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홍콩영화 팬이기에 [들개이빨]을 읽은 순간, 무협 영화를 중심으로 리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단편 무협 소설을 영화와 비교하는 내용이기에 무리가 있는데다가 중반까지 적고 나서 다시 확인해보니 소설 리뷰가 아니라 무협영화 팬 고백글이구만요. 한계가 많은 글인데 [들개이빨] 읽자마자 이런 리뷰를 너무너무너무 쓰고 싶었습니다.)
1. 백아절현
‘백아절현(伯牙絶絃)’이란 중국의 유명한 고사가 있지요. 거문고 달인인 백아가 자신의 음악을 잘 이해하던 종자기가 죽고 나자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이 고사를 통해 백아와 종자기의 관계를 ‘지기(知己)’나 ‘지음(知音)’으로 칭하고요. 저는 무협(武俠) 소설 용어를 구성하는 한자 ‘협’의 근간을 이 ‘지기’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2. 知己
‘지기’는 말 그대로 나를 알아준다 안다는 뜻이지요. 흔히 내가 보잘것 없을 때 작은 도움을 베풀어주거나, 나의 숨겨진 능력을 알아주고 복돋아주거나, 부모 원수 갚는데 도와준다거나…..우리는 뭔가 유무형의 도움을 받았고, 그게 아주 작더라도 말이지요, 그 도움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는 것을 의협심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무협영화에서의 지기는 뭔가를 주고 받는 개념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나를 알아준다, 이게 내 능력이든 뭐든 좋습니다. 아주 잠깐이라도 음악을 합주했든 밥을 같이 먹었든 시를 주고받았든 등등 어떤 도움이 오고가지 않아도 됩니다. 일본 액션영화에서 나오는, 너는 내가 인정한 남자다 라거나 너를 정점에 세우겠다라거나 너는 동료잖아 라거나 주군을 보필하는 무사라거나 이런 것과도 다릅니다.
서극의 [소오강호] 초반 영호충과 사매는 초면의 노인네 둘과 만나 그 유명한 소오강호 주제가인 “창해일성소(滄海一聲笑)”를 같이 연주합니다. 이 장면 하나로 넷은 지기(혹은 지음)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의 음악을 알았고 지기가 됐기 때문에 영호충은 노인과의 사건에 말려들 수 밖에 없습니다. 강호의 의협심 넘치는 좋은 선배라거나 악보를 받았다거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것이고 이면에 흐르는 정서는 이 넷은 지금 합주 하나만으로 백아와 종자기의 현현이고 지기입니다.
원화평의 [취권]에서는 성룡이 걸인을 만나 스승으로 모시게 됩니다. 이 둘은 처음엔 어떤 관계도 아니었지만 주루에서 걸인이 이백의 “장진가”를 노래하자 성룡이 이어부릅니다. 이 장면으로 이 걸인이 백아의 현현일 뿐 아니라 詩仙 이백의 현현이라고까지 영화는 암시하고 성룡이 이어서 시를 읊기 때문에 이 둘은 지기임을 암시하고 사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홍금보의 [패가자]를 보면 주인공 원표는 사부인 임정영의 죽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피를 토하면서 사부가 유언을 남깁니다. “사부한테 약속해라. 절대로 복수하지 않겠다고. 저 놈한테 네가 이길 수도 없지만 설사 이길 수 있더라도 저 놈은 고관대작 아들이라 어차피 넌 죽어. 맹세해. 사부한테 복수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란 말이다.” 원표는 복수하러 갑니다.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를 알아봤다는 ‘지기’가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난 영화는 장철의 [신 독비도] 입니다. 고수인 주인공 강대위는 팔 한 쪽이 잘린 뒤 강호를 떠나 자연에 숨어살다가 적룡을 만나요. 같이 시를 읊었던가 밥을 한 끼 먹었던가, 몇 시간 같이 있지도 않았습니다. 잠깐의 만남이었을 뿐이에요. 서로 뭔 도움을 주고받은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도 적룡이 죽자 강대위가 복수하러 강호로 다시 갑니다. 영화의 마지막 격투 장면은 다리 위에서 펼쳐지는데 이 때의 강대위 표정이 슬퍼요. 그는 자신이 죽을 걸 압니다. 고작 이런 일로 죽어야 한다는 게 억울해 보이기 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대위는 복수를 해야만 합니다. 적룡이 자기 삶에서의 지기였으니까요. 무협영화에서 지기의 개념은 주인공의 어떤 가치보다 상위에 있습니다. 그에게는 해야 하고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죽더라고요. 지금 강대위는 살면서 한 명 만날 수 있을까 말까한 ‘지기’를 상실한 사람입니다. 음악가인 백아가 거문고 현을 끊어버렸다는 지기의 죽음과 함께 음악가로서의 죽음을 택했다는 의미도 됩니다.
