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족의 5대 왕 아니디아-7

17년 6월

기도를 마치신 아니디아왕은 “유소는 내 어머니를 사랑했을까?”라고 물으셨다. 그리고서 “어머니는 아타를 사랑하셨던 것 같아. 유소가 사랑했으니까.”라고 덧붙이셨다. 아니디아왕은 왕비의 손을 잡고 숲 속에서 유소가 다였다던 곳을 되밟으셨다. 왕비는 유향나무 아래에서 산통을 느끼셨고 아찔한 유향꽃 향기에 취해서 카루나 왕자를 낳으셨다. 왕께서는 왕자를 품에 안고 계속 울기만 하셨다. 왕자께서 자기 얼굴에 떨어진 왕의 눈물을 맛보셨다. 왕비께서 왕에게 속삭이셨다.

‘사랑해.

“아포리아, 나는 내 아버지가 날 사랑하신 게 틀림없다고, 그냥 그렇게 믿기로 했어. 틀림 없이 날 사랑하셨을 거라고, 내가 유소의 자식이건 선왕의 자식이건 아버지는 분명히 날 사랑하셨을 거라고, 내가 우리 아이를 사랑하듯이. 그렇게 믿기로 했어.

왕자께서는 유향꽃을 엮어 만든 꽃목걸이를 걸고, 왕비의 품에 안겨 마니족의 축하를 받으며 궁으로 돌아오셨다. 그러나 궁 안은 왕자께 냉랭했다. 숲에서 태어난 아기는 사제들을 죽인 아비드야왕, 음산하고 냉혹하셨던 사바왕을 연상시켰다. 아비드야왕은 숲에서 오셨고, 사바왕은 인어의 호수에서 태어나셨다. 마니족이 숲에서 살던 시절 섬기던 유향나무 아래에서 태어나신 왕자였다. 왕께서는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는 축제에서 여전히 사제들에게 아린사냥을 하지 못 하도록 명하셨다. 제물은 아린 대신 흰사슴과 곡식으로 대신케 하셨다. 왕께서는 사제들에게 아린 사냥 대신 농경, 예술, 학문 등에 매진하도록 하셨다. 아니디아왕의 재위 기간은 마니족 문화의 황금기였다. 여러 농기구가 개량되었고 새로운 농사 기술이 개발되었다. 각 분야의 이론이 정립되고 집대성되었다. 민간에서는 속요가, 신전에서는 찬가가 울려 퍼졌다. 마니족의 옷은 풍성하고 화려해졌다. 섬려한 조각이 발달했다. 각 지방마다 신전을 세우고 신상을 조각했다. 마니족이 신께 엎드려 기도했다. 마니족을 영원히 보호해 달라고.

 

아린 사냥을 금지해도 아린은 단 한 번도 마니족의 땅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마니족의 일상은 지극히 평온했다. 그러나 사제들과 마니족은 이 평온을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으로 인식했다. 마니들은 왕에게 아린족을 확실하게 몰살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도 아니디아왕 초기에는 학살이 없었다. 왕권은 강력했고 왕께서 늘 왕비님과 아기 왕자님을 데리고 다니셨다. 마니족은 아이들을 좋아했다. 집안에 아이는 많을수록 좋고 지나가는 아이를 보면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어 줘야 했다. 예외는 있었다. 불륜으로 태어 난 아이는 마을에서 철저하게 버림받고, 다른 집 아이를 우리 집 아이로 받아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왕께서 정식 결혼하여 낳으신 왕자는 마니족의 희망이고 미래이며 신의 약속이었다. 왕께서 아기 왕자를 데리고 다니시는 동안은 마니족이 한 뜻으로 왕을 지지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일이 일어났다. 그냥 하나의 사건 정도로 처리될 수 있었던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숲과의 경계에 위치한 마을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단순한 치정 살인이었다. 남녀가 여자의 집에서 불륜을 벌이던 중 갑자기 여자의 남편이 돌아왔다. 현장을 목격한 남편이 격분해서 두 남녀를 죽이려고 부엌칼을 들고 날뛰다가 남자가 엉겁결에 칼을 빼앗아 남편을 찔러 죽였다. 한밤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두 남녀는 살인을 감추기 위해 시체를 토막내어 숲 근처에 파묻었다. 얼마 후 썩어가는 시체가 발견되었다. 조사받던 여자는 아린이 남편을 죽였다고 둘러댔다. 조금만 더 조사했으면 그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아린이 죽였다’는 한 마디에 아린 사냥의 구실을 찾고 있던 사제들은 광분했다. 토막난 시체는 인어에게 갈가리 찢겨 서거하셨던 아사리왕을 연상시켰다. 마니족은 아니디아왕께서 얼마나 수확량을 증가시키셨으며, 얼마나 마니족의 몸치장이 화려해졌는지를 잊고 왕께서 아린 사냥을 금하셨다는 것만 기억했다. 왕께서는 폴리테이아 선왕비를 찾아가셨다.

“왕위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아린 학살을 막아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는 아포리아와 카루나를 데리고 멀리 떠나서 평범한 마니로 살겠습니다.

“카루나 왕자를 제게 남겨 주시면 그리하겠습니다. 어차피 왕자가 없어지면 사제들이 어떻게 해서든 왕자를 찾아낼 게 아닙니까. 왕자는 왕위를 잇도록 여기 두십시오.

