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존재 화이팅!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시간 낭비 (작가: 정승훈, 작품정보)
리뷰어: 유이남, 19년 4월, 조회 39

며칠 전에 친구로부터 카톡을 받았습니다. 정말 놀랐습니다. 카톡의 내용이 아니라 카톡을 보냈다는 그 사실 자체로요. 그 친구는 군복무 중인 친구였거든요. 알고보니, 일과시간이 마무리된 후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장병들이 각자의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더라고요. 일부 부대에서 시범적으로 운영되던 제도인데, 올 4월부터 모든 부대로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3개월 정도 운영해 본 뒤 이를 존속시켜도 좋을지 결정한다네요. 이미 제대한 다른 친구에게 이 얘기를 해 주자 “와, 나 때만 해도 그런 거 없었는데.”라고 말하길래 부럽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미간에 주름이 쭉 잡히더니 “아니, 전혀.”라고 즉답하더군요. 군인이 아무리 좋은 대우를 받아도 민간인 신분만한 게 있냐는 말이겠죠. 결국 앞으로는 좀 더 생각하고 물어보라는 농담 섞인 핀잔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처럼 군복무에 관한 우리 사회의 시선은 대체로 부정적입니다(소설과 군복무를 연결시킬 당위성은 롬아지 님의 리뷰로 대신하겠습니다. 롬아지, 군복무에 대한 단상 – https://britg.kr/novel-review/76987/). ‘남자라면 현역이지!’라는 말이 통하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엔 ‘안 갈 수 있으면 안 가는 게 좋다’라는 이야기가 훨씬 많으니까요. 이는 물론 군대가 더욱 나빠졌기 때문이 아닐 겁니다. 제 친구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 군 장병의 대우는 오히려 예전보다 차차 나아지고 있는 편이니까요. 다만 이는 군 장병들의 인권이 존중되기 시작한 반면, 병영 내 관습과 생활상은 여전히 구세대적인 행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극적인 군 내의 사건사고가 일반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고요.(어째 같은 말을 표현만 달리해서 말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러나, 군대에 갈 일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간에, 입대를 눈 앞에 둔 사람이 느끼는 마음만 할까요. 제 친구만 하더라도 갑자기 말수가 적어지고 웃음이 없어지더라고요. 이런 마음은 소설 속에서도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것이 부러웠다. 난 그들을 시샘하고 있었다. 자신이 얻고 있는 자유가 어떻게 왜 갖고 있는지조차 모를 것 같은 사람들이 한심해보이다가도 누구보다 그들을 닮고 싶었다. 걱정과 고뇌가 사람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이유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지치게 만드는 생각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피로를 이겨낸 사람만이 성장하는 것이다. 그런 저 지나가는 인간들은 과연 그런 인간들일까? 그런 자격 있는, 어딘가 머나먼 곳에서 속박되어 있을 필요가 없는 자유민들일까? 머리가 아파졌다. 여행을 떠나는 대신 2년 동안 할 수 있을 일들이 떠올랐다. 내가 왜? 내가 왜 억지로 여행을 가야 할까? 대체 뭐 때문에? 가문이 나에게 뭘 해줬다고 이런 어이없는 일을 당해야 하는 걸까? 무언가 잘못 한 것일까? 차라리 다른 집안에서 자라났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분명히 없었을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상당히 억울해 보입니다. 자유로워 보이는 타인들을 시샘하고 비하하면서도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 합니다. 이는 물론 정당하지 않은 감정입니다. 그가 분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들은 주인공의 여행(군복무)에 관한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았거든요. 주인공에게 여행을 강요하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매질할 것이라며 으름장을 놓는 것은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너무나도 강대한 존재이므로, 주인공은 아버지에게 저항하는 대신 아무 관련 없는 타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립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을 부러워한다는 점에서, 주인공은 모순적인 양가감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은 소설의 결말에서 해소됩니다. 어머니의 메시지를 읽은 주인공은 “끝까지 읽었을 땐 이미 소맷자락이 눈물로 얼룩져있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그저 그리워졌을 뿐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주인공이 여행을 떠나기 싫어했던 이유는 그것이 ‘강요된 손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앞서 말했던 대로 주인공은 아버지가 무서운 나머지, 자신이 여행을 싫어하는 이유 중 ‘강요됨’은 교묘히 잊고 ‘손해’에만 집착하며 억울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메시지를 읽고 난 후, 주인공은 마음을 고쳐 먹습니다. 물론 ‘강요됨’과 ‘손해’라는 현실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스스로의 내면에서 ‘강요됨’을 넘어섭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는 진술을 통해 그것이 자발적인 것이 되었을 때, ‘손해’라는 것 역시 감내할 수 있는 차원의 것으로 변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통과의례란 ‘변화된 현실’ 자체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변화된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사랑과 결속이 변하지 않을 수 있음을 발견했을 때, 그로 인해 변화된 현실을 뛰어넘어 그것을 새로운 ‘나’의 안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 때야말로, 통과의례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는 게 아닐까요. 국군장병 여러분, 뿐만 아니라 저마다의 통과의례를 끌어안고 있을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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