지기를 위해서는 죽을 수 있는 정서. 또한 이런 행동을 구구절절히 설명하지 않는 정서. 남한테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며 당연히 해야만 하는 행동입니다.
때문에 [들개이빨]에서 작가는 이렇게 씁니다. (이 리뷰를 쓸 동기를 준 문장이기도 합니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예, 그렇지요, 이 정서. 바로 이 정서입니다. 그에게는 지기가 있었고 지기를 만났고 그러다 지기를 잃었습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습니다. 절대 돌아오지 못해요. 세상에! 지기를 잃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해야할 일을 해야지요. 그러니 해야만 하는 일을 합니다.
[신독비도]의 장철처럼 知己의 정수만을 가져와 서사를 짜면 무협영화는 비장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저렇게 별 것도 아닌 일로 목숨을 거는데 어찌 비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무협의 지기를 잘 모르면 쓸데없이 비장한 똥폼이라거나 로맨스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왜 저렇게 심각한지, 왜 저렇게 비장한지 이 부분이 이해가 안 가니까요. 쟤네가 서로 사랑하나 보다 첫눈에 반했나보다로 이들의 비장함을 이해하는 것도 종종 보구요.
앞서 저는 ‘지기’가 무협영화의 핵심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보다보면 종종 슬프기도 해요. 우리가 살면서 저런 지기를 단 한 명이나 만날 수 있으려나요? 그 불가능성이 느껴져서 더 슬프고 그러면서도 지기와의 만남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점이 무협이 주는 가장 강력한 판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 판타지가 제대로 기능하게 하려면 무협의 세계, 즉 강호가 제대로 작동해야겠지요.
3. 江湖
무협영화의 일대종사인 서극의 [황비홍2]를 보면 백인 남자가 중국인 관리에게 강호가 뭐냐고 물어봅니다. 관리는 어 강호란….강호란…강호란….하다가 설명을 포기합니다. [서극의 칼]에서는 아예 여주인공의 나레이션으로 영화를 시작합니다.
강호라… 강호가 뭔지 난 모른다.
난 그저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이사다닌 수많은 지역을 알고 있을 뿐이다. 쉴새없이 이곳에서 저것으로 옮겨 다녔지만 아버지는 내게 이유를 설명해준 적이 없다. 아버지가 내게 들려준 수많은 이야기는, 모두 거래와 관련된 것이었다. 나에게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행위는 거래의 일종이라 하셨다.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 팔고 싶은 게 있을 때에도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그렇지만 난 뭐가 갖고 팔고인지, 뭐가 대가인지, 전혀 구별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늘 ‘정의(正義)’란 동정(同情)일 뿐 시비(是非)의 구분이 없다고 하셨다. 오늘 옳지않은 어떤 상황을 보고 끼어들어도, 내일이 오면 틀린 건 자기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된다고. 그때 후회해봤자 이미 너무 늦다고. 자신의 책임일 뿐이라고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여주인공의 나레이션으로 영화를 닫습니다.
