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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우리들에게 지배받기를 선택한 건 바로 너희들이야.”
(본문.4-P45)
목차
1.『신화』에 대한 단상
2.인간이 조립한 신(神)의 형태
3.노트에 적어내린 신화 『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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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화』에 대한 단상
관습적으로 인류는 ‘신(神)’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신화(神話)’라고 칭하며, 인간 위에 군림하는 존재들에 대한 상상을 그려왔습니다.
현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미지입니다. 만화라는 매체로 소개되며 큰 인기를 끌었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살펴봐도, 당시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비롯하여 다양한 기상현상을 다루는 ‘신’을 등장시키며, 이 모든 현상을 통제할 수 있는 더 커다란 존재가 있다는 가정을 두고 있습니다. 동양으로 눈을 돌리면 ‘한자의 신’ 혹은 ‘농업의 신’처럼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본인들의 삶에 창조자를 구상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눈여겨볼만한 점은 이 모든 ‘신’이라는 존재들이 인간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죠. 아니, 인간과 똑같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들을 생각할 수 있는 사고가 있으며,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있고,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아하지 않나요? 그들은 어떤 인가보다 월등한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전제를 달고 있음에도, 막상 그 형태가 인간에 가깝다는 건 ‘신’에 대한 거리감이 몰라볼 정도로 가까워지는 기분마저 듭니다. 신은 손을 맞잡을 수도 없을 만큼 먼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존재가 아니던가요? 역설적으로 인간이 창조한 ‘신화’속에서 그들은 누구보다 인간과 가까운 곳에 머무른다는 인식마저 줍니다.
이것이 바로 동양과 서양을 가리지 않고 관측되는 ‘신화’의 속성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이야기는 우상을 창조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 우상은 무척 시각적이며 구체적입니다.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과거부터 인류는 스스로가 감당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간직해왔습니다. 당시의 기술력으로 증명해낼 수 없는 그것의 형태는, 말 그대로 손에 담을 수 없고 소통할 수 없는 재해나 마찬가지였을 테죠. ‘신’ 그리고 ‘신화’라는 형태는 이런 재해를 다루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해석됩니다. 바람, 물, 삶, 죽음, 심지어 싹이 트고 시드는 과정까지, 적어도 인간에게 익숙한 형태로 가공하며 사회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치며 탄생한 것이, 바로 ‘신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번에 소개해드리는 <만들어진 신들의 세계와 소녀의 논 캐논 신화> 또한 이런 인간의 손으로 빚어진 ‘신화’를 시각화시킨 작품입니다.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을 넘어, 인간이 직접 본인들을 다스릴 신을 창조하는 사회를 다루며, 신이 인간을 다루는 방식을 넘어, 인간이 신을 다루는 방식을 생각하게 만드는 매력을 보여줬습니다.
이번 감평에서는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신’과 ‘신화’ 두 부분으로 나눠 살펴보며, 앞으로 우리 창작자들이 신화를 다룰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부족한 식견에 쓰는 글에 불과하지만, 부디 귀엽게 살펴주세요.
2.인간이 조립한 신(神)의 형태
서두에서 ‘신화’를 인간이 창조한 이야기이며, 그 목적은 인간이 다룰 수 없는 현상들을 다루기 위한 방식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신’이라는 존재로 구체화되는 것들은, 절대로 인간이 다룰 수 없다는 전제를 두는 셈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로지 ‘이야기’ 속에만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야기’ 즉 ‘신화’에 담겨 있는 신의 모습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그들은 인간과 가장 닮았으면서도, 인간이 고개를 조아리며 구원을 빌어야하는 절대적인 존재로 등장하는 것이 대부분이죠.
<만들어진 신들의 세계와 소녀의 논 캐논 신화>는 이 간극을 아주 매력적인 방식으로 비틀어버립니다. ‘신’을 인간과 닮은 존재를 넘어, 인간과 닮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제시하고 있죠. 그것은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세상에서 비롯됩니다.
작품의 배경은 교단이라는 집단이 통제하는 가상의 사회를 묘사합니다. 이들의 사회는 스스로 민중과 지역을 다스릴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도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도구를 ‘신’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2-P.27) “미국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젊어서 반신론자가 아닌 사람은 가슴이 없는 것이다. 서른이 넘어서도 반신론자라면 머리가 없는 것이다.”
