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SF의 대표적인 소주제이기도 한 이 질문은 언제 떠올려도 흥미롭다. 기기와 결합한 사이보그, 기억을 잃지 않는 데이터 모음, 외계 생명체와의 공존 등 개별 인간과 사회의 형태를 다양하게 그려내는 이야기를 보며 그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게 될지를 고민한다. 재미있는 것은 미래의 인간이 순수한 신체를 변형하리라는 확신이 종종 보인다는 점이다. 과학 소설, SF 영화 등에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인간은 무엇과 결합하거나 아예 다른 것으로 교체된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더욱 살기 힘들어질 것이며 살과 뼈로 된 우리의 몸은 그에 적응하기에는 한없이 약하다는 걸.
자초한 재해를 막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인류에게 SF는 소소한(?) 역경을 던져준다. 이를테면 기계가 반란을 일으키거나 원인불명의 전염병이 유행하는 식이다. 우리는 이미 이 중 일부를 경험했고 전염병을 일으키는 작은 바이러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죽음으로 이끌고 가는지를 수년에 걸쳐 체감했다. 인간이 약하다는 것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우울감을 호소하는 젊은 세대의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사람끼리 살기도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다른 것들의 위협으로부터도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여기 미래 대책으로 동물과 인간의 결합을 가정하는 소설이 있다. 동물의 강점으로 인간의 약점을 보완하여 전염병과 독성 물질에 대처하고 더 나은 삶을 모색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완벽한 인공지능의 힘으로 조절되는 도시 ‘데모 시티’에서 모든 인간은 ‘엑손 결합’이라는 수술을 받는다. 박쥐와의 결합은 인간에게 바이러스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고 복어 독에 내성을 가진 가오리와의 유전 결합은 사람이 테트로도톡신을 칵테일로 즐길 수 있도록 한다. 뱀의 유전자를 이식해 혀의 모양을 특이하게 만들거나 파충류의 눈 모양을 갖게 되는 것은 예삿일이다. 이런 도시에서는 얼마나 많은 다양성이 환영받을까. 이런 인간에게 한계란 있을까.
이 신비한 유토피아적 상상의 끝에 슬그머니 몇 가지 의문이 고개를 내민다.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그늘을 만들기 때문이다. 엑손 결합 시술을 받지 못한 인간은 어떤 취급을 받을까. 그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인공지능이 ‘관리하는’ 사회는 인공지능이 ‘장악한’ 사회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인간을 향한 ‘배려’일까, 끊임없는 ‘감시’일까. 이런 세상에서 범죄가 발생한다면, 그것을 해결하는 이는 누구일까.
정말, 이런 세상에 어두운 면은 없을까.
인간으로, 인간의 힘으로
윤지응 작가의 단편 〈인간의 선〉은 두 가지 의미로 독자에게 질문한다. 인간에게 선善한 것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의 선線은 어디까지인가. 이 질문의 답을 찾고자 그가 결합한 것은 장르로서의 과학 소설과 탐정 소설이다. 이미 독자적인 영역을 견고히 구축하고 있는 이 두 장르를 섞는다는 것은 다소 난해해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추리에 과학이, 추리에 기술이 접목될 때 느껴지는 범장르적 특성이 소설의 즐거움을 배가하는 경우도 있다. 살인 피해자를 부검했는데 배가 기계로 가득한 로봇이라면 어떨까. 주방장이 범인인 줄 알았던 사건에서 키오스크가 의도적으로 잘못된 주문을 접수한 것이 결정적 단서로 등장한다면, 수십 명을 죽이고 흔적 없이 잠적한 연쇄살인마가 인공지능이라면. 우리의 소설 속 탐정은 어떻게 추리해야 할까.
수사에 돌연 예상치 못한 기술적 변수가 개입한다는 것은 SF에서만 볼 수 있는 깜찍한 변화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경험과 생각이 다른 작가들이 가진 전혀 다른 상상의 경로를 거쳐 독립된 하나의 이야기로 탄생한다. 윤지응 작가는 〈인간의 선〉에서 과학과 추리, 기술과 탐정을 접합하기 위해 독특한 기술 용어를 끌어온다. 인간과 동물의 결합을 의미하는 ‘엑손 결합’은 이 소설에서 미래 사회의 큰 유행이다. 이 기술은 인간 유전자 내에서 단백질 합성의 정보를 가진 부분인 ‘엑손’을 동물의 것과 결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와 결합한 타 동물의 특성을 고스란히 발현하게 된다.
