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니앙즈의 식탁에서. 비평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대상작품: 라오상하이의 식인자들 (작가: 한정우기, 작품정보)
리뷰어: 오세아니아기린, 3월 15일, 조회 88

 1. 라오샹하이의 식인자

 

1884년에 발생한 ‘미뇨넷호’ 사건은 식인이라는 키워드를 다룰 때마다 심심찮게 등장한다. 배가 좌초해 희망봉 앞바다를 표류하던 미뇨넷호의 선원들은 생존하기 위해 죽어가던 소년 하나를 살해하고 그의 피와 살로 며칠간을 연명했다. 이후 이들은 기적적으로 구조되었고 살해와 식인 죄로 재판에 부쳐졌으나 당시 상황을 참작하여 징역 6개월이라는, 다소 가벼운 형을 받게 되었다.

 

1809년에 일어난 보이드 학살 사건처럼 특수한 목적으로 이뤄진 식인도 존재한다. 백인 선원들의 횡포에 분개한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보이드 호의 선장을 포함한 66명의 선원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시신까지 먹어치웠다. 조금은 소름 돋는 사건이지만,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씹어먹고 싶다.’라는 관용구가 있는 것처럼 예로부터 우리는 식인을 하나의 응징방식으로 여겨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의 제목이 의미하는 라오샹하이의 식인자’들’은 삼백 년 만에 되살아난 강시 ‘리쯔’와 샤오롱빠오 가게의 여주인 ‘싼니앙즈’,(더 넓게는 싼니앙즈의 가게에서 샤오롱빠오를 먹는 민중들까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사람은 ‘식인’을 한다는 공통점으로 엮여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상반되는 특징들로 대비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리쯔는 명(明)대의 식자층이었으며 300년 만에 되살아나서는 근대 개화 지식인의 면모를 갖춰 모던보이 행색을 하고 다닌다. 이에 반해 싼니앙즈는 상하이의 평범한 농탕에서 샤오롱빠오 집을 운영하고 매춘 일을 겸하며 거기에 나름의 자경단까지 꾸려 활동 중이다. 남성과 여성, 선비와 평민, 양장을 입은 모던보이와 차파오를 입은 매춘부. 연쇄식인마 강시와 연쇄살인범을 쫓는 탐정. 거의 모든 면에서 대비를 이루는 이 두 사람의 가장 흥미로운 차이점은 ‘식인’의 방식에 있다.

 

리쯔는 생존을 위해 식인을 한다.

 

내가 양놈을 먹는 것이 식인이라면 이 여자를 죽이는 것은 살인이었다. 살인이라니.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우습게도 리쯔에게 식인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지만 살인은 천륜을 어기는 무서운 행동이다. ‘먹이가 아닌 것은’ 죽여본 적도 없고 죽이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싼니앙즈를 살해하려는 동기는 어디까지나 정체가 탄로 나 사람들에게 쫓길 것을 염려한 것뿐이었다.

 

그에 반해 싼니앙즈에게 살인과 식인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녀는 죄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잡아 처리한 뒤 시체를 갈아 만두소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판매한다. 리쯔가 무차별적으로 백인 남성을 잡아먹은 것과 다르게 싼니앙즈는 공의를 위해 대상을 심판하고 응징함으로써 식인한다. 이쯤 되면 두 사람의 식인 중 어느 것이 윤리적으로 더 옳으냐는 질문은 넌센스처럼 들린다.

 

 

 2.억압과 착취를 먹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식인행위에 윤리의식을 따지기 전에 먼저 살펴봐야 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리쯔와 싼니앙즈의 식인행위, 그 이면에는 압제에 대한 해방 욕구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리쯔의 식인은 일종의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성을 갖고 있으며 이는 인물은 의식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노르망디 아파트라는 배경 공간을 기준으로 적지 않을 만큼 자주 등장한다. 리쯔가 탔던 엘레베이터에 ‘중국인은 출입 금지’라는 표지가 붙은 것, 프랑스인 아이가 그를 더러 푸만추라 지칭하고 아이의 엄마가 그를 사나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등 이런 제국-식민의 구도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 구도는 리쯔의 식인 대상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그가 처음 먹은 붉은 머리칼의 프랑스인은 아파트먼트 문을 열어주며 뭐라고 욕을 지껄였고, 극장에서 먹었던 이들 역시 모노클을 쓴 나이든 중년 신사(식민지역 상류 인사)’, ‘땀 냄새가 나던 해병(제국주의 침략군)’으로 제국주의와 직, 간접적인 연관이 존재했다. 식인 피해자들의 무고하지 않음을 더 정확히 표현한 문장은 싼니앙즈와 처음 만나는 부분에 등장한다.

 

내 지갑에 들어있는 돈들은 모두 죽은 양놈들의 몸에서 나온 돈들이었다. 보이지 않는 피가 묻은 돈. 양놈의 피가 아닌 중국인의 피가 묻은 돈이었다.’

 

아무리 범법자가 아니라 한들 조계지에서 활동하는 제국의 시민들은 결국 수탈의 주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위치에 놓여 있으며, 그렇기에 그들의 돈은 식민지 피지배층의 피가 묻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리쯔의 시각인 셈이다.

 

리쯔의 식인이 제국주의로부터 탈구하려는 저항의 의미였다면 싼니앙즈의 식인은 여성해방과 민중해방의 위치에 놓여 있는 듯 보인다.