(2-P.29) “가슴은 없어도 됩니다. 사람은 머리를 써야죠. (중간생략) 현시대의 신은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신도들을 향하는 훈계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작품에서 ‘신’은 하나의 ‘도구’이며 사회를 통제하는 ‘규칙’으로 나타납니다. 매 주기마다 그들은 ‘신화 업데이트’라는 지표를 통해 각각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신들을 평가합니다. 공기, 어업, 농업 등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일정부분의 권리를 ‘신’이라는 존재에게 맡김으로 사회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각 분야에서 신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면, 해당 신도들로부터 기도와 지지를 얻으며 능력이 향상되고 ‘신화 업데이트’라는 지표에 반영됩니다. 보이지 않는 신과 신도의 관계를, 마치 대가를 받고 지지를 주는 정치적인 관계로 해석한 셈입니다.
(2-P.22) “그리고 어업의 신 체로겐은 지난 17일부로 판테온에서 소멸되었습니다. 체로겐의 신화와 설정 일부는 해류의 신 람노에게로 옮겨져 후속 신화로 이어지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2-P.36) “구식 신과 현대의 신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또 있네요. 구식 신은 인류를 징벌하기 위해 일부러 재앙을 내려야 했죠. 하지만 현대의 신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인류를 징벌하고 싶으시다? 그럼 그냥 아무것도 안 하시면 됩니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신’을 다루는 방식은 사뭇 냉혹합니다. 신도들의 지지가 곧 신의 사회적 위치가 결정되는 시스템은, 반대로 지지를 받지 못 하는 신은 그 자리를 잃고 제거되는 시스템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관습적으로 인간들의 복종을 받는 ‘신’의 존재를 떠올려보면, 오히려 복종하는 인간들이 신의 위치를 결정한다는 아이러니함이 일상화되었다는 의미입니다.
(2-P.31) “우린 그분들의 가르침대로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너무나도 쉽잖아요? 그런데 왜 농산물 가겨에 불만을 품는 것입니까?”
(2-P.34) “기람께서 공인하신 교리에 따르면 지방은 서울의 발전에 도움을 주어야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마치 ‘신’이라는 존재들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듯한 착각을 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을 창조하고 통제합니다. 하지만 명목상으로 그들은 신도에 불과하며, 그들의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신’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농산물 가격에 불만을 품지 마라’ ‘지역 이기주의를 타파하자’ 같은 주장에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그 주장의 근거에는 언제나 신의 뜻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전제가 달라붙습니다. 물론 이 세상의 신은 인간의 소유물입니다. 그들의 역할과 사고는 곧 그들을 만든 인간의 사고라는 것이 자명합니다. 하지만 그 배경조차 ‘신’이라는 존재를 내세우며 묵살되는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신’을 이용하는 법을 가장 영악한 방식으로 깨우친 셈입니다.
(2-P.38) “이제 심각성을 좀 아시겠습니까? 최고신 기람께 기도하세요. 그리고 교리에 저항하는, 가슴만 있고 머리가 없는 젊은이들을 설득하세요.”
(4-P.17) 신전 점거는 보통 불법점거나 기물손괴죄와는 격이 달랐다. (중간생략) 교단에서 신전을 손상시켜도 괜찮으니 강경하세 진압하라고 지시하는 즉시, 판테온에 폭탄을 쏟아 부어 언니를 콘크리트에 묻어버리려도 되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그들은 신을 존중합니다. 신은 신도들의 지지를 먹고 사는 존재임을 강조하고, 그런 신을 거부하는 반신론자들을 부정합니다. 하지만 막상 신전 점거를 중대한 위법사항으로 규정하면서도, 반신론자들을 탄압하기 위해서라면 신전 손상도 개의치 않겠다는 역설을 행동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그들이 말하는 ‘신에 대한 숭배’가 얼마나 영악한 명분인지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2-1.좋아하는 신에게 투표하세요!