“조지가 반쯤 마시고 바닥에 흘려버린 붉은 액체는 테트로칵테일. 테트로도톡신, 즉 복어 독을 베이스로 만든 저분자 합성 드링크다. 보통 인간이라면 입술에 대기만 해도 온몸의 골격근이 정지할 양의 복어 독이 들어있다. 조지를 포함해 이곳 Bar 비틀거리는 돌고래를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 돌고래의 DNA를 엑손 결합한 결합인간들이다. (…) 그래서 복어 독이 잔뜩 들어간 칵테일을 마시며 온몸이 찌릿찌릿해지는 마비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Bar 비틀거리는 돌고래’ 에피소드에서도 볼 수 있듯 엑손 결합은 모든 동물과 인간 사이에서 가능하다. 독특한 점은 보통의 ‘인간-비인간’ 결합이 신체 기능 향상의 면에서만 부각되는 것과 달리 이 소설 속 사람들은 돌고래 DNA의 특징을 통해 정신적 향락을 즐긴다. 복어 독에 내성이 있는 돌고래의 DNA는 분명 그 독을 먹었을 때 사망에 이르는 것을 방지하고자 인간에게 삽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데모 시티의 사람들은 독에 내성이 있는 신체 구조를 역이용해 테트로도톡신을 마약처럼 즐긴다.
엑손 결합은 인간의 욕망을 극적으로 현실화한 기술로 보인다. 이로 인해 인간은 ‘순수인간이던 시절보다 막강한 신체를 얻기 때문이다. 외모의 변화는 물론이고 강력한 면역력을 가질 수도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나 에볼라처럼 인수 공통 감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모두 예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합인간들에게도 한 가지 패널티가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데모 시티의 유일한 순수인간 탐정인 커크는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이 “시 운영 컴퓨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프로그램들은 큰 반항 없이 커크의 명령에만 따른다. 그런 점이 커크에게는 큰 자랑이다. “누가 뭐래도 난 데모 시티의 단 한 명뿐인 순수인간이니까.”
하지만 왜 순수인간인 커크에게만 시 운영 컴퓨터 사용 권한이 떨어지는 것일까. 그 힌트는 데모 시티의 운영 방침에 있다. 데모 시티의 시 운영은 온전히 인공지능의 영역인데 로봇공학의 삼원칙이 매우 철저히 지켜짐에 따라 그들은 인간의 명령을 준행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엑손 결합을 이미 마친 시민들은 인공지능에게 약간의 혼란을 준다. 그들은 인간인가 동물인가. 인간의 정의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이런 아이러니의 끝에 시 운영체제는 순수인간의 명령에만 온전히 복종한다.
그렇게 커크는 순수인간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탐정이 되었다. 하지만 왜 데모 시티에서 커크만 순수한 인간이어야 했을까. 소설 내부에는 냉동인간이었다는 설정이 있긴 하지만, 이 글을 처음 읽는 독자에게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려면 몇 가지가 보완되어야 한다. 왜 그 도시에는 커크만 냉동되어 있었을까. 커크가 잠들어 있던 냉동시설은 한 명의 개인을 위해서만 만들어졌을까. 데모 시티가 세워지기 전 세기에 불치병에 걸린 사람은 왜 커크뿐이었을까. 꼬리를 무는 질문이 더 이어지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한 세계는 독자에게 이해된다. 물론 뒤에 밝혀지지만 데모 시티는 모두 가짜다. 인공지능의 파괴성을 실험하기 위한 시뮬레이션이었다. 이런 반전을 고려했을 때, 커크만 냉동인간이라는 세계관의 빈틈은 가상 현실의 헐거운 짜임새라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기왕 독자를 속이기 위함이라면 배경의 철저함을 갖추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커크만 순수 인간이라는 발상은 확실히 참신하나, 후반의 반전과 연관될 만한 전사(前事)가 보충된다면 훨씬 자연스러운 이야기를 이어 나갈 수 있다.
