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메시지와 환상적인 이미지, 그리고 아쉬움 공모(감상)

대상작품: 네 엄마의 이야기 (작가: 사피엔스, 작품정보)
리뷰어: 적사각, 5시간 전, 조회 9

본 리뷰는 소설 전반을 다룰 것이므로 본 작품을 읽고 리뷰를 봐주시면 감사하겠다.

또한 이번 리뷰는 필자답지 않게 제목에 관한 해석은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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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일종의 자서전이자 참회록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주인공 다선은 과거에 채아, 라는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와는 이별한 것처럼 보인다. 명주라는 딸이 있지만 그 애는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런 다선을 소설 속 인물은 물론 독자에게까지 의구심을 품게 한다. 치매가 아닌가? 하고.

 소설 후반부로 가면서 소설의 배경이 드러나서 다선이 대리모를 했었던 과거가 드러난다. 명주는 엄마를 가지기 위해 다선에게 접근한 가짜 딸이었다(그렇게 불러도 될까?). 이걸 용납하지 못한 다선은 명주와 싸우고 ‘홍이’라는 새의 도움으로 명주에게서 벗어난다. 그리고 홍이가 다선의 몸에 파고 들면서 다선은 날개를 얻고 어디론가 날아간다.

 다선이 그토록 찾던 딸, 채아는 메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채아는 진희 이모의 편지로 다선의 죽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선이 대리모였다는 것과 채아를 엄마가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채아는 붉은 새—홍이를 만나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은 대리모와 모성애를 다룬다. 현실에서도 오래 전부터 대리모가 존재했지만 생명과학이 발달하면서 보다 정교하고 안전하게 대리모 시스템이 사용되는 것 같다. 미국에서도 유명 가수가 대리모를 통해 자녀를 얻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고 실제로 유명 인사 중에서 자신 혹은 아내의 건강과 외형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리모를 통해 아이를 낳았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들었었다. 소설은 이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아이를 부모가 원하는 대로 디자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기술이 불안정한 모양이다. 유전자를 잘못 조작한 탓에 팔다리가 긴 아이가 태어나기도 하고 알비노인 아이가 태어나기도 한다. 부모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아이는 부모에게 친자식임을 부정당한다. 명주의 행동 동기다. 그의 엄마는 팔다리가 길게 태어난 아이를 자신의 딸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명주는 출생 증명서를 가지고 있는 다선에게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여성만이 경험할 수 있는 고유하고 숭고한 행위—올바른 표현인지 모르겠다—를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하면서 공포심을 유발한다. 또한 대리모라는 특수한 위치 때문에 그가 낳은 아이와의 관계 구도 때문에 극의 긴장을 팽팽하게 이어간다.

 소설은 ‘새’와 관련한 은유가 많다. 다선이 채아를 천사라고 부른 것도 그것의 일환으로 보인다. 보통 천사하면 날개를 가졌고 새는 날개를 가졌다. 그러니까 채아는 다선에게 천사이자 새인 것이다. ‘새’는 ‘홍이’가 등장하면서 더욱 구체성을 가진다. 붉은 새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초반부에 등장하는 다선의 하혈과 이어진다. 가마우지, 라는 표현이 있는데 홍이가 실은 이때 낳은 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는 홍이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니면 다선에게만 보이는지 헷갈렸다. 다선 혼자 있을 때만 등장하다가 명주를 습격한 걸 보면 실제로 있는 것 같다. 소설 말미에 채아=메이에게 등장한 걸 보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하필 새일까? 이것은 ‘강아지똥’ 이야기를 할 때 다선의 꿈과 연결된다. 채아가 어디에 있던지 날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고백하고 결국 채아와 만난다. ‘새’는 상징, 은유로 등장하지만 소설 전반의 이미지를 끌어간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아쉬운 점은 홍이의 등장이 매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앞서 다선이 낳았다고 해석했지만 홍이의 등장은 혼자 있는 다선에게 뜬금없이 등장하는 장면부터다. 그래서 다선의 눈에만 보이는지 헷갈렸던 것 같다. 홍이와의 교감 또한 크게 와닿지 않았다. 왜 다선이 집착처럼 보일 만큼 홍이에게 잘 대해주는 지 모르겠다. 자신이 낳았기 때문에? 자신이 새가 되고 싶었기 때문에? 은유하기 위해 ‘새’ 이미지를 가져왔지만 그게 독자에게 충분히 설명이 되지 않은 것 같다. 환상적인 분위기를 가져온 것은 매력적이지만 부자연스러운 등장부터 다선과의 합체(일체?), 채아와의 재회까지 이미지에 너무 의존한 게 아닌가 싶었다. 물론 필자의 이해력, 상상력 부족일 가능성도 충분히 높다.

 하나 더 아쉬운 건 인물의 행동 동기다. 다선이 딸인 채아를 만나고 싶은 건 모성애를 다루기 때문에, 더는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명주의 행동 동기에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필자의 생각에는 다선을 통해 엄마가 딸에게 보여주는 사랑—집착을 보여주었다면 명주는 반대로 딸이 엄마에게 보여주는 사랑—집착을 보여주는 역할을 가졌다. 두 사람은 거울을 마주한 구조지만 구조일 뿐이다. 명주가 친딸이 되고 싶어하는 이유를 독자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다선의 딸인 것처럼 보였다가 실은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접근했다고 돌변하는 모습에 물음표가 띄워졌다.

 의문점도 있다. 대리모가 꼭 자연분만을 해야 하냐는 것이다.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굳이 대리모가 자연분만을 할 이유가 있을까? 아기를 디자인할 수 있는 기술이 있으면 출산에 관한 다른 의료 기술도 발달하거나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었을 거라고 본다. 배아 인공배양소는 없을까? 그런 기술까진 없다고 치자. 인간의 몸에서만 아이를 키울 수 있다는 가정이라면 제왕절개를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자연분만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있다면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겠다. 모성애. 그를 둘러싼 그릇된 기술과 환경 속에서 죄책감과 책임감을 쏟아내고 싶은 다선의 절절한 마음도 충분히 느껴진다. 하지만 강렬하고 환상적인 이미지 때문일까. 필자가 날 때부터 지닌 생물적 한계 때문에 다선에게 공감하지 못해서 일까. 절절함이 덜 와닿았다.

 아쉬운 점을 잔뜩 늘어놓았지만 사피엔스 작가님이기 때문에 이런 아쉬움이 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피엔스 작가님의 작품을 매우 재밌게 읽는 독자로서 기준점이 높아진 것이다. 눈을 높여놓은 전부 작가님 탓이다, 라고 말하면 안되겠죠? (농담입니다)

 그럼에도 직접 작품을 읽기를 권한다. 필자가 이해하지 못한 것일 뿐 강렬한 이미지와 메시지성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작가님 독자님들이 많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작가님께선 부디 부족한 필자가 오독한 부분은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고 일개 명의 편협한 의견으로 넘어가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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