사실 인간사회의 문화적 흐름에 따라 신앙이 무너지는 현상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례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 기독교가 전파되며 신에 대한 숭배 문화가 사라졌던 일이 예시로 꼽히며, 또한 이슬람 문화에 편입되며 토착신앙의 흐름이 끊긴 이집트 또한 이 예시에 속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흐름이 끊긴 신앙이 다시 그 지역에서 부활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2-P.23) 이번에도 아로 업데이트는 없구나. 하지만 체로겐처럼 소멸하지 않은 게 어디야. 마이너 신을 좋아하는 신도는 늘 이런 서러움을 안고 살아야 한다.
(3-P.25) 아라렌은 기람과는 다른 교단의 주신이었다. 그러나 교단 간에 벌어진 경쟁에서 결국 아라렌 교단이 기람 교단에게 패배해, 아라렌의 신격은 조각조각 쪼개져 여러 하급신을 만드는 데 쓰였다.
작중에서 보여지는 ‘신화 업데이트’는 이런 위기감을 무기로 이용합니다. 지지를 받지 못 하는 신은 사라지고, 설령 신도의 규모가 있더라도 더 커다란 신앙에게 밀려 축소됩니다. 역사적으로 관찰되는 신앙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해석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소제목에서 정의하였듯, 이 현상은 마치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표를 주는 유권자의 느낌으로도 다가옵니다. 유권자가 지지하는 인물에게 표를 주고, 해당 인물은 선출직을 맡아 사회에 공헌하는 시스템과 무척 유사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보이는 정치인과 신에 대한 차이는 무엇일까요?
관습적으로 신은 감정이 없는 존재로 그려졌습니다. 신도의 지지를 대가로 무언가를 베풀어주는 권능을 형상화한 존재에 가까웠죠. 해당 신에게 감정을 갖는 것은 오로지 신도들의 몫입니다. 그것이 숭배든, 동경이든, 하다못해 두려움이라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신을 바라보는 신도의 시선이었다는 말도 됩니다.
반면에 정치인은 움직이고 사고하는 인간입니다. 유권자들 또한 그들을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며, 오히려 그들을 선출했다는 자신에게 자부심을 갖는 것이 보통입니다. 혹자가 말한 ‘정치인은 이용해야하는 존재이지 사랑하고 지켜줘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말은 이런 속성에서 비롯됩니다.
즉, 작중에서 보여주는 ‘신’의 모습은, 관습적인 신의 모습보다는 신도들의 감정을 편리하게 가공한 존재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인간들에게 필요한 신을 직접 창조하고, 그들을 사랑하도록 강요하며, 그 사랑이 곧 힘이 되는 규칙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 속성을 작중의 인물이 제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4-P.41) “너는 「신」을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우리는 사랑이 가득한 존재가 아니야.”
(4-P.43) “우리들은 신들이 그런 사고방식을 갖기를 바랐던 너희들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니까.”
(4-P.45) “그리고 그런 우리들에게 지배받기를 선택한 건 바로 너희들이야.”
아로는 신의 입장에서 ‘지배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막상 그 신의 지배력조차 신도의 지지에서 나온다는 걸 생각하면 그 말의 무게가 사뭇 달라 보이기까지 합니다. 결국 독자들은 작중에서 나오는 신의 준엄한 꾸짖음조차, 그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어느 인간의 의지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3.노트에 적어내린 신화 『팬픽』
앞서 ‘신화’ 자체가 인간의 손으로 쓰인 이야기라는 것을 전제로 둔 것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 신화를 쓰는 ‘인간’의 주체를 설명할 때, 어느 특정인을 지목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신화는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의도적인 창작보다는, 한 집단에서 일어나는 신앙의 구체화에 가깝습니다. 때문에 각종 신화를 살필 때, 그 유래를 불특정한 지방과 집단을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며, 현재에 이르러 ‘엮은이’라는 이름의 제3자의 손을 거친 이야기를 우리 사회가 받아들인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물론 <반지의 제왕 시리즈>처럼 특정 작가가 ‘신화창조’를 목적으로 둔 채 집필 된 이야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작품이 집단의 신앙으로 일어난 ‘신화’와는 그 결이 다르다는 것이 자명합니다.
