테니 걱정 말게.”
“지금 제사장님께서 하실 일은 숲에 집착하시는 걸 그만 두시고 직접 제단에 올라가시는 겁니다.”
사제들도 제사장을 신께 산 제물로 바친 것이다. 제사장은 마른 입술을 꽉 깨문다. 그 날 제사장은 홀로 숲으로 흰사슴을 몰았다. 숲 어귀 거대한 나무들 앞에서 제사장은 숨을 삼켰다. 그리고 마른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숲으로 던졌다. 마니족의 말라붙은 황토빛 농토와 대비되는 짙푸른 나무에 불이 붙는다. 나무 타는 냄새가 제사장의 콧속으로 훅 들어온다. 불길이 나무를 감아 오른다. 제사장은 나무가 타는 것을 바라본다. 한 그루, 두 그루, 제사장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제사장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는다. 세 그루, 네 그루……. 제사장의 웃음이 경련으로 바뀐다. 빗방울이 제사장의 어깨를 내려친다. 후둑 후두둑 쏴아. 하늘이 밤처럼 어두워지고 빗줄기가 굵어졌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불은 어느새 사그라들었다. 제사장 바로 앞에 있던 나무에 벼락이 내리쳤다. 제사장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폭우가 쏟아진다. 신전으로 돌아가니 사제들이 모두들 창가에 붙어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다. 제사장은 젖은 옷자락을 끌며 방으로 돌아갔다. 신께서 이기셨다.
마니족의 희망은 곧 절망으로 변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집밖으로 나가기도 어려웠다. 농토는 거의 물에 잠겼다. 집안까지 물이 새어 들어왔다. 햇빛이 나지 않았다. 바람소리가 신음소리인 듯 비명인 듯 마니족의 마을을 휘감아 돌았다. 가축들이 물에 떠내려갔다. 비바람이 마니족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파괴했다. 사제들은 굳게 잠긴 제사장의 방문을 두드렸다. 며칠 뒤 예복을 갖춰 입은 제사장이 문을 열었다.
“모크샤 왕자를 모셔 오라.”
제사장은 왕자를 안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신전 밖으로 향했다. 제단은 거의 물에 잠겨 있었다. 빗줄기가 채찍처럼 제사장을 쳤다. 제사장은 비를 맞으며 아직 아기였던 모크샤 왕자를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신이시여, 왕자를 제물로 바칩니다. 세상 모든 것들과 왕자의 생명은 신께 달려 있습니다.”
모질게도 제사장은 왕자를 비바람 속에서 제단 위에 올려 두고 등을 돌려 신전으로 돌아갔다. 천둥번개가 쳤다. 아기 왕자가 자지러지게 울었다. 아기의 입속으로 빗물이 들이쳤다. 아기가 발버둥치며 더 크게 울었다. 악을 쓰며 울던 아기가 제풀에 지칠 때쯤 비가 그쳤다.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왔다. 그제서야 제사장은 왕자를 제단에서 안아 올렸다. 아기의 눈과 제사장의 눈이 마주쳤다. 옹알이만 하시던 왕자께서 제사장을 보시며 또렷하게 말씀하셨다.
“신께서 너를 다스리실 것이다.”
“신께서 저를 다스리실 테니 왕자께서는 마니족을 다스리십시오.”
모크샤 왕자께서 왕위에 올라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마라왕의 장례를 다시 치르신 것이었다.
“죄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는 건 예에 맞지 않다. 나는 왕의 아들이다.”
왕께서는 사제들에게 분명하게 하대를 하셨다. 카르마왕과 유소를 반씩 닮으셨던 마라왕과 달리 모크샤왕께서는 카르마왕쪽에 가까우셨다. 아무리 사제들 손에서 자랐어도 왕은 왕이라고 제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선왕의 장례를 다시 치를 수는 있지만 아우라 사제에 대한 처벌은 유효합니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선대 제사장도 아우라에 대한 감독 책임을 물어 사후 처벌하라.”
한 마디도 지지 않는다. 이번에는 한 수 접고 들어가도 되겠지. 나중에 승기를 잡으려면 지금은 한 발 물러서는 것도 방법이다. 제사장은 더 이상의 조건 없이 선왕의 장례를 다시 치른다. 금실로 수놓인 검은 옷을 입으신 선왕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왕의 장례를 지켜 보셨다. 장례식 내내 왕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으셨다.
외로우셨던 걸까. 장례가 끝나자마자 왕께서는 왕비를 맞아 들이셨다. 누구라도 상관없으셨던 걸까. 왕께서는 결혼의 신이신 라밀하나신을 모시는 사제들이 정해 준 여자와 혼인하셨다. ‘두카’라는 여자였다. 초야에 왕께서는 왕비께 “나는 사제들 속에서만 자라서 다정하지 못 합니다. 그러니 내 아내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마니족의 왕비가 되었다고 생각해야만 할 겁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왕비께서는 그저 왕을 끌어안으시며 “이래도요?”하셨을 뿐이셨다.
혼인하신 후에 왕께서는 재위 중에는 아린 사냥이 없을 거라고 선언하셨다. 사냥을 금지하신 왕께서는 이따금 홀로 활도 화살도 없이 숲에 다녀오시곤 하셨다. 숲에 다녀오신 왕은 언제나 말씀이 없으셨다. 왕비께서는 그저 “왕비나 아내가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게지요”라고 하셨을 뿐 말씀이 없으셨다. 제사장은 어느 날 숲에 가시는 왕을 미행했다. 눈빛이 형형하고 언제나 냉정해 보이셨던 왕께서는 아린여자의 품에 아이처럼 안겨 계셨다. “어머니.”왕께서는 그 아린 여자를 그렇게 부르셨다. 아린 여자의 얼굴은 어딘지 카마 선왕비를 닮았다. 다시 자세히 보니 바니타스 선왕비를 닮은 듯도 했고 다시 보니 아우라 사제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다시 보니 이번에는 두카 왕비를 닮은 듯도 했다.
“어머니, 언젠가 꼭 다시 돌아올게요, 어머니.”
아린 여자의 품에 안겨 왕께서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계셨다. 제사장은 천천히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화살이 정확하게 아린 여자의 이마 한가운데를 궤뚫었다. 아린 여자의 피가 흘러내렸다.
“어머니! 어머니!”
신전으로 돌아온 제사장은 사제들에게 말했다.
“왕은 미쳤다.”
그 날, 두카 왕비는 아기를 잉태하셨다. 그 아기가 마니족의 공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