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화는 젊은 왕의 자신만만하고 패기 넘치는 얼굴을 한 동안 바라보았다. 왕께서는 즉위식 후 신전이나 궁에 계시는 시간보다 마을들을 돌아보시는 때가 더 많으셨다. 왕께서는 사제들이 마니들을 선동하지 못 하도록 마니들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하셨다. 왕께서는 직점 마니족과 농사를 지으시며 신께 제사를 지내셨다. 그리고 틈틈이 민간에서 아비드야 왕과 라가 왕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셨다. 마니들의 기억 속에서 아비드야 왕은 숲에서 오신 신의 화신에서 특이하게 생겼을 뿐인 마니로, 결혼하지 않고 동거를 한 음탕한 자로, 사제들을 죽인 살인마로 변해가셨다. 허리가 가늘고 발놀림이 날랬던 라가 왕비는 평범한 농가의 딸에서 방탕한 여자로 전락하셨고 가족을 연좌로 몰살시킨 여자였다. 모두 사제들이 ‘교육’이란 이름으로 마니들을 세뇌시킨 결과였다. 사바 왕께서는 그것들을 모두 유소에게 기록하게 하셨다. 왕께서는 강을 따라 마니족의 평야를 구석구석 순방하셨다. 흙을 만져보시고 나무와 돌을 관찰하셨다. 관찰하신 내용들 역시 유소를 시켜 꼼꼼히 기록하셨다.
“강가의 충적토는 굉장히 기름지군요.”
“그렇습니다. 왕이시여, 그러나 강가에서만 농사와 주거가 이루어진다는 게 문제입니다. 너른 땅이 놀고 있습니다.”
“진수화 제사장께서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 수 있다고 보십니까?”
“수로를 만들어 평야 깊은 곳까지 강줄기를 끌어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강의 신, 그러니까 미르혼 여신을 섬기는 사제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각오는 해 두어야 겠지요. 유소, 궁으로 돌아가면 마니족이 사는 땅의 지도를 작성하도록 하라. 최대한 세세하게.”
유소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서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했다. 왕께서는 유소를 쏘아보시다가 눈길을 거두셨다. 왕을 보필하면서 유소는 곧잘 먼 곳을 아련히 바라보곤 했다.
“유소, 누군가를 찾고 있지. 그렇지 않은가?”
갑작스러운 왕의 질문에 유소의 눈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누구를 찾고 있느냐?”
유소에게 물으시기는 하지만 왕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투셨다.
“왕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고 유소가 생각하는 건가?”
“왕이시여, 이러지 마십시오.”
“왜 내가 알면 안 된다는 건가?”
“왕이시여, 아니 되십니다.”
유소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유소의 감정이 그렇게 동요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왕께서는 음산하게 웃으셨다. 소름이 돋을 만한 웃음소리였다.
궁으로 돌아오신 왕은 제일 먼저 지도 제작에 착수하셨다.
“신의 초상을 그린다는 생각으로 경건하게, 또한 조금의 왜곡이나 누락도 없이 하십시오.”
왕께서는 현지답사를 명목으로 원리주의자 사제들을 궁에서 먼 마을로 보내셨다. 물론 온건하거나 중도적인 사제들도 적당히 섞으셨다. 왕께서 직접 작성하신 명단을 보고 진수화는 탄복했다. 사제들의 성향을 완벽하게 파악하셔야만 나올 수 있는 명단이었다. 그렇게 원리주의자 사제들을 신전에서 내보내신 후 왕께서는 곧바로 선왕과 선왕비의 추숭을 서두르셨다. 일들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진행되었다. 성격이 조급하셨던 건가, 마음이 급하셨던 걸까, 사제들이 의논하고 뭐하고 할 시간을 주지 않으시려는 의도셨을까. 이른 죽음을 예견하시고 서두르셨던 걸까. 그러나 왕의 심중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진수화는 즉시 신전 안에 있던 모든 사제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다시 지루한 회의가 시작되었다. 서로 같은 말만 계속 반복했다.
“추숭 문제를 논의합시다. 그들이 무엇을 했건 현재 왕의 부모시니, 신께서 인정하신다면 추숭을 하는 게 옳습니다.”
