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서가에서 대하소설이 사라지기 시작한 지도 제법 오래 되었습니다. 한때 ‘소설’ 좀 읽었다고 하면 당연히 로망 플뢰브(roman fleuve), 말 그대로 ‘대하소설’을 가리키던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죠. 큰 강처럼 유구히 흐르는 역사의 물결 아래 개인과 개인이 직접 몸으로 부딪혀가며 빚어낸 삶의 궤적을 그리던 그 장르는 이제 어째서 아무도 찾는 일이 없게 되어버린 것일까요. 분명 그런 읽을거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잦아들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특히나 최근 들어 이 장르에서 여성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들이 세계 각국에서 등장하고 있는 데에 좀 더 주목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봐야하겠죠.
오늘 이야기할 ⟪뜨거운 동토⟫ 역시 비슷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역사에 관심있으신 분이시라면 다들 잘 아시겠지만 핀란드는 유럽에서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나라지요. 물론 그 배경에는 제정 러시아의 지배와 독립, 민족주의의 발흥과 이전 지배계층의 몰락 등의 여러 사건들이 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평범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에 더 없이 흥미로운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혼란기를 배경으로(이후 전쟁으로 인한 더 큰 혼란이 찾아오게 되지만) 소설 내의 인물과 실제 역사를 교차시켜, 많은 대하소설들에서 그저 민중의 목소리(Vox populi) 중 하나로만 대접받던 여성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이 작품의 목표입니다. 굉장히 야심찬 기획이지요.
야심찬 기획이란, 다시 말해 어렵고 지난하고 고된 기획이란 의미기도 하죠. 2018년 10월 14일 현재 연재된 분량으로 보면 1906년의 의회 성립부터 1918년의 핀란드 내전까지 다루려고 하는데요, 이걸 다루려면 당연히 시작부터 독자가 1차 세계대전부터 러시아 2월혁명, 소비에트 연방 설립까지의 역사적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해야하는데…. 사실 한국인 독자들 중에 가까운 나라도 아니고, 유라시아 반대편에 있는 나라의 복잡한 근현대사를 꿰고 있을 독자층을 찾기란 꽤 어렵죠. 그렇다고 해서 안 짚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2월 혁명은 3월에 일어났는데 대체 왜 2월 혁명이라고 부르는가?’와 같은 아주 기초적인 질문들에 그때그때 주석을 달 순 없잖아요? 그래서 이 부분들은 사실 ‘해설’로 위장된 수많은 인용들로 채워집니다. 그런데 이 인용 부분이 일단 그리 친절한 편이 아니라는 걸 짚고 넘어가야 할 거에요.
앞서 왜 사람들은 이제 대하소설을 읽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시작했는데요, 사실 사람들이 대하소설에 기대하는 건 오락물로서의 기능과 동시에 독자에게 어떤 ‘(재구성된) 역사적 진실을 알려주는’ 일종의 교양물이라는 요소가 분명 있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그런 부분은 대하소설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채워줄 수 있는 다른 미디어가 이미 많이 나와있죠. TV 프로그램이라던가, 유튜브 역사 동영상이라던가. 이 작품에서 해설이 좋게 말하자면 한 발자국 물러난, 나쁘게 말하자면 이야기에 개입하지 않고 무색무취한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그러한 (선동)매체와 일정한 선을 그어두고자 하는 작가의 기본 입장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겠죠. 그 선을 지킨 대신 잃어버린 게 있다면 그것은 ‘독자가 몰입할 수 있는 부분’ 아닐까 싶어요. 사건을 그저 언급하는 것만으로는 이미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독자에게만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잘 모르는 독자에게는 그다지 와닿지 않을 수밖에 없겠죠.
주인공과 사건 전개가 개별적으로 따로 움직이는 것도 거기에 한 몫 합니다. 주인공(protagonist)인 에리카와 주요 사건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중편소설 두 권 분량이 지나갔지만 여기서 에리카의 역할은 사정상 주요 사건이 진행되는 곳 근처를 멤돌다 다음 번 사건이 진행되는 곳 근처로 건너뛰는 것밖에 하지 않죠. 물론 에리카가 사건의 주요 등장인물이 되지 않는 것은 ‘역사의 도도한 물결에 흽쓸릴 뿐인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겠지만, 동시에 자신만의 특별한 열망도, 어떤 의문도 갖지 않은 몰개성한 인물로만 기능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특히 이오시프 스탈린 같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그 행적이 잘 알려진 실존 인물이 이야기 속에 등장할 때는 더욱 그 입지가 약화됩니다. 독자의 시선이 오랫동안 봐온 주인공이 아니라 실제 역사적 인물에게로 쏠려버리고 말 거든요. 프랑스 6월 봉기를 다룬 ⟪레 미제라블⟫과 프랑스 혁명을 다룬 ⟪두 도시 이야기⟫에서도 실존 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소설들을 읽으면서 실존 인물에게 시선이 가진 않죠. 그보다 훨씬 더 강렬한 소설 속 등장인물이 이미 있으니까.
에리카와 그 주변 인물들의 언행이 한국어 구어체로 묘사되어 있는 것도 대단히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독자의 몰입을 방해합니다. 물론 이것은 소설이고, 소설의 문장은 당대의 현실 독자들이 가진 언중 체계을 반영하기 마련이기에 큰 흠까진 아니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거대한 규모의 역사물에서 사용되기에 그리 잘 어울리진 않는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겠지요. 일단은 정보량이 너무 적어요. 감정 표현의 많은 수가 말줄임표로 처리되어 있는 것도 불만스럽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마냥 등장할 때마다 저마다의 사상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을 필요까진 없겠지만, 작중 인물의 외양과 출신은 커녕 속내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와중에 인물간의 관계에 특별한 변화도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등장 인물들이 그냥 이름만 나온 채 버려집니다. 물론 작가도 그 점을 고려해서 곳곳에 고유의 어휘나 생활 양식, 핀란드식 속어 등을 집어넣었지만 그게 정말 잘 기능한다고는 보기 어렵죠. 왜냐하면 그것은 ‘디테일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디테일이 없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것’이니까요. 이 작품에서 단 하나 결점을 말하자면 바로 이 점일 거에요. 너무나 원대한 목표를 설정한 나머지, 거기까지 가기 위해 채워넣을 밑거름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아직까지는요.
다만 여기서 언급한 문제들은 아직 연재 중이기에 좀 더 긴 호흡을 가져가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까진 아닐 거에요. 현재 연재된 분량이 원래 구상의 도입부의 극히 일부 정도고, 앞서 연재된 부분은 사실 그저 인물과 배경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정도일 테니까요. 종이잡지에서 분리되어 나온 웹툰이 그랬듯이, 연재소설은 이제 과거 단행본 단위로 분량을 재던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호흡을 가져가고 있고 그 가능성은 아직 다 파해쳐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분명 거기에는 짧은 호흡과 아주 긴 호흡이 동시에 공존할 것이며, 긴 호흡에는 거기 걸맞는 그런 크기의 서사가 들어서게 되겠죠. 만약 그런 지점이 생겨난다면 ⟪뜨거운 동토⟫야말로 그를 위해 예비된 자리가 되겠죠. 그 커다란 꿈이 구체적인 결실을 맺을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