이런 ‘신화’의 속성을 생각할 때, 작중에 등장하는 ‘명지’의 존재는 눈길을 사로잡도록 설계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녀는 ‘아로’의 신도입니다. 그녀가 믿는 ‘아로’는 기람이라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과의 경쟁에서 밀려 몰락한 신으로 등장합니다. 때문에 아로는 자신을 지지하는 명지에게 많은 감정을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향하는 언어는 텅 빈 자조가 전부입니다.
(3-P.1) “난 작물의 병충해를 막아주고 작물에 맞도록 흙의 성분을 조정할 수 있어. 하지만 그런 것도 기람이 비를 내려주지 않는다면 소용없어.”
(3-P.12) “재앙을 멈추는 방법은 기람에게 굴복하는 것뿐이니까. 그러니 나한테 기도하는 사람이 없는 거겠지.”
(5-P.6) “난 지난 몇 년 간 아무런 신화도 설정도 업데이트되지 않는 버려진 신이었어. 내게 주어진 이야기라고는 기람에게 패배한 뒤 하급신으로 격하되고, 농촌 지역에 유배당해, 감히 기람에게 대항한 어리석음을 후회한다는 내용이었지.”
‘마을의 마스코트 신’이라는 간지러운 표현에 비하면, 아로의 존재는 이미 신으로서 기능할 수 없는 무언가에 가깝습니다. 믿어주는 신도가 없고, 그에 따라 신도들에게 베풀어줄 수 있는 권능마저 초라합니다. 지지가 부족한 신은 도태되어 사라진다는 것을 떠올리면, 아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한 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아로에게 걸려 있는 ‘신화’는 대부분 기람을 위해 존재하는 부속지에 가깝습니다. 그는 사회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람’의 신화에 몇 줄을 추가하기 위한 도구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명지가 아로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이질적입니다. 명지는 아로를 좋아합니다. 그녀는 그 사실을 항상 강조합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명지가 아로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항상 ‘좋아한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만큼 그 무게감이 작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에 대한 지지를 표명할 때 ‘복종한다’ 혹은 ‘숭배한다’와 같은 표현을 익히 듣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명지가 아로에게 표현하는 감정은 신에 대한 숭배보다는 어느 우상을 마음으로 아껴주는 듯한 감각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본문에서도 세령 또한 한때 아로를 ‘좋아했다’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혹자의 말마따나 마을의 ‘마스코트’로서 애정을 받았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정’은 무척 개인적인 감정입니다. 다수와 집단에게 지지를 받아야하는 신에게 어울리는 감정은 아닙니다. 아로에게 쏟아지는 ‘애정’은 무척 달갑지만, 그것이 아로에게 ‘신화’라는 이야기가 제공되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명지가 아로에게 바치는 글은 ‘신화’라고 표현되지 않습니다. 명지는 자신의 글을 ‘팬픽’이라고 부릅니다.
(3-P.46) 명지의 팬픽에 등장하는 아로도 현실의 아로처럼 고민에 잠겨 있었다. 명지는 아로가 늘 마음 아파하고 고민하는 것을 그의 상냥한 면모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팬픽에도 그런 점을 반영했다. 명지의 마음을 대신해 주는 팬픽 속 주인공 소녀는 그런 아로를 격려해 주었고, 아로는 기운을 차리곤 했다. 그렇게 그 두 인물의 관계가 한 걸음씩 진전했다.
명지가 표현하는 자신의 ‘팬픽’은 무척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투영한 소녀와, 그 소녀와 관계를 만드는 아로의 이야기를 창조하고 있죠. 그 시선조차 무척 주관적입니다. 신도가 전무한 아로에게 명지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은 분명하나, 명지에게 아로가 특별한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그만한 배경을 가졌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이 십대소녀가 아로에게 주는 감정은 무척 개인적이며, 자신의 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무척 주관적인 해석에 기반 합니다. ‘상냥하다’ ‘고민이 많다’ 같은 표현 또한 아로를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이 명지뿐이라는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어쩌면 명지라는 소녀의 주관적인 시선 아래서 아로라는 존재가 왜곡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4-P.49) “당신에게 어울리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 썼어요. 아마 처음 보는 이야기는 아닐걸요? 어린이들이 당신에게 그려주는 그림에 이미 담긴 이야기들이니까. (중간생략) 아이들이 그려준 그림에서 아로가 어떤 얼굴로 그려졌는지 봐요! 당신은 뻔한 신이 아니야! 우리들의 이웃이란 말이야!”