그 순간 난 깨달았다. 강호의 거래에서 당신이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건 일시적인 이익일 뿐이라는 걸, 상대가 어느날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가져갈 수 있고 혹 실패하더라도 그의 후인(後人)이 다시 가져간다는 걸. (…) 강호가 뭔지 난 여전히 모르겠다. 그러나 내 알바 아니다. 그저 날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날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강호란 뭘까요. 강호란 뭘까 종종 생각해봅니다. 되게 넓은 장소같은데 또 우연히도 자주 만나는 거 보면 엄청 좁은 장소일 것도 같고…또 장소가 아니라 상징이란 생각도 들고….어쨌든 강호가 있어야 무협이 펼쳐지지요.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은 현대 홍콩의 야경을 바라보며 “강호의 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장철의 조감독 출신인 오우삼은 쇼브라더스 무협 영화의 간판 협객인 적룡을 데려와 가족 부양을 위해 위조지폐까지 만드는 조폭의 우두머리를 연기하게 합니다. 이제는 나이가 먹어 자신이 조폭이란 걸 숨긴채 가족을 위하는 주인공 적룡이 가족 로맨스를 연기하는 동안 조연인 주윤발은 강호의 법칙대로 현대 홍콩을 삽니다. 지기를 위해 복수하러 나섰다 다치고 추레한 모습으로 강호의 도가 떨어졌다 중얼거립니다. 무협영화는 아니지만 오우삼은 [적벽대전]에서 주유와 제갈량이 악기 연주로 소통하는 장면을 연출, 정말 대놓고 백아절현 고사를 재현합니다. 오우삼 영화의 가장 핵심인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왠만한 강심장으로는 이렇게 대놓고 백아절현을 재현하지 못할텐데…보면서 감탄했었어요.
몇년 전에 본 대만 영화에서는 힙합 댄서인 주인공이 다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아버지의 얼음공장 일을 돕는데 옛 동료가 찾아와서는 그래요. 강호로 언제 다시 나올거냐고, 강호로 나갈 때가 되지 않았냐고. 순간 저는, 여기서도 강호인가! 깜짝 놀랐었어요.
최근 몇년 간 본 무협영화 중 가장 훌륭한 영화는 [사부 : 영춘권 마스터]라는 중국 영화였습니다. 감독인 서호봉은 중국의 유명한 무협소설 작가인데 영춘권 팬이라 본인이 수련을 하고 있어요. (서호봉 장편이 무리라면 무협 단편집 정도는 한국서 번역 출판됐음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본인 단편을 본인이 감독하고 본인이 액션 설계까지 짜서 상을 탔습니다. 영춘권의 유일한 계승자인 사부는 천진으로 가서 도장을 차리려고 하고 서호봉은 천진에서 강호를 펼칩니다. 이 시대는 군벌 시대로, 일본침략이나 국공내전 이전 시대입니다. 중국의 검열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영리한 선택이지요. 군벌은 누구에게나 다 공통의 적이고 이후 시대의 공산주의 사상 조류와도 거리를 둘 수 있으니까요. 제가 놀란 건 이 시대 상황 설정도 있지만, 영화 속에서 사부의 제자가 일종의 가두 책 대여점 수레를 운영하는데 [촉산겁협전]이 베스트셀러로 등장한다는 점이었어요. 서호봉의 야심은 홍콩의 김용이나 대만의 고룡 같은 유명 작가들의 무협과 거리를 긋고 근대 중국 대륙에서 강호를 재현하는 게 아닐까, 촉산검협전이 인기있었던 중국 대륙의 무협소설 황금기를 다시 살리겠다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아주 좋은 무협 영화입니다. 아주 야심만만하고요. 이것이 진짜 강호라는 서호봉의 선언이고요.
강호란 뭘까 종종 생각을 합니다. 만약 한국을 배경으로 강호를 재현한다면 어떤 시대가 좋으려나, 아니 한국에서 강호를 재현할 수 있으려나, 종종 생각해봅니다. 모르겠더군요.
덧. 다시 읽어보니 빼먹은 부분이 있어서 덧붙입니다. 저는 [들개이빨] 읽으면서, ‘아…진짜 어떻게, 이 분량으로, 이 짧은 단편으로, 무협의 정수인 지기와 복수를 다 담아낼 수가 있단 말인가’ 굉장히 감탄했습니다. 읽고 나서 계속 정말 굉장하다, 정말 굉장해….중얼중얼거렸어요. 그래서 리뷰를 쓰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