“신께서는 자비로우시면서 또한 가혹하시기도 합니다. 진수화 제사장, 신께서는 신을 모독한 자들과 그들을 두둔하는 사제를 용서치 않으실 겁니다.”
“모든 것은 저와 왕이 감당합니다. 그러니 신의 승인을 받는 데에는 신의 뜻만 있도록 하십시오. 만약 사제가 신의 뜻을 일부러 잘못 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신께서 진노하실 일입니다.”
회의를 마치고 진수화의 뒤를 따르던 유소가 조용히 물었다.
“모든 것을 감당하시겠다는 것은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십니까? ‘모든 것’이라는 말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유소, 나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없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십니까.”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자라왔네.”
“그렇다면 신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네.”
“신에 대한 외경 없이 어떻게 신을 믿으십니까?”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믿네. 아니면, 신을 믿지 않는지도 모르지.”
유소는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진수화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유소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고 진수화도 자기 방으로 돌아가 방문을 잠갔다. 창문을 열었다. 저 멀리 숲이 보였다. 진수화는 창틀에 기대어 숲을 보았다.
‘범우형 님, 그까짓 게 뭐라고, 아비드야와 라가라는 두 마니에게 왕과 왕비 칭호를 주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목숨을 바치셨습니까. 정작 그 두 분은 그냥 숲에서 마음대로 살길 원하셨는데.’
진수화의 눈에 환영이 보였다. 범우형이 흰사슴을 타고 숲으로 가고 있다. 놀라서 다시 보았다. 범우형이 아니다. 사제의 흰 옷을 입은 유소다. 이 밤중에 무슨 일로 혼자 숲에……?
아침은 숲에서부터 온다. 밤은 숲에서부터 걷힌다. 숲의 새벽이 옅어지면 신전의 아침이 밝아온다. 아침이 오기 직전, 새벽과 아침의 경계쯤에 사제들이 일어난다. 아침명상. 기도. 아침 식사 자리에 유소가 보였다.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식사 후에 진수화가 유소를 식당 구석으로 불렀다.
“복도 끝에서 네 번째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왼쪽 벽을 조금 밀면 벽이 열리면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일 것이네. 그 계단으로 내려가면 문이 있을 것이네. 그 문을 열면 예복이 걸려 있을 것이네. 그것을 가져다 왕께 드리게.”
찬 물에 몸을 씻으면서 진수화는 기도를 했다.
‘역사의 신이신 페아시테 신이시여, 정의를 판결하시는 투란실카 신이시여, 카르마왕을 내신 드미트에 신과 하타 신이시여, 카르마왕을 인정하신 아샤루카타이 신이시여, 사바 왕의 편에 서 주소서. 저를 제사장이 되게 하시고 사바 왕을 왕이 되게 하셨던 신들께서 다음 단계도 이루어주소서.’
이 기도도 ‘진심’이 아니었다. 기도가 아니라 통보일 뿐이었다. 신께서 도와주시지 않더라도 혼자 알아서 할 테니 좋게 협조하시라는 투였다.
저녁이 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진수화도 왕도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명상만 했다. 갑자기 신전이 소란스러워졌다.
“흰사슴이다!”
“숲에서 궁궐 쪽으로 흰사슴이 오고 있다!”
숲에서부터 궁궐 쪽으로 흰사슴 한 쌍이 달려오고 있었다. 빠른 속도였다. 마치 날아오는 것 같았다. 눈부시게 하얀 털이 저녁노을 속에서도 제 빛을 발했다. 숫사슴의 뿔은 다른 흰사슴의 두세 배는 될 법했고 뿔이 이리저리 휘고 꺾이며 자라있었다. 몸집이 작은 암사슴은 바람처럼 빠르고 가벼웠다. 후에 전해 듣기로는 왕께서 그 때 방 안에서 창문을 열고 그 흰사슴들에게 활을 겨누셨다고 했다. 유소가 왕을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쏘셨을 것이다. 흰사슴들은 궁궐 안을 마구 휘젓고 정원을 짓밟고 다녔다. 진수화가 흰사슴들 앞으로 나섰다. 암사슴이 앞다리를 들었다.