하지만 작중에서 아로가 신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묘사합니다. 비록 지지를 보내주는 신도라는 개념에서는 떨어져 있지만, 명지가 머무르는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아로에게 애정 어린 시선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명지의 개인적인 감정과 시선 또한 이 마을에서 보편적으로 형성된 애정과 결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과 신화가 한 집단에서 형성되는 신앙을 근반으로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로 또한 그 속성만큼은 무척 ‘신’에 가까운 셈입니다.
다만 그런 아로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 또한 신화의 속성에서 비롯됩니다. 기람에 의해 몰락했다는 이야기가, 그의 무력감의 근원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사회가 인간이 신을 창조하여, 다른 인간들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아로의 존재조차 그를 믿는 인간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추측도 가능하겠습니다.
3-1.인간으로 묘사되는 「신(神)」에 대해….
신화가 인간에 손에 창작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에 따른 신의 모습 또한 인간을 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자명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손으로 신을 빚을 수 있는 시스템을 제시하는 이 작품에서 또한, 기람과 아로를 비롯한 신들은 안팎으로 인간을 닮도록 설정되어 있습니다.
혹자는 의문을 제시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직접 그들을 다스릴 수 있는 신을 창조할 수 있다면서요? 신을 도구로 창조할 수 있다면 오히려 인간적인 감정과 외형에서 먼 쪽이 실용적이지 않을까요?
이 농담 같은 질문은 명지와 아로의 관계에 대한 묘사를 위해 편의성을 갖춰놓은 거라며 답을 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이 작품에서 신을 규정하는 것이 곧 인간이라는 구성을 생각하면, 제법 흥미로운 지점이 보입니다.
(5-P.8) “어느 신화 신관이 내 화에 살을 붙여주었지. (중간생략) 그 신화 신관은 자신을 긍정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신으로 아로를 재해석했어.”
(5-P.12) “우리들은, 그러니까 인간이 만든 신들은 자기 신화에 강하게 속박돼. (중간생략) 그런데 나에겐 새로 지어진 신화가 없었으니, 기람에게 패배한 아라렌이 맞이한 결말로서만 머물렀던 거야.”
발췌한 대사들은 아로가 명지가 쓴 팬픽을 읽고, 그녀가 원하는 신이 되기로 결심하는 장면입니다. 어쩌면 아로가 하나뿐인 신도를 위해 각성하는 장면 정도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아로를 본문과 같은 모습으로 규정한 것은, 결국 명지가 자신의 애정과 주관으로 그린 ‘팬픽’입니다. 즉, 아로가 제 본모습을 찾았다는 해석보다는, 명지라는 인간이 규정하는 모습을 제 모습에 덧씌웠다는 추측이 더 옳을 듯합니다. 만약 명지 또한 무력한 인간에 불과했고, 써내려간 팬픽조차 힘이 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했다면, 아로는 그저 패잔병에 가까운 이야기로 남아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로 뿐만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신은 인간들이 바라는 모습을 흉내 냅니다. 기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작중에서 오만한 인간의 외형으로 나타납니다. 명지 한 사람이 규정한 아로가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들 수 있는 선의를 베푸는 신이라면, 해당 사회에서 가장 많은 인간들이 규정하고 있는 기람은 반신론자를 도살하고 재앙이라는 이름의 겁박을 일삼는 무뢰한으로 등장합니다. 이런 성품마저 누군가가 써내려간 신화에 기반 한 거라 가정하면, 어쩌면 기람이라는 신을 믿고 창조한 인간들이야말로 이 사회를 재앙으로 지배하고픈 ‘신’에 가까운 존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신이란 곧 인간들이 믿음이란 동전을 넣고 굴리는 도구와 무엇이 다를까요? 혹여 현실에 있는 우리도 ‘신’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그저 인간들의 목소리에 힘을 싣기 위한 변명이자 도구로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작품 바깥에 있는 우리 세상에서도, ‘신’이란 개념을 다시 규정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상적인 작품 감사합니다. 남은 이야기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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