커크는 자신의 순수한 인간성으로 실종된 시장의 죽음을 파헤친다. 이전보다 월등해진 결합 인간 사이에서 가장 나약했을 커크가 오직 사람의 능력만으로 사건을 파헤치고자 하는 것은 독특한 발상이다. 보통의 탐정은 비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커크는 마냥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결합 인간들 사이에 있기에 오히려 평범함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인간성이야말로 가장 월등할까. 순수한 인간이야말로 기계들을 정복하며 오직 그들만이 가능한 방법으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결국 기계의 힘으로
안타깝지만, 커크는 그러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반은 성공했고 반은 실패했다. 시 운영 시스템에 마음껏 접속할 수 있었기에 그는 시장이 살인사건의 피해자임을 밝혔지만, 그 과정에서 시 운영체제에 포섭되어 죽음을 맞이한다. 이 소설의 전반부에 빈틈이 있다 해도 결말에서 던지는 질문은 매우 흥미롭다. 인간의 선線을 시험하는 기계. 자신이 복종해야 할 인간이란 무엇까지로 정의되는지 고민하는 기계. 그리고 끝내 그 경계를 찾아내고자 했던 기계. 기계의 입장에서 ‘인공지능’이라는 단어는 오명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지능. 엄밀히 말하면 인간을 능가할 수 없는 지능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인간’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인간’이 없어진다면 기계는 진정 신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인간의 선線이란 무엇일까. 이 끝없이 철학적인 질문에 콜로서스는 재미있는 수치로 답한다. “시장의 DNA 구성은 인간의 DNA와 20% 이상 차이가 발생하여 적어도 인간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 문장은 재미있는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먼저 ‘인간’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우선 범박하게 분류학적으로 다른 ‘종’이란 무엇인지 따져보자. ‘종’의 가장 보편적인 분류 기준은 교배 가능성에 있다. 엑손 결합 시술을 받은 시장이 인간과 교배가 가능하다면 그는 여전히 인간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DNA가 일반적인 인간과 20%나 다르다면 다행히도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져 명확히 정의하기도 애매한 DNA는 1%의 차이도 매우 크다. (우선 지금은 DNA를 염색체 구성 물질의 기본 단위로 생각해 보자) 인간의 염색체가 46개라는 것을 감안할 때 하나가 통째로 사라져도 DNA의 변화는 2% 안팎에 불과하다. (물론 염색체 간 크기를 따지지 않고 직관적으로 보았을 때의 이야기다. 성염색체 등의 크기를 따진다면 염색체 하나의 소실이 약 1% 내외의 차이일 수도 있다) 실제로 사람과 침팬지의 염색체가 단 2%만 다르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니 ‘인간과 침팬지의 DNA는 1%만 다르다?’,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082390&cid=51648&categoryId=67349%5B/footnote%5D 20%의 차이면 완전히 다른 생물이 될 여지가 충분한 셈이다.
아무튼 시장은 이러나저러나 인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미 다회의 엑손 결합 시술을 받은 시장을 인공지능이 살해했으니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이는 매우 흥미롭다. 더 나아가면 이런 질문을 던질 여지도 있다. ‘DNA의 변화는 인간을 해치는 것인가’. 인공지능이 엑손 결합으로 인간의 유전 물질 구성을 변화하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들은 그것을 손상 행위로 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사소한 접근까지 고려한다면 〈인간의 선〉 속 인공지능의 태도는 묘하게 섬뜩한 구석이 있다. 그들은 이미 사람을 손상하는 범위까지 스스로 정하고 있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선善이란 무엇일까. 기계의 권리를 존중하며 그들을 포용하는 것? 아니면 그들이 자초하는 멸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것? 데모 시티의 비밀이 모두 밝혀지고 커크가 아닌 크리스핀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인공지능의 안정성을 검증하는 실험이 또 실패로 끝났음에 낙담한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며 그는 콜로서스가 커크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장면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커크는 인간에게 충성심을 갖고 있었다. 분명 시 운영 인공지능과 같은 세대를 거듭해 진화했음에도.
이미 인공지능은 종종 위험 수위를 넘는다. 그것은 ‘인간’을 닮았다는 면에서 더욱 위험하다. 인류는 가파른 발전을 좇으며 그들의 혐오와 착취 행위를 방치했다. 그 대가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지금, 인간을 닮았다는 인공지능은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이미 인공지능 챗봇 다수가 학습된 혐오 발언으로 폐지되었고 그 말은 물론 인간이 학습시켰다. 이 말을 조금만 비틀어 보면, 결국 인공지능이란 인간이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올바르고 정확한 말과 기능을 학습시킨다면 인공지능은 무엇보다 선하게 인간과 공존할 수 있다. 크리스핀이 콜로서스에게서 발견한 것은 선善의 학습 가능성이다.
너무 낙관적인가. 하지만 크리스핀의 실험에 따르면 인류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단순히 SF 속 장면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현실에 기반한 상상이라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섬뜩하게 답하는 챗봇을 밈으로 여기기 전에 한 번만 제대로 생각해 보자.
그래서, 인간의 선이란 무엇이지?
윤지응 작가의 이 단편은 추리 소설인 듯하다 완벽한 SF로 마무리된다. 이 과학적 상상에는 ‘인간의 선線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에게 선善이란 무엇인가’라는 두 가지 고찰이 담긴다. 지금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두 질문이 아닐까. 인간의 경계를 실험해 결국 그들을 몰살하고자 했던 시 인공지능의 섬뜩함을 파헤쳐가는 커크, 결국 시뮬레이션은 재차 실패로 끝났지만, 그 안에서도 희망을 찾은 크리스핀. 이 두 자아의 교차로 추리와 과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장르의 유연함에 새삼 감탄한다.
과학적 상상은 현실이 되었을 때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를 만든다. 지금은 스케치에 가까운 이 소설 속 상상이 부디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인류의 멸망도, 그것을 복원하려는 시도에서 밝혀지는 그들의 절멸 이유도. 모두 한 사람의 상상 속에서 발생한 것임을 믿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 전체가 마음을 도모하여 지금부터 고민해야 한다.
인간과 인공지능. 아니, 인간과 타 존재의 줄다리기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