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그냥 단순한 감상문이에요 공모(비평)

대상작품: 그건 그냥 단순한 농담이었어요 (작가: 리리브, 작품정보)
리뷰어: 뿡아, 3시간 전, 조회 4

 

 

* 결말을 포함합니다.

 

 

주제와 소재 간의 긴밀성

제가 보기에 <그건 그냥 단순한 농담이었어요>는 ‘소재가 주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만약 주제를 얼마나 적절한 소재로 잘 표현했는지에 대한 분포도를 그릴 수 있다면, 이 소설은 해당 주제를 표현한 픽션들 중에서 핵심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을 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작가 코멘트’를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주인공이 한 말은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이 소설은 열린 결말입니다.

방금 제가 한 말 역시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문구는 이야기를 소설 안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작품 바깥까지 ‘거대한 농담’으로 확장하는 메타 텍스트 역할을 합니다. ‘농담과 진실’이라는 소설의 주요 테마와 매우 잘 어울리기도 하죠. 넓게 본다면 작가 코멘트와 이 작품을 소개하는 태도까지가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열린 결말과 그 상상

이 소설은 초반에는 진실과 오해 위에서 줄타기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화자를 범인에 가깝도록 몰고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의 오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정확한 결론을 맺지 않은 채, ‘열린 결말’로 끝이 나는데요. 이런 불분명한 결말은 ‘진실’과 ‘거짓’ 사이에 서 있는 ‘농담’이라는 주제와 매우 잘 어울립니다. 아니,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결말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한편으로 아쉽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소설을 끝까지 읽어도 이 이야기가 문화적 차이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비극인지, 화자의 교활한 변명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결말을 상상해 보자면 세 가지 케이스로 나타날 것이며, 이는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효과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1. 이 모든 것이 단순히 ‘문화적 차이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비극’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가능성이 낮아 보이긴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모든 사건의 진상이 초반부에 제시된 것처럼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오해라고 밝혀졌다면, 독자는 ‘문화 간의 차이를 이해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과, ‘섣부른 판단이 초래한 결과’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2. 이 모든 것이 그저 ‘교활한 변명’으로 밝혀진다면

이런 경우라면, 독자는 ‘어째서 그런 식의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위기를 모면하려 했을까’, ‘친척까지 사건에 이용하고 빠져나가려 하다니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말 무섭다.’라는 식의 공분감을 일으키는 동시에, 진실이 밝혀졌다는 카타르시스를 느낄지도 모릅니다.

 

3. ‘부분적 거짓말’로 드러난다면

1과 2가 복합된 결말입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이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입니다. 즉, 앞부분은 문화적 차이에서 발생한 오해가 맞으나, 결말 부분은 오해가 아닌 ‘미필적 고의’로 드러났다면 어떨까요? 독자는 1에서 느낄 수 있는 ‘문화적 차이에서의 비극’과, ‘인간의 악의’에 대한 두 가지 성찰을 함께 느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작가님께서는 이 세 가지 중에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처럼 단순한 독자는, ‘그래서 화자의 말이 진짜야 가짜야?’라는 아리송한 진실 게임 앞에 놓입니다.

명확한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게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면, 화자는 얼마나 억울할까? 문화적 차이라는 게 정말 큰 문제구나’라거나, ‘친척을 그렇게까지 이용하다니, 인간이란 얼마나 교활하고 무서운 존재인가.’라는 사유에 충분히 진입하지 못하고 망설이게 됩니다. 말하자면 뿌연 안개 속에 가려진 채 ‘뭐가 진실인지 몰라서’ 더 깊은 감상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느낌입니다.

이야기를 공중에 띄워두지 말고, 1인칭 독백의 형식미를 깨뜨리고서라도, ‘그는 일급 살인으로 수감되었다’라는 식으로 어느 정도 마무리를 지었다면 어땠을까요? 농담의 묘미는 지금만큼 살지는 못했을지라도, 진실게임에 에너지를 쏟을 필요없이 독자에게 더욱 깊은 사유의 기회를 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양자를 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작가님께서는 ‘선명한 딜레마’ 대신에, ‘농담의 오묘함’을 선택하신 듯합니다. 이는 다른 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끝까지 진위를 알 수 없는 스릴러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작가님께서 펼쳐놓으신 ‘인간의 악의’와 ‘언어차이, 문화적 장벽’이라는 테마에 더 큰 감흥을 느꼈거든요. 그래서 이러한 메시지가 진실을 알 수 없는 농담에 소비된다는 느낌보다는 더 진지하게 나타난 버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인물의 이름에 대하여

화자를 제외한 등장인물의 이름을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케일럽, 제이크. 클로이, 트레이, 줄리아. 레오

등장인물 이름들이 좀 비슷하단 인상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이 3음절의 이름이며, ‘ㄹ’과 ‘ㅇ’이 들어갑니다. 이게 좀 헷갈린다는 느낌이 들었는데요, 가령 저 같으면 한 소설 내에서의 이름을 ‘민혁, 민수, 수진, 준석, 수혁’ 이런 식으로 지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일단 쓰는 저부터가 헷갈리니까요.

그런데, 이 혼란을 작가님께서 ‘의도’하신 게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Jake, Chloe라고 원어로 표기하면 혼란은 훨씬 줄어들죠.

더 확실한 예를 들자면, George와 Joy는 영어 철자로는 확연히 다르지만, 이걸 한국어로 표기한 ‘조지’와 ‘조이’는 자음 한 글자만 빼고 똑같아져 버리죠. 꿈보다 해몽일 수도 있지만, 즉, 이것이 ‘영어가 한국어로 번역되었을 때의 차이’를 의도하여 혼란을 준, 일종의 언어장벽에 대한 알레고리 같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다른 독자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읽는데, 단순히 제 머리가 나빠서 그런 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혼란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가독성을 해치면서까지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싶기는 합니다. 인물의 이름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자꾸만 멈칫하게 되었거든요.

그럼에도 ‘이것조차 의도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줄곧 들었단 건, 그만큼 이 소설이 치밀하고 강렬하게 느껴졌단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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