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기본의 진리
진리. 그것은 주의, 사조, 학파 등의 이름으로 변주되며 인류사를 방황해왔다. 신의 시대가 저물어 인간에 시대에 이르렀고, 이성에 대한 믿음과 과학의 발전을 기치로 삼은 합리주의가 회의주의에 치명상을 입었다. 모더니즘마저 양대 세계대전을 통해 침몰했음을 우리는 안다. 결과론적으로 냉정하게 따지자면 그 과정에서 무의미하게 흘려야 했던 무수한 피들은 덤이다.
그 이후는? 바야흐로 의심하거나 의심하기를 체념하거나의 시대다. 넓은 시야로 본다면 고작 1~2세기 사이에 진리와 정설이 몇 번이고 뒤집히는 촌극을 감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약간 점잖아졌을 뿐 버릇을 버린 건 아니다.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 하는 방법론에서부터 갈려 피 터지게 싸운다. 과학이 모든 것을 해명할 수 있다, 문학이 사람을 구원한다, 음악은 보편적인 언어다 하며 서로가 서로를 씹어 댄다. 아예 진리 같은 것이 존재하기나 하느냐는 근본적인 회의론부터 그게 밥 먹여 주냐는 현실론마저 팽배하다.
인류가 진리에 닿는 일이란 여전히 요원하다. 인류사란 그 자체로 진리를 향한 인류의 장대한 실패의 연대기라 일컬어도 모자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실패 이야기가 있다.
1. 피카레스크
테레사는 국문학에 재능과 열의 모두를 갖춘 학생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녀가 태어난 것은 마도학(작중에서 마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현실의 과학에 대치된다)의 온상이자 마도강국인 오르데나 왕국이다.
오르데나는 마도학 기술력을 국수주의+민족주의 프로파간다와 결부시켜 써먹는다. 권위주의적인 정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람을 증발시키는 정보경찰을 운용하며 공공연히 사상검열을 한다. 도시에 뜬금없이 세워진 검은 구조물 ‘모놀리토’와 “이성 없이 하늘을 우러르지 말라” 는 문구를 통해 현실에서 지나간 세기, 때 아닌 광기의 시대를 당당히 활보하던 합리주의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엘 문도’ 사회부 기자이자 닳고 닳은 염세주의자 테레사 알마스는 1화부터 조국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비아냥대며 온갖 비난을 던진다. 그러면서 예술가 대우가 좋다는 이웃나라 에르사예즈 공화국을 떠올리는 그녀가 오늘날의 국까 담론이 연상되어 마냥 남 같지는 않다.
거듭 현실을 생각해 보면, 우리네도 글빨 좀 좋아서는 밥도 안 나오고 에너지도 안 나온다. 과학지상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연구가 세계의 발전에 얼마나 이바지하는지, 세계의 비밀에 닿기까지 얼마나 큰 족적을 남기는지 침을 튀겨가며 떠들어 댄다. 그리고 얼마나 돈을 벌어다 주는지 까지도.
삐딱한 세상에서 삐딱한 언론사의 삐딱한 사람 테레사는 1화에서부터 미리 이후의 전개를 예고한다. 다름 아닌 ‘라사로 같은 피카로가 날뛰는 오르데나 식 악당 소설‘ 이라는 표현을 통해.
여기서 ‘피카로picaro’는 스페인어로 ‘악당’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스페인에서 많은 배경 이미지를 따온 본작 특성 상 ‘라사로’는 1554년 출판된 작자 미상의 스페인 소설인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주인공 라사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게 왜 중요한가 하면, 이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가 문학사 학계에서 최초의 ‘피카레스크 소설’로 불리우기 때문이다.
