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푸근해지는 날씨덕에 종종 산책을 한다. 그럴때면 어김없이 애견을 산책시키는 이들과 종종 마주치게 된다. 하얗고 작고 귀여운 강아지들부터 늠름하고 크고 의젓한 개들에 이르기까지 녀석들이 공통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있으니, 바로 영역 표시다.
배설물로 자기 영역을 표시하는 것은 동물의 생존과 밀접한 본능일 것이다. 마트에서 먹거리를 살 수 없는 야생 동물에게 먹거리 공급이 가능한 나의 고유 영역은 생존에 필수적일테니까.
이것이 어찌 짐승에만 해당될까? 오늘날에도 고대의 습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한 원시 채집수렵 부족에 대한 다큐를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외부인에 얼마나 적대적이고 호전적인인지 깜짝 놀라게 된다. 부족만의 고유 영역 역시 생존의 문제인만큼 외부의 접근은 민감한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배타성은 개개인의 유전에도 뿌리깊게 베겨 내려와,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경계선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 경계가 좁아서 누구하고나 쉽게 심리적 근거리까지 다가가는 사교성 넘치는, 소위 핵인싸 유형이 있는가하면, 그 경계가 넓고 벽이 공고해서 타인의 접근을 쉽게 허락치 않는 아싸 타입도 있는거라고. 그러나 어떤 유형이든, 내가 허락치 않은 내 경계선을 타인이 멋대로 훌쩍 넘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다.
여자 주인공이 갖는 특별한 능력은 바로 저러한 점 때문에 모두에게 오해와 불편함을 준다. 그녀가 자기의 경계를 침범할거란 생각. 알리고 싶지 않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멋대로 알아낼거라는 불쾌감. 허락치 않은 나의 경계를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멋대로 넘나들 수 있는 사람을 거리낌없이 반길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런지.
운 좋게도 그녀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운 나쁘게도 잃는다. 운 좋게도 그와 닮은 사람을 만나고, 운 나쁘게도 그가 외형 외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임을 뼈아프게 깨닫는다.
그리고 많은 로맨스물이 그렇듯, 그는 그녀를 잃고서야 깨닫는다. 그는 그녀를 통해 성장한다. 철없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했던 그는, 많은 아픔의 시간을 겪고서야 알게 된다. 전에는 몰랐던 것을.
그리하여 그는 자발적으로 그의 경계를 허문다. 상대에게 강요했던 장벽을 스스로 치우고 그녀의 입성을 허락한다. 아니, 강제한다. 날카로운 가시돋친 말들로 중무장했던 자기 경계를 없앰으로써 그는 진정으로 그녀와 유일하고도 유의미한 ‘관계’가 된다.
사실 그는 성장형 캐릭터인만큼 그간의 행적들이 좋지 못해 썩 미덥진 않다. 그가 언제 변덕을 부려 다시 날카로운 경계석을 세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면서, 모든 경계를 허물고 온전히 자기를 내어 보여주는 것, 그것이 사랑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