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의 스포일러 부분은 줄거리상 스포일러는 없으나, 작품을 읽기 전에 보면 재미가 줄어들 수도 있습니다.
※ 분류상 비평 리뷰이나, 팬심 가득 분석적 광고에 가깝습니다.
한달 보름 전 즈음 브릿G에 처음 자작글을 올려보면서 사이트를 둘러보다가, 이영도 작가님의 작품 외에 어떤 글들이 있나-보던 중 우연찮게 「여름과 꽃」이라는 작품을 클릭했습니다. 막부 시대 한 여인의 수필이라는 설정의 글들은 정말로 일본의 어느 박물관에 전시될법할 듯 사실적이면서도 서정적이었습니다. 작가님의 다른 작품은 무엇이 있을까 찾다가 「하그리아 왕국」에 입문하게 되었고, 그 세계관과 캐릭터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지금은 어느새 연재된 분량을 모두 읽고 새로운 회차 업데이트를 기다리면서, 휴재 공지가 올라오면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1. 챕터별 시점 변경으로 흥미를 더하는 군상극
3인칭 제한적 시점을 채택하면서 챕터별로 시점을 변경하여 여러 등장인물들을 묘사하는 군상극으로는 ‘얼음과 불의 노래’가 먼저 떠오릅니다. 전지적 관찰자처럼 멀리서 모든 걸 보는 것도 아니면서 특정 인물 한 명의 내적, 외적 경험에만 제한돼서 서술하는 방식은 작중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면서 독자를 끌어들입니다. 챕터의 제목에 등장인물의 이름을 딱 넣어서 누구의 시점으로 진행할지 알려주고, 다양한 관점의 다양한 캐릭터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해줍니다. 에다드의 시점에서 여러 챕터를 진행하면서 주인공 포스를 느끼게 해주다가, 에다드를 죽여버리는 전개는 영상화된 왕좌의 게임 시즌 1에서도 충격적으로 나왔었죠.
이런 서술 방식을 접할 때의 또 하나의 장점은, 장편일수록 독자는 이야기의 선후관계나 디테일을 잊어먹을 수도 있는데, 독자가 기억해야 하는 사건은 반복적으로 서술해서 잊지않도록 하는데, 관점을 달리하다보니 지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각종 모략이 판치는 극에서는 어떤 인물이 특정 사실을 알고 있고, 다른 인물은 그 사실을 모른다는 사실 자체도 사건 진행에 있어 매우 긴밀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파악하기도 쉽습니다. 같은 사건을 이야기해도 직접 겪은 인물과 소문으로 들은 인물은 사건을 대하는 시각이 다르고, 가치관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으로 서술되기도 하죠. 서로 얽히고 왜곡되기도 하면서 한층 더 세계에 몰입하게 됩니다. 하그리아 왕국은 이런 장점을 잘 벤치마킹했습니다.
현재까지 연재된 하그리아 왕국은 조연이나 단역들도 제법 나오지만, 외전을 제외하고 56챕터, 16 POV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챕터별로 한 명씩 부여하고 챕터 별 제목도 해당인물이지만, 예외적으로 4챕터와 6챕터는 둘로 나누어서 4-1은 타흐마한, 4-2는 누르자한, 6-1은 샤흐라자드, 6-2는 할리메로 챕터 소제목과 POV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뜯어보면, (반쪽 짜리 챕터를 포함해서) 현재까지 챕터별 제목을 차지한 수는 누르자한 1, 할리메 3, 달리아 3, 루키예 3, 발라스 3, 이사야 3, 소흐랍 3, 파리사티스 3, 미르셀라 4, 셀림 4, 아이라만 4, 이스카 4, 타흐마탄 4, 샤흐라자드 5, 스피타만 5, 아르샨 5 였습니다. 하지만 챕터별로 분량이 상이하고, 뒤로 갈수록 한 챕터가 여러 회차로 묶이는 경우도 있어서 등장인물의 비중은 당연히 다릅니다. 회차별 수로 따지면 이스카는 무려 27회차의 화자이고, 샤흐라자드도 16회차입니다. 그 뒤로는 소흐랍, 타흐마탄, 스피타만, 아르샨이 각 14회차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그리아의 역사를 서술하거나 샤흐라자드의 이세계 여정(?!)을 풀어낸 외전은 그 화자나 대상이 샤흐라자드입니다. 등장 빈도가 전부는 아니지만, 어떤 인물이 주요하게 극을 이끌어 가는지는 눈치채실 수 있겠죠?
또 한 가지, 각 챕터는 챕터의 제목을 차지하는 인물의 관점에서 주로 서술하지만 반드시 그 인물의 관점에서만 엄격하게 시야를 제한하지는 않습니다. 현재 챕터의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하다가도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쪽의 사정도 잠시 살펴줍니다. 정령이 살짝 귀뜸해주듯 헷갈리지 않게, 너무 한 쪽 얘기만 해서 지루하지 않게.
2. 중동의 신화적, 역사적 요소를 버무린 현실주의 판타지
여러분은 국내 판타지 소설 중 중세 중동의 이미지를 내세운 소설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없었습니다. 중동 판타지라 하면 천일야화(아라비안나이트), 알라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같은 옛 이야기는 떠오르는데 말이죠. 중세 배경의 판타지라고 하면 대부분 유럽 느낌이 물씬 나지요. 그 유래의 뿌리를 찾으려고 하면 D&D나 반지의 제왕에서 한번 본 듯한 것이구요.
