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항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공모(감상)

대상작품: 렌항과 나 (작가: 이준, 작품정보)
리뷰어: NahrDijla, 9월 21일, 조회 44

※ 다음의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렌항이 그려낸 풍경들은 어쩐지 몽환적이면서도 그로테스크합니다. 그리고 직관적이면서도 강렬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쓸쓸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우울로 삶을 달리 해야했던 그의 마지막이 사뭇 겹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는 소설 속 주인공의 정서와 연결됩니다. 계절성의, 그리고 슬금슬금 기어오르며 심신을 좀먹는 우울은 렌항의 사진이 갖는 쓸쓸함을 관통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렌항이 조국을 등져야 했을 때 느낀 것과 비슷한 종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역시 한국을 등지고 독일에 자립하기 위해 심지를 굳혀야 했으니까요.

우울이라는 측면에서 초반부는 서글프면서도 아름답습니다. ‘쥐색 하늘이 광활한 아스팔트를 납작하게 압박하는 모양새가 극명하다’는 풍경 묘사는 분명 우울증으로 느끼는 압박감을 상징할 겁니다. 또한 그런 내가 12월 ‘두꺼운 암막 커튼을 치고 완벽한 내부 만들기에 돌입’하여 ‘구름에 가려 해가 떴는지 알 수 없으니 하늘을 등지기로 한 것’은 일종의 침잠일 겁니다. ‘하늘과 땅 사이를 비집고 날렵하게 날아가는 비행기의 동력이 부러웠다’는 독백은 그 압박감으로부터의 해방을 상상하는 묘사일 거구요. 그런 점에서 땅은 현실입니다. 나는 이 땅에 발 붙이고 서 있기에 철새처럼 살고자 하는 본능에 의지해 유럽의 언 땅을 파고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소설 내에서 렌항의 사진은 직접적인 소재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지아가 렌항의 피사체가 되어줬다는 묘사가 나오기는 하지만요. 또한 지아는 ‘나쁜 사람들’을 수집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부분은 스릴러적 요소로 작동하면서 작의 긴장감을 주는 동시에 지아가 타자의 편에 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렌항과 마찬가지로 (사유는 다르지만)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테마를 구성하며 타자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 부분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장례식의 장면입니다. 나는 ‘넘실거리는 슬픔 속에서도 얀의 부재를 실감할 수 없었’습니다. ‘나보다 오래 얀을 알았을 사람들이 참담한 눈물로 죽음을 실감’하고 있는데 말이지요. 얀의 유족들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자신과 그들의 뿌리가 달라서입니다.

이 타자의 테마가 구성될 수 있는 까닭은 지아가 외계에서 온, 제 3자의 입장으로 인간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사실 타자의 입장에서 기득권에게 저항하는 일은 요원할 뿐입니다. 기득권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기득권을 판단하는 일 역시 다소 요원하고요. 그렇기에 제 3자인 지아의 역할이 이 소설의 타자의 개념을 구성하게 됩니다. 제 3자로써 타자와 기득권을 판단하고 올바르게 심판할 수 있을테니까요. 이런 면에서 지아의 판단이 드러나는 사우나실에서 주요한 인물들이 알몸으로 존재하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알몸은 보통 그 인간의 원초적인 본질을 상징합니다. 이 원초적인 본질이 드러나는 공간 속에서 지아와 조우함은 이 심판이 작동하는 매커니즘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토리는 점점 진행되어 남자에 대한 지아의 심판 혐의를 내가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혐의에 대한 심판은 지아가 아닌 독일 경찰이 진행하게 되죠. 비록 CCTV 덕분에 혐의를 벗게 되나 이 기득권의 혐오적이고 불쾌한 판단은 뿌리의 상실을 상징함과 동시에 지아의 심판과 기득권의 심판이 얼마나 다른지를 대비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나는 정녕 외국에서 뿌리를 잃고 방황하는 인물에 불과할까요? 여기서 주인공의 뿌리를 이어주는 인물, 상징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전자는 남편이고 후자는 P선배입니다. 마치 케이팝 스타 같았던 남편은 한국으로 돌아와 P선배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남편이 한국에 가기 전엔 소식을 듣지 못했던 P선배는 나의 첫 사진 개인전에 모습을 비추죠. P선배는 사실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독일에 있었죠. 그런 P선배는 독일 정관사가 헷갈리는 ‘4년차의 고비’를 넘어선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뿌리를 잃었지만 다시금 독일에 뿌리를 내린 사람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이 의미들은 P선배가 나의 사진 <나의 고향에서 온 외국인>을 인정해줄 때 비로소 의미를 갖습니다. 주인공이 비로소 뿌리의 상실을 거둬들이고 주체적인 인물로 거듭나는 거죠.

이 주체성의 회복이 스릴러적/판타지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것은 특기할 만합니다. 현실에서는 망각과 배제의 형식으로 은폐되고 억압되었던 욕망의 내용이 환상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첫번째는 심리적으로 억압었던 욕망들을 충족, 혹은 도피의 형태로 허용함으로써, 욕망의 실체를 긍정하고 그에 대한 대리적 해소를 지향하는 것이며, 두번째는 현실이 억압하고 은폐했던 세계, 혹은 구성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현실적 질서에 저항하고 그에 대한 겨냥하는 방식입니다. 소설 내에서 드러나는 환상의 형식은 후자입니다. 지아라는 인물의 ‘수집’을 통해  억압하고 은폐했던 세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폐된 환상은 몽환적이고 동화같은 공간에서 비로소 회복됩니다.

이 판타지적 요소는 지아라는 존재를 포함하여 이전작과의 연관성을 내보입니다. 특히 전작인 베를린까지 320킬로미터와 긴밀한 모습을 보이는데, 작 중 인물인 카일이 설명하는 얼어붙은 호수 아래 잠긴 트럭의 존재가 그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한 ‘카일의 존재 막역한 자신의 뿌리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할 때, 이는 튼튼한 테마의 연결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존재는 상실을 겪은 이들이 세상을 마주하고 안도할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하는 힘은 확장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상실을 겪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내야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나의 이야기에서처럼 판타지적인 일을 겪을지언정 판타지 같은 일을 겪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수한 판타지들을 소설 속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가끔 성찰하고 고민하게 되겠지요. 이런 면에서 「렌항과 나」 는 참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세심하고 자애롭게 보여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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