피카레스크. 흔히 악인극이라고도 칭해지는 이 장르는 주인공을 포함한 주요 등장인물들이 죄다 악인, 하다못해 도덕적 결함을 갖춘 존재로 나타난다. 당연히 이러한 인물들이 활개 치는 작중 사회는 멀쩡할 리가 없고, 이에 따라 사회풍자 내지 현실의 부조리함을 극대화시키는 전개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본작은 피카레스크 소설이란 말인가? 그보다는 피카레스크적 요소가 다소 엿보인다고 해야 알맞을 것 같다. 조금 더 이어가보도록 하자.
2. 예언자
테레사는 취재를 위해 만난 에르사예즈 전권대사 베릴에게 마도학자이자 대학 시절 사귄 애인인 마티아스 아벨의 이름을 듣는다. 그 저의를 이해조차 할 수 없건만 채 하루도 안 되어 마티아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순수한 이론가 마티아스는 생전 차원에 구멍을 뚫어 다른 차원의 광석인 다이달라이트를 생산하는 기술을 연구했다. 그는 혁신적인 다이달라이트 생산량 증대를 이루어 내지만 세간은 더 큰 것을 바란다. 그러나 현 기술 수준으로는 보다 많은 생산량을 위해 차원을 찢는 순간 임계점에서 되돌아올 수 없다는, 즉 안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답보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이런 와중에 현실마저 녹록지가 않다. 당장 모놀리토 내의 알레프 연구소는 파벌 싸움으로 어지럽다. 현 소장을 필두로 한 충성파는 이권을 독차지하며 ‘우주의 섭리를 쫓는다’ 던 연구소를 다이달라이트 공장으로 뒤바꾸고 있다.
총리대신이자 국방위원장인 현 왕태자는 초차원치환 기술을 통해 다이달라이트 생산량을 증대시킨다는 확고불변한 계획을 두고 높으신 분 특유의 은근한 압박을 넣는다. 이는 본인 말마따나 부강한 조국을 꿈꾸는 애국자적 발상, 혹은 위정자로서 마도입국 계획 성공을 통한 입지 강화의 노림수다.
마티아스는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경고한다. 하지만 왕태자는 이론적인 증대 가능성에만 집착할 뿐 기술의 위험성에도, 파벌 싸움이 한창인 연구소의 실상에도, 이론마도학보다 응용마도학에 치중된 지원자들의 부족한 역량에도 무관심하다. 그저 연산기가 많은 일을 해결하지 않느냐 대꾸할 뿐.
여기서 다시 우리는 현실의 모습을 본다. 돈 벌어 오는 응용 분야에 비해 돈 잡아 먹는다며 홀대 받고, 막상 지원을 받아도 툭 치면 혁신이 두어 개쯤 떨어져 나오나 싶은 취급이다. 정치가들은 과실만 쏙 빼먹어 자신들의 위업으로 포장한다. 결국 과학계 또한 세상사 돈의 논리, 정치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마티아스는 불안에 빠진다. 왕태자를 비롯한 저들이 안전한 초차원치환이 현재 기술 수준으로 불가능하다는 ‘당연한’ 결론을 무시한다면? 그것을 통해 ‘최소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실패할 게 ‘분명한’ 계획을 밀어붙인다면?
불안은 곧 가시화된다.
3. 죄악의 역사
베릴 대사를 필두로 한 에르사예즈 공화국 측은 오르데나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다이달라이트를 ‘만들어낸다’ 고 판단, 그 방법에 해당하는 몇 가지가 상상을 초월하는 재난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음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들의 관점에서, 마도강국이라던 오르데나는 실제로는 학문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그 탓에 나름 고르고 골랐을 마도학자들의 마도학 수준조차 터무니없이 낮다. 이를 통해 베릴 대사는 오르데나 마도학계가 최고의 기술자보다 관료의 발언력이 높은 것, 극소수의 인재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마도학을 발전시켰다는 것까지 꿰뚫어 본다.