 

여성만 대상으로 골라 살해하는 연쇄살인범과 ‘사람이 많으면 죽는 이가 많은 것이 당연하다는 궤변으로 사건을 일관하는 중국인 순경들은 각각 여성에게 가해지는 범죄와 이를 방관하는 무력한 사회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 울긋불긋 차파오를 입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매춘부 자경단의 이미지가 던지는 메시지는 노골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렇게 잡아들인 외국인 범죄자들의 시체를 샤오롱빠오로 만들어 육식의 날에 사람들에게 대접한다는 점 역시 괴기하지만, 한편으로는 홍길동과 같은 설화 속 의적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재료가 사람이라는 점만 문제 삼지 않는다면, 아주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고기를 민중에게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3.싼니앙즈의 식탁

 

소설의 갈등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리쯔와 싼니앙즈는 첫 만남부터 서로를 살인대상으로 삼지만, 이 갈등은 싼니앙즈의 농탕에서 오해가 풀림으로써 쉬이 해소된다. 이 시점에서 두 사람은 공통의 사냥감을 갖게 되는데,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양놈’이라는 존재는 양자의 식성을 모두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공통의 사냥감을 처리하는 과정에선 싼니앙즈가 일방적으로 리쯔의 도움을 받는 듯이 그려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싼니앙즈가 리쯔와 비교하여 수동적인 인물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의식의 변화를 나타내며 상대에게 감화되는 쪽은 리쯔에 가깝다. 첫 만남 이후 리쯔는 노르망디 아파트에서 식인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규칙까지 깨버린 채 싼니앙즈를 찾는 것에 몰두하게 된다. 본인의 정체가 탄로 날 위기를 감수하면서까지 말이다.

 

결정적으로, 리쯔가 연쇄살인범을 처치하고 싼니앙즈와 재회하는 부분에서 리쯔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서 놀랍게도 ‘위장의 허기’를 느낀다.

 

상하이에 양놈들이 이렇게 많으니 양놈 몇 명 죽어 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

 

양놈이라고 다 죽어도 되는 건 아냐. 죽어도 되는 건 나쁜 놈들뿐이지.”

 

그녀의 말에 난 흠하고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그녀의 식인과 나의 식인은 동일한 개념이 아닌 듯했다. 상관없었다. 난 그녀의 식인 방식에 맞춰줄 의향이 있었으니까.

 

꼬르르륵

 

혼을 먹던 식인자가 물리적인 식욕을 갖게 된다. 매우 의미심장한 변화다. 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소설의 이 층위까지 이르게 된 독자들의 온전한 몫이다. 어찌 보면 무력한 개화 지식인이었던 리쯔가 싼니앙즈라는 인물을 거쳐 민중 속으로 녹아들었다고 해석될 여지도 있다. 아니면 여성, 계급적 약자를 이해하고 그들과 연대하기까지의 경로를 그린 소설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싼니앙즈가 리쯔에게 어떠한 목적성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리쯔는 역사 속 사례를 들어 본인의 식인행위를 두둔하는 자세를 취하면서도 정작 싼니앙즈의 샤오롱빠오를 두고는 사람의 육즙이 떨어지는 만두라 평하며 야만적으로 대하는 모순을 가진 인물이다. 이는 당대 모던보이를 자칭했던 청의 식자층이 가진 면모와 일부 비슷함을 공유한다.

 

목적도 의식도 없이 양인에 대한 적의를 품고 식인하던 리쯔가 식인만두의 거부감을 내려놓고 싼니앙즈의 식탁에 앉은 것은 그 자체로 분노해야 할 대상을 명확히 정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냥감과 입을 맞추고 숨을 빨아들이던 모던보이 강시의 변화에 조금 질겁하는 독자분들도 분명 있을 수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곱씹어보자,

 

싼니앙즈의 식탁은 억압된 식민계층과 약자, 소수자의 해방창구가 되는 공간으로, 권력이 휘두르는 범죄에 대해 그들만의 정의가 벌어지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대의 모던보이들 같은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작품에서도 언급했듯이 식인은 문명사회 이전부터 행해졌던 우리의 오랜 풍습이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미뇨넷호와 보이드호의 식인사건을 보아도 우리는 그곳에서 윤리적 비판점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비슷한 이유로, 당신과 나는 라오샹하이의 바깥에 존재하는 제 3자이기에 이 식인자들을 함부로 단죄할 수 없다. 이는 당시의 상하이를 감싸고 돌았던 제국주의와 소수, 약자에 대한 폭력이 식인행위보다 덜 야만적이라고 단언할 수 없기에 더더욱 그렇다.

 

 

 

* 사족을 달자면 농탕의 샤오롱빠오 가게는 수호지의 인물 ‘장청과 손이랑’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 보인다. 여주인이 마취약을 먹여 길손을 잠재우는 것과 그들을 만두소로 만들어 파는 일, 결말부에 리쯔와 싼니앙즈가 한 짝을 이루는 일 등의 구도에서 유사함을 보인다. 다만 희생자를 고르는 남녀의 역할이 수호지와는 반대되었다는 것이 재미있는 점이다. 수호지에선 남편인 장청이 의인을 보호하고 아내인 손이랑이 무차별적인 범행을 저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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