하그리아왕국은 등장인물들의 이름부터 중동에서 흔히 쓰이는 이름들로 현실의 중동 아랍 문화권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본작의 중심인물인 ‘샤흐라자드’ 여왕부터가 천일야화의 화자인 ‘세라자드’의 아랍어 발음입니다. 등장인물의 이름뿐만 아니라 작중에는 이슬람 역사상 최강의 이슬람제국인 오스만제국에서 따온 요소도 제법 보입니다.
작중 등장하는 하그리아 왕국과 살레굽 제국은 작가가 역사학 전공자가 아니랄까봐 오스만제국의 요소가 제법 보입니다. 형제 살해(Fratricide)라는 풍습은 작중에서 그대로 등장하는데, 실제로 오스만 제국에서 술탄 즉위자는 형제를 살해함으로써 내전을 예방했다고 합니다. 황금새장(Kafes)도 오스만 제국 후기에 있었던 풍습이라고 하는데, 술탄의 동생들은 궁전 한 구역에 사실상 연금되었습니다. 본작의 샤흐라자드 여왕도 ‘황금새장’에 누군가를 가두고 있습니다. 살레굽 제국의 황제는 일신교의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겸하는데 오스만 제국의 칼리프 제도를 연상시킵니다. 군사력보다는 신성 권위를 통해 제국적 정체성을 유지한 방식은 작중에서도 국가간 관계를 보여주는 재밌는 지점입니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암투를 벌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가상의 역사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엄연히 판타지입니다. 마법과 신성한 아이템이 등장하는 반지의 제왕 식 판타지라기 보다는 소프트매직을 표방하는 ‘얼음과 불의 노래’에 가까운 느낌인데, 그보다는 판타지스러운 부분이 스토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사건이 발생하고 서서히 극이 진행될수록, 샤흐라자드 여왕의 비밀이 나오고 초월적인 존재들도 작중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판타지 부분은 페르시아 신화, 조로아스터교의 요소들을 많이 차용해서 실제 신화와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저도 본 작품을 읽으면서, 나무위키의 관련 문서들도 꽤나 읽었습니다.
‘불새의 꿈’과 ‘정령’은 본작의 핵심적인 판타지요소이자, 등장인물들의 행동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장치입니다. 작중 불새의 꿈을 꾸는 이들은 몇 명 없지만, 그들에게는 다양한 정령이 돌아가면서 강림합니다. 불새는 페르시아 신화 속 시무르그(Simurgh) 신화를 차용한게 아닐까 싶은데, 시무르그는 거대한 불사조의 형태로 지혜와 치유, 재생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페르시아 서사시 『샤나메』에서는 영웅 자르(Zāl)와 로스탐(Rostam)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이라고도 하지요. 작중 불새는 단순한 상징을 넘어서 정령 강림의 매개로 변용되었는데, 불새의 꿈을 꾸는 자의 불사적 재생 능력이라는 저주적 속성과 결합한 것이, 시무르그의 영생과 치유의 이미지를 고통과 불멸의 저주로 뒤집어 재해석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면 꽤 흥미롭습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우주는 선(아후라 마즈다)과 악(앙그라 마이뉴)의 투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원론적인 세계관에서 그 시간의 끝에는 종말(프라쇼케레티)가 다가오고, ‘사오샨트’라고 불리는 미래의 구세주가 등장하여 악을 무찌르고 세상을 정화하며, 궁극적으로 영원한 정의와 평화를 실현한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사오샨트는 아후라 마즈다의 군대를 이끌고, 악령 앙그라 마이뉴와 그의 데바(악신들)와 싸우고, 최종 전투 후 세상은 불로 정화된다고 합니다.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모두 최종 심판을 받으면서 결과적으로 악은 완전히 소멸되고, 세상은 영원한 불멸과 평화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슬람의 종말론도 유사한데, 구세주인 마흐디가 나타나서 세상을 정화시켜 구원을 한다고 하지요.
작중 세계는 ‘문명 지역’와 ‘초원’이라는 이원적인 세계로 묘사되고, 정령과 신령이라는 대비되는 초월적인 존재가 나오는데, 단순히 선과 악의 대결로만 풀어내진 않습니다. 세상을 구할 예언 속 영웅이 등장하는데, 영웅으로 각성하기까지 겪을 시련을 보고 있으면 안쓰럽기도 합니다.
이슬람 경전 쿠란에는 종말이 가까워지고 방벽이 뚫리면 인간 세상으로 우르르 쏟아져나와 세상을 황폐화시킨다는 야주즈와 마주즈라는 괴물들이 등장합니다. 후대 무슬림 학자들은 이 야주즈와 마주즈를 몽골족으로 해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품을 읽으신 분이라면 작가님이 신화 중 어떤 부분을 차용했는지 찾는 것도 재밌는 요소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중동 요소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얼불노의 영향을 받은 작품인만큼 중세 유럽풍 배경의 작품에서 익숙한 개념인 ‘결투 재판’도 나오고, 전반적으로 봉건제의 모습으로 하그리아 왕국은 익숙하게 다가옵니다.
현재 연재 중인 챕터의 제목은 ‘종말’입니다. 하그리아 왕국에서는 앞으로 어떻게 변주를 하게 될까요.
지금까지 그려오신 이야기는 이미 독특한 색채를 지닌 중동 판타지 서사로서 충분히 좋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역사와 신화를 능숙하게 엮어낸 세계관, 인물들의 다층적인 갈등, 종말론적 긴장감이 모두 잘 쌓여 있어서, 결말을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작품은 단순한 장르소설을 넘어 서사시적 완결성을 지닌 멋진 작품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으로도 충분히 인상 깊지만, 끝까지 힘을 다해 잘 매듭지으신다면 중동 판타지 작품은 거의 없는 국내 문학시장에서 회자할 만한 작품이 되리라 믿습니다.
다음 회차가 올라오길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