그들은 눈여겨보던 마티아스의 죽음과 그 전후로 사라진 테레사에게서 무언가 낌새를 차리고, 혹시 벌어질지 모르는 파국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요원들은 금세 사건의 진상에 가까이 다가서지만, 베릴 대사의 “예나 지금이나 내가 거시적으로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천세는 넘겨야 만세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라는 대사를 통해, 우리는 떨떠름한 클리셰를 떠올려볼 수밖에 없다.
미쳐 돌아가는 가상적국을 코 앞에 두고 사는 대사관 요원들. 테레사나 마티아스에 비하면 고차원적 존재들이지만 결국 그들도 정치 논리 아래에 갇힌 불쌍한 존재들이다. 단순화 시키자면 그들의 일 또한 나 하나 잘 한다고 끝이 아니라 옆 사람이 잘 하는지도 살펴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름 “그들을 좋아해보기 위한 노력” 이라 포장하려는 낭만주의자 베릴 대사가 한층 눈에 밟힌다.
그에 앞서 베릴 대사의 부하 루이가 생각하는 보고도 못 본 척하며 서로 비극을 조장하는 죄악과, 꼭 나쁜 방향으로 돌아버리는 역사에 대해서도 생각해봄직 하다. 그러한 흐름에 속하며, 그 자체이기도 한 사람들을 감히 무고하다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죄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 아닌 답은 곧바로 이어진다.
4. 파멸
결말에 이르러, 테레사는 마티아스의 자료를 베릴 대사에게 건네지만 이는 아무 의미도 없는 행위였다. 전권대사라 한들 베릴에게는 모놀리토에서 벌어지는 일을 막을 권한이 없다. 그는 유감을 표하고, 허탈하게 웃어 보인다. 테레사 또한 마주 웃는다. 그 장면 전후의 둘의 대화가 참 볼 만 하다.
“(…)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게 최선이라는 걸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져서 세상이 멸망하면요?”
“그럼 우린 멸망해도 싼 겁니다. 뭐, 모놀리토는 라 오르데나에서 아주 가까우니 최소한 베네딕토 오르데나는 거기 휘말려서 확실히 뒈지겠네요.”
그는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테레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참말이었다. 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면 어쩌겠는가? 비록 자신들이, 최선을 다했을지라도.
그들 개개인이 어땠을지언정 세상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즉, 처음부터 ‘닫혀 있는 이야기’ 였던 셈이다. 이 복마전에는 당연스러운 선인의 승리도, 전복적인 악인의 승리도 없다. 다만 구제할 도리 없이 모조리 파멸하고 마는 배드 엔딩이 찾아올 뿐이다.
5. 다이달로스
다이달로스. 그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건축가이자 발명가로, 미노타우로스를 가둔 미궁을 건축한 일이나 그곳에서 함께 탈출하다 추락사한 아들 이카로스의 이야기 등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런 요소만을 놓고 본다면 대단히 기구한 인물상인 것도 같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다이달로스는 문제적인 인간이다. 애초에 조카 페르딕스가 자신 이상의 장인으로서의 잠재력을 보이자 질투심에 절벽에서 밀어버리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이후 소와 사랑에 빠진 왕비에게 목제 소를 만들어 주어 미노타우로스를 낳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더니, 미궁에서 탈출해 시칠리아로 도망쳤다가도 미노스 왕이 황금을 내건 꾀에 낚여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미노스 왕을 목욕탕에서 삶아 죽이고 여생을 유유히 보내는 모습은 놀라울 정도다.
다이달로스가 처하는 곤경은 근본적으로 그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능력은 출중할지언정 반성없이 닥친 문제를 넘어가는 데에만 급급한 인물이다(이후에 더 문제를 일으켰다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나름의 요령이나 교훈을 얻었을 가능성은 있다).
동시에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다시 생각해보면 본작과 다이달라이트, 그리고 다이달로스 간의 접점을 어렵잖게 떠올려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른 점이라면 한 개인인 다이달로스는 평온을 얻기는 했지만, 본작의 세계는 끝내 발이 걸려 넘어져 파멸해버렸다는 점일까.