왕비께서 왕자를 꼭 끌어안으셨다.

“아이를 부모에게서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 건 심장이 없는 자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이데아도 아들을 포기했지요. 사바왕의 명으로요.

“그래서 제가 제 아들을 선왕비님께 보낼 수 없는 겁니다!

사바왕은 아니디아를 자식으로 사랑하셨을까. 생모에게서 떼내어 왕자에게 전혀 애정이 없는 왕비의 아들로 들이셔야만 했을까. 사바왕은 아니디아 왕자를 위해 이데아를 아내로 대해주실 수는 없으셨을까.

“그럼 할 수 없습니다. 저도 사제와 마니들을 더는 막을 수 없습니다.

반란이 일어났다. 선왕비가 뒤에서 사제들을 부추겼다고는 하지만, 아무도 알 수 없다. 누가 쏘았는지 모르는 화살이 왕비에게 날아왔다. 왕비께서는 카루나 왕자를 안으신 채로 서거하셨다. 아기가 귀가 찢어지도록 울어댔다. 왕께서 아기를 안으시려 하는 순간 화살이 왕의 등에 박혔다. 신전의 문이 열리고, 흰사슴을 탄 사제들이 숲을 향해 달려나갔다. 폴리테이아 선왕비께서는 울고 있는 왕자를 안고 왕좌로 향하셨다.

“담당자에게 시체들을 좀 치우라고 하라.

카루나 왕자의 얼굴에는 이데아를 닮은 아니디아 왕과, 아포리아 왕비의 얼굴이 인장처럼 남아 있었다.

‘이데아, 당신과 나 사이의 기묘한 인연은 이렇게 끝났어. 내가 약속을 파기했어.

 

아린이 남편을 죽였다고 거짓을 말했던 여자는 사제들의 세뇌 덕에 차츰 정말로 아린이 남편을 죽였다고 믿게 되었다. 사제들이 심어준 환상대로 마니족 마을들을 돌며 아린이 어떻게 남편을 죽였는지, 아린이 얼마나 위험한 종족인지 연설을 하며 돌아다녔다. 그 여자의 불륜 상대였던, 여자의 남편을 죽였던 남자는 어느 날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었다.

아린 사냥이 시작되었다. 신전에서는 날마다 아린을 번제지내는 불길이 타올랐다. 깊은 숲속으로 도망친 아린들만 살아남았다. 아린들도 숲으로 들어 온 사제들을 죽였다. 인어가 노래했다. 많은 사제들이 죽었다. 사제들은 다른 사제들이 죽어도 그악스럽게 사냥을 했다. 더 많은 사제들이, 더 많은 아린들이 죽었다. 사제들이 죽었기 때문에 폴리테이아 선왕비께서 제사를 집전하셨다. 선왕비를 견제할 사제들이 부족했기에 종교와 정치를 양손이 쥐신 선왕비의 권력은 막강했다. 선왕비께서는 그 권력에 취하셨다. 선왕비께서는 살아남은 사제들을 자신의 친위대로 임명하셨다. 부상당한 사제들을 치료하면서 발달한 의학을 이용해서 의원을 양성하셨고, 마을마다 의원을 하나씩 파견하셨다. 마을마다 우편담당기관을 만들어서 소문이 아닌 소식이 전해지도록 하셨다. 그래도 소문이라는 것은 없어지지 않았다. 마니족의 모든 마을을 이으며 그 끝이 신전과 궁으로 향하는 도로를 설계하시고 그 공사를 지휘하셨다. 그 모든 일들이 휘몰아치듯 빠르게 진행되었다. 예산이 부족하자 세금을 거두어 들이셨다. 곡식은 추수하기가 무섭게 세금으로 실려 나갔고, 마니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농사지을 가축마저 팔아야 했다. 선왕비께서는 반대하는 마니들을 잔인하게 처형하셨다. 신전에서는 아린을 번제지내는 불길이 타올랐고, 마을에서는 선왕비께 저항한 마니들을 화형시키는 불길이 타올랐다. 아린을 사냥하던 화살은 이제 마니들에게로 향했다. 선왕비께서는 자신의 선의가 저항으로 되돌아오는 것에 분노하셨다. 선왕비께서 세금을 걷어 그 자신을 위해 사치하신 것은 없었다.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지 못 하고 마니들을 위해 사셨다. 그런데 감히 마니족이 반항하는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신을 모시는 사제로 길러졌을 아이들은 신전에서 선왕비의 친위대로 길러져 마니들을 체포하고 처형했다. 선왕비께서는 카루나 왕자를 거의 돌보지 않으셨다. 왕자는 이데아가 유폐되었던 휘장 뒤에 유기되다시피 하셨다.

 

폴리테이아 선왕비는 가끔, 만약 사바왕의 왕비가 되지 않았더라면 사랑하는 남자와 혼인하여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품에 안고 젖을 물리는 일도 해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셨다. 선왕비께서 발걸음을 옮기실 때마다 모든 마니들, 심지어 원로 사제들까지도 선왕비의 발밑에 꿇어 엎드렸다. 선왕비의 옆에서 함께 걷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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