“제가 한 행동 중 어떤 것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저는 아비드야 왕께 왕의 검을 건네 드렸습니다. 라가 왕비를 보살폈고 또한 감시했으며 배신도 했습니다. 사바 왕을 궁궐에서 내보내지 않았고 왕을 훈육했습니다. 사바 왕의 적이자 협력자입니다. 무엇을 기억하시고 무엇을 망각하시겠습니까.”
암사슴이 앞다리를 내렸다. 진수화의 말에 마음이 움직인 것인지 때마침 나타나신 사바왕을 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흰사슴들은 왕에게 다가가 핥고 몸을 부볐다. 검은 바탕에 금실로 무늬를 수놓은 예복을 입으신 왕은 흰사슴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셨다.
“숲에서 온 존재는, 숲으로 돌아가라.”
왕께서 흰사슴들에게 명령하셨다. 숫사슴이 왕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등에 타시라는 것이다. 같이 숲으로 가자는 뜻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자랐다. 숲으로 가지 않겠다.”
숫사슴이 일어났다. 흰사슴들은 그 후로도 한참동안 왕의 곁을 떠나지 않다가 조용히 궁을 떠나 숲으로 돌아갔다.
“아비드야왕과 라가 왕비께서 오셨다가 가셨습니다. 신께서 되살리신 겁니다.”
유소가 멀어져가는 흰사슴들을 바라보며 찬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매혹적이면서도 위엄있고 듣는 이를 강하게 지배하는 목소리였다. 찬가와 문학의 신이신 라누트 신께서 유소의 목소리를 빌려 노래하시는 듯 했다.
“라 칸타밀레 아비드야 칸타 키 마니 루 샤니 라가. 위에 무야 문타단디살레 루야 포미헤 루야 루크라티타카투야사 살리투르타칸…….”
아비드야왕과 라가왕비의 일생을 읊은 라탄 조의 서사시였다. 저 찬가에 사제들이 한 일, 진수화가 한 일도 담겨 있겠지. 신성하면서도 마력이 넘쳐흘렀다. 신께서 유소의 입을 통하신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고 불가능한 음색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왕께서 엄숙히 말씀하셨다.
“신의 뜻을 보셨으니, 더 이상 이견 없이 추숭을 진행하십시오.”
추숭은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지도제작도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이제 사제들도 어느 정도 정리된 듯 하니 지도가 다 만들어지는 대로 경지 정리와 수로 정비를 하고 시비법을 개발하고 농기구를 개량할 것입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진수화 제사장님께서는 더 분발하십시오. 추숭 문제부터 지도제작까지 제사장님께서 한 일이 별로 없으십니다. 늘 제게 부족하다 부족하다 하시더니, 이제 보니 부족한 사제가 양육하여 제가 부족했던가 봅니다.”
“왕이시여, 그 전에 먼저 하실 일이 있습니다.”
“‘신의 뜻’이라는 말 밖에는 한 줄 모르는 사제들과 또 그 지겨운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것 쯤은 압니다.”
“아닙니다. 왕비를 맞이하십시오. 마니들은 왕과 왕비의 결합을 완전함과 풍요와 안정으로 받아들입니다. 왕비를 맞이하시면 마니들의 지지도 얻으시고 사제들도 잠시라도 누그러질 겁니다. 그 사이에 일을 추진하십시오.”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저는 ‘이데아’라는 여자를 원한다 하였습니다.”
유소는 왕의 뒤에서 아무 표정 없이 서 있었다.
“왕이시여, 앞으로 여러 일들을 추진하시려면 혼인 문제는 신의 뜻을 따라 주십시오.”
“신의 뜻이 라니라 사제들의 뜻이겠지요. 죽을 때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지내야만 하는 왕비를 사제들 멋대로 정해서 왕에게 짝지어줄 테니 알아서 적응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사제들은 아샤루카타이신께서 원하지 않으시던 아이리토우 여신을 강제로 아내로 맞이하시자 결혼의 신이신 라밀하나 여신을 벌하신 신화의 교훈은 무시하나 봅니다. 지금 제가 한 말을 사제들 앞에서 하십시오.”