6. 실패의 이야기. 다시 기본
이 이야기는 실패의 이야기다. 작중 인물들은 거대한 파국을 목전에 두고 저마다 각고의 노력을 펼친다. 그리고 나름의 성공을 거두기도 하지만 끝내 근본적인 실패는 피하지 못한다. 그들은 악인이었거나, 그 자신은 악하지는 않았더라도 결국 악한 세상에 속한 존재였으므로.
하지만 정녕 그들이 실패했어야만 했을까?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오늘날 세계는 복잡해져만 간다. 오랜 세월 축적되어온 지식들은 평생을 붙잡아도 통달은커녕 완독조차 어렵다. 진리를 향한 여정이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낳는다는 역설적인 구조다.
그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지식의 분야는 점점 더 잘게 파편화되었는데, 막상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전문가 뿐이다. 그나마도 자신의 분야를 벗어나면 백치가 되어버리고 만다. 거기에 대중들은 지식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오히려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무가치하다 여기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그리고 어쩌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조차도.
이러한 상황 속에 진리는커녕 가장 기초가 될, 기본에 자리 잡을 가치조차 완전히 무의미한 것처럼 보인다. 작중에서는 테레사의 경우 문학, 마티아스는 이론마도학이, 베릴의 경우에는(그가 군인이자 외교관이라는 점에서) 국가와 국민의 평화 내지 안녕이 그럴 것이다. 특히 끝끝내 각 분야를 담당하는 세 주역들이 목적을 이루지 못하거나 아예 파국의 단초를 제공하는 역할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해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자. 모두가 저마다의 작은 세계에서 허우적거린다. 프로파간다에 휩싸여 의심하길 포기한 오르데나의 시민들이 그렇고 권력을 향한 욕망에 매몰되어 기술의 위험은 따져보지도 않는 왕태자와 충성파가 그렇다.
서로의 세계는 너무나 달라 마주 접하며 이해할 여지조차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들은 얼마든지 한 곳에 묶일 수 있었다. 다름 아닌 기본을 통해서.
테레사가 꿈꿨던 ‘당연한’ 소양이, 마티아스를 괴롭혔던 ‘당연한’ 원칙들이, 베릴이 냉소했던 ‘당연한’ 상식들이, 그 모든 것이 기본이었다. 그중 하나라도, 다시 그 안에서 작은 하나라도 지켜졌더라면 결말부의 파멸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이달로스가 별다른 이야기 없는 말년을 보낸 것처럼.
멀지 않은 현실에서 인류는 몇 번인가 유사한 경험을 겪었거나 겪을 뻔 했다. 양차 세계대전이 그러하고 냉전의 핵 위협이 그러하다. 전쟁광들의 미친 짓이나 기계의 오류로 인해 핵전쟁이 일어날 뻔한 일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기본을 지키는 선택으로 위험을 무마했다는 후일담들. 과연 이것들은 단순히 운의 좋고 나쁨에서 갈린 일일까?
본작의 다이달라이트 사태나 현실의 핵위협의 경우처럼 거창한 일을 들먹이지 않아도 된다. 세계는 서로 전혀 다른 것 같으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열에 하나의 어처구니 없는 행위가 열 전부를 죽이기도 한다. 그러니 가장 밑에서 깔려줄 기본이 중요하다. 그것은 기초 학문이건, 소양이건, 원칙이건, 사랑과 평화 같은 가치건 무엇으로 불러도 좋다.
진리는 피안의 너머에 있는 막연한 무엇인가가, 이카루스를 매혹시킨 태양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것은 단단히 발 딛고 서 있을 수 있는 바닥일 것이다. 드높은 가치를 쫓는다는 미명 하에 제 밑바탕을 잃어버리는, 세상을 팔아버리는 일은 피해야 한다. 제아무리 튼튼한 건물도 기반이 부실하다면 무너지고 말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