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전체가 스포입니다.
짧은 소설이라서 스포 없이 리뷰를 쓸 수 없었습니다.
작품을 먼저 읽으신 후에, 리뷰도 봐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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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 그리고 스푼」을 읽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것은 곰인형 아저씨도, 망치도, 피도 아니었다. 마지막 식탁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괴담으로 읽힌다. 외로운 아이가 TV 속 수상한 프로그램에 이끌려 끔찍한 일을 당하는 이야기. 하지만 작품을 곱씹을수록 이 소설은 공포보다도 결핍에 관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나야는 세상으로부터 지워진 아이다.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고 학교도 다니지 않는다. 친구도 없고, 세상을 배우는 창구는 오직 TV뿐이다. 그런 나야가 <수프 그리고 스푼>을 보며 부러워한 것은 사실 수프가 아니었을 것이다. 함께 웃고, 함께 놀고,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배고픔보다 외로움에 더 취약하다는 말이 있다. 나야가 굶주린 것은 음식만이 아니었다.
그래서 곰인형 아저씨는 더욱 기괴하다. 그는 아이들을 협박하지 않는다. 오히려 놀아주고, 이름을 불러주고, 맛있는 수프를 먹여주겠다고 약속한다. 어쩌면 아이들을 유인한 것은 악의가 아니라 아이들이 평생 갈망해왔던 돌봄의 언어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작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내가 정말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마지막에 아이들이 ‘투명해지는’ 장면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귀신이 되었다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읽으니 그것은 죽음의 묘사라기보다 존재의 소멸에 가까워 보였다.
생각해보면 나야는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투명한 아이였다. 국가의 기록에도 없고, 학교에도 없고, 누구의 관심 속에도 없었다. 죽은 뒤에 투명해진 것은 어쩌면 처음으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가 끝내 보지 않았던 아이들 말이다.
동시에 그들은 더 이상 스푼을 들 수 없다. 수프를 먹을 수도 없다. 식탁 앞에 앉아 있지만 영원히 배를 채울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 모습은 마치 욕망만 남고 몸은 사라진 존재처럼 보인다. 살아생전 원했던 것은 따뜻한 식사와 누군가의 관심이었는데, 죽은 뒤에도 그 결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캠코더다. 작가는 이상할 정도로 카메라를 강조한다. 외눈박이 렌즈,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시선. 마지막까지 캠코더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문득 깨닫게 된다. 이 작품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곰인형 아저씨가 아니라 카메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TV를 보며 자란 아이는 결국 TV 속 아이가 된다.
살아 있는 인간이었던 아이들은 죽은 뒤에도 식탁에 앉아 반복 재생되는 이미지가 된다. 투명한 아이들은 귀신이라기보다 영상 속 인물에 가깝다. 거기에 존재하지만 만질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스스로 숟가락조차 들 수 없는 존재.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콘텐츠가 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은 단순한 공포의 여운이 아니다.
“앞으로도 이곳을 방문할 아이들을 위해서.”
그 문장을 읽는 순간, 곰인형 아저씨의 집이 살인 현장이 아니라 하나의 스튜디오처럼 느껴졌다. 외로운 아이들이 계속 찾아오고, 기록되고, 소비되고, 다시 다음 아이들을 유혹하는 장소.
따뜻한 제목과 달리, 「수프 그리고 스푼」은 외로움이 어떻게 이미지가 되고 소비되는지 보여주는 몹시 서늘한 우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