“왕이시여,”
“진수화 제사장님, 약속을 이런 식으로 어기시면 곤란하십니다. 이러시면 저도 약속을 깨고 제사장님을 강등시키거나 추방할 것입니다. 아마 다른 사제들도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왕이시여, 저는 계파도 없고 아직 사제들 사이에서 입지도 굳지 않습니다. 왕께서 계획하 신 일을 추진하시려면 사제들과 마니들의 협조가 필수적입니다. 그들이 협조를 한 후에야 제가 왕을 도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협력을 얻기 위해서는 라밀하나 신께서 점지하신 여자와 혼인하셔야 합니다. 선왕과 선왕비의 동거를 상기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뒤에서 손 쓸 정도 능력도 없으십니까?”
진수화의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을 실행에 옮겨야 할까.
“왕비로는 아니지만 그 여자를 궁에 둘 수는 있습니다. 왕궁 안 아무도 모르는 곳, 선왕비께서 유폐되셨던 곳에 그 여자를 감금하고 왕께서만 그 곳에 드나드실 수는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유소가 고개를 들고 명료한 말투로 말했다.
“왕비 외에 다른 여자라니요. 신성한 결혼의 신이신 라밀하나 신을 모독하지 마십시오.”
왕께서는 유소의 어깨를 두드리시며 크게 웃으셨다.
“그래서 정식 결혼은 신께서 정하신 여자와 하지 않느냐. 그리고 라밀하나 여신이 정말로 결혼의 신이시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내가 원한 여자를 왕비로 들이셔야 하지 않는가.”
유소가 왕의 눈을 똑바로 보았던 것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어조가 단단하고 무거웠다.
“왕께서는 이데아라는 여자를 진정으로 원하시고 사랑하시는 게 아닙니다. 그 여자를 소유 하시고, 곁에 두고 감시하고 싶으신 겁니다.”
왕께서는 웃음을 거두지 않으신 채 유소에게 얼굴을 바짝 갖다 대셨다.
“살다 보니 사제에게 ‘사랑’이란 말도 다 듣는군 그래. 더군다나 신실하신 유소 사제에게서. 그런데, 사랑이건 소유건 내가 왜 이러는지는 유소 자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
유소는 입을 꽉 다문 채 한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더니 왕께 간단하게 인사드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진수화도 유소를 따라 나갔다. 유소는 복도 한 가운데에 그냥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유소, 무슨 일이 있는가.”
유소는 진수화를 돌아보더니 말에 힘을 실어 말했다.
“제사장님께서는 그 여자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왕궁 한 구석에 격리되어서 평생 숨죽이고 갇혀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모르시는 겁니까?”
진수화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내가 그 여자를 신경 쓸 이유는 없네.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고.”
며칠 후, 안개가 짙게 끼었던 날 새벽, 유소는 이데아를 데려 왔다. 눈이 크고 눈동자가 짙은 여자였다. 얼굴 생김이 아린과 비슷한 느낌을 풍겼다. 그 여자는 라가 왕비께서 유폐되셨던 곳. 신전 안 가장 깊은 곳에 라가 왕비처럼 유폐되었다. 얼마 후 이상스럽게 태양볕이 뜨겁고 무더웠던 날, 라밀하나 여신을 모시는 사제들이 왕비가 될 여자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바로 성대한 결혼식이 열렸다. 폴리테이아 왕비는 눈매가 매섭고 머리카락이 직모였다.
‘라밀하나 여신께서 왕의 아내가 아니라 마니족의 왕비를 주셨구나.’
이상하게 더웠던 그 결혼식에서 왕과 왕비는 화려한 붉은 옷을 입고 계셨다. 왕과 왕비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마니들처럼 활짝 웃으셨다. 그 웃음은 공허했다. 횃불과 음악과 향기와 화려한 옷과 술과 기름진 음식에 가려서 그 공허함은 잘 보이지 않았다. 유소는 언제부터인지 결혼식장에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