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족의 6대왕 카루나-1

17년 6월

카루나 왕자께서는 아무도 도와준 이가 없는데도 혼자서는 나올 수 없는 곳에서 어느 날 사라지셨다. 그리고 몇 년 후 마을의 한 농가에서 발견되셨다. 카루나왕자를 양육하고 있던 부부는 그가 자기네 부부가 낳은 아이라고 주장했고 왕자께서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시고 그 부부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이는 분명히 아니디아왕과 아포리아왕비의 아드님이신 카루나왕자셨다. 왕자는 궁으로 돌아오셨고 부부는 살해당했고 그들이 살던 집은 소각되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친부모를 잃으시고 휘장 뒤에 유기되셨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마을에서 발견되시고 양부모가 죽임을 당하고 그 후에 카루나 왕자께서는 말을 하실 수 있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왕께서 나이가 차서 왕위에 올라 가장 먼저 하신 일은 폴리테이아 조왕비를 끌어내려 죽이신 일이었다. 조왕비께서는 카루나왕을 다시 유폐시키려 하셨지만 폴리테이아 조왕비께 충성하던 사제들은 새로운 왕의 손짓에 따라 조왕비를 죽였다. 어차피 언젠가 카루나왕께서 마니족을 다스리실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조왕비의 시신은 조왕비께서 설계하시고 공사를 지휘하셨던 도로 위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마니들에게 모욕당했다. 마니들에게 조왕비는 무리한 세금을 걷어가고 농번기에도 마니들을 도로 공사에 동원한 폭군일 뿐이었다.

 

왕께서는 왕궁을 떠나 마을을 돌아다니시며 평범한 마니의 옷을 입고 마니들이 늘 먹는 음식을 드시고 마니들과 어울려 농사를 지으셨다. 왕께서는 바람이 구름을 흘려보내듯 시간을 흘려보내셨다. 그리고 평범한 농사꾼 처녀 중 하나를 아무렇게나 지목하시어 왕비로 들이셨다. 어느 누가 왕명을 거역할 수 있었을까. 평범하기 그지없던 마을처녀였던 데모스께서는 하루아침에 왕비가 되셔야 했다. 외로운 궁중 생활에 단 하나 기댈 만한 곳은 남편인 왕 밖에 없었지만 왕도 왕비에게 냉담하고 무심하셨다. 왕비께서는 왕께 눈물로 애원도 하시고 여느 아내들처럼 투정도 부려 보셨지만 왕께서는 여전히 아무 감정 없이 목석 대하듯 왕비를 대하실 뿐이었다. 그나마 궁에 갇혀 살지 않고 마을에서 농사지으며 지낼 수 있다는 게 왕비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숨이 막혀 살 수 없으셨을 것이다.

 

왕께서는 궁에 머물지 않으시고 마을을 떠돌며 마니들과 섞여 묵묵히 농사만 지으셨다. 무엇이 왕에게서 말을 빼앗아 갔을까. 왕께서는 얼마나 많은 말들을 속으로 삭히셨을까. 왕의 속을 헤아리기에 왕비는 너무나 평범한 여자였다. 그런 왕비를 택하신 것은 왕께서 스스로에게 내리신 벌이었을까.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겠다는 선언같은 것이었을까. 왕께서는 왕비께서 눈빛만으로도 왕의 의중을 읽으실 수 있기를, 왕을 품 안에 안아주시기만을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셨던 걸까.

 

왕비께서는 남편에게서 얻을 수 없는 정서적 만족을 아이에게서 얻기를 원하셨다. 아이에게 애정을 쏟음으로 해서 남편에게 받지 못 한 애정을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셨다. 아이가 태어나면 왕도 달라지리라 믿으셨다. 아이를 갖고 싶다는 왕비의 간청에 왕께서는 여전히 그 목석같은 태도로 왕비를 안으셨다. 왕비께서는 자신이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는지 벗은 몸을 거울에 비추어 보셨다. 왕비는 왕 앞에서 대성통곡하며 사랑 없는 결혼을 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셨지만 왕께서는 자손을 두어야 하는 의무만 다 하시고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리셨다. 왕에 대한 왕비의 감정은 원한으로 변해갔다.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왕을 기다리던 새색시가 지치고 추하고 독기품은 여편네로 변해가는 동안에도 왕께서는 시종일관 무덤덤한 태도로 일관하셨다. 왕비께서 왕자를 품으셨다는 소식에도 감정변화 없이 농사에만 열중하셨다.

 

왕자께서 태어나셨지만 왕께서는 왕자에게 ‘아나트만’이라는 이름만 지어주셨을 뿐 왕자와 눈 한 번 맞추지 않으셨다. 왕비께서는 지독한 산후 우울증에 시달리셨다. 왕은 왕비와 왕자를 격리시키셨다. 왕자께서는 외가에서 사촌들과 똑같이 자라셨다. 왕자께서 채 돌이 되시기도 전에 왕비께서 일방적으로 격한 감정을 토해내시던 언쟁 끝에 왕비께서는 왕을 죽이셨다. 왕께서는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왕비의 손에 죽어 주셨다. 왕께서는 유언 한 마디 남기지 않으셨다. 허망한 생애였다. 그 짧은 생애를 살다 가시면서 하지 못 하셨거나 하지 않으셨던 말씀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끝까지 부인하셨다면 궁을 떠나 재혼하여 행복하게 사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왕비께서는 왕을 시해했음을 고백하시고 사형당하셨다. 카루나왕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는 화려한 수레에 실려 마니족의 마을 곳곳을 순회했다. 폴리테이아 왕비께서 닦으시고 그 시신이 모욕당했던 그 길이었다. 정해진 세금만 걷으시고 몸소 마니들과 어울려 농사를 지으셨던 카루나왕은 마니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왕의 유골함이 지나갈 때마다 마니들은 진심으로 애도했다. 왕의 재는 들판에 뿌려졌다. 외가에 맡겨졌던 아나트만 왕자는 궁으로 돌아오셨다. 말씀 한 마디 하지 않으셨던 그 시간들, 나중에는 아내가 자신을 죽이기까지, 그 외로운 시간들을 왕께서는 혼자 어떻게 견뎌내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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