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항해하던 컨테이너선이 절반이 자로 잰 듯 소실된 상태로 인양된다.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일상적이고 친근한 드라마로 시작되는 듯싶던 김민주 작가의 배니싱 트윈(Vanishing Twin)은 이와 같은 충격적인 사건을 제시하며 본격적인 이야기의 서두를 연다.
이야기는 화자인 강현서 사원이 항만에서 선체 전방이 절단된 선박을 확인하는 대목부터 압도적인 시각적 인상을 전달한다. 컨테이너 2000개가 적재된 피더선을 가정하면 해당 선박은 길이가 축구장 가로길이보다 길고, 폭은 대왕고래 한 마리의 길이에 맞먹으며, 적재된 컨테이너까지 포함한 중심부 높이는 아파트 5층 정도 되는 거대하고 위압적인 금속 덩어리일 것이다. 그와 같은 육중한 구조물에 가해진,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기에 지극히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손상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한 화자의 공포를 기술하면서, 이야기는 이 불가해한 현상 뒤편에 도사린 원흉의 강대함을 암시하고 그 앞에 선 인간의 무력감을 이미지로 각인시킨다.
그러나 그 지점에서 배의 잔해를 목격한 화자가 해당 사건을 ‘내 삶에서 한 번은 꼭 일어나야 하는 필연적인 일’이라 의미심장하게 정의하면서, 이야기는 초반부터 심리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또 하나의 미스터리와 뒤얽힌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반부에서 주어지는 회상은 화자의 심리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던져준다. 바로 주인공이 태내에서 배니싱 트윈이라는 현상을 겪고 탄생한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묘사에 따르면 화자에게 배니싱 트윈 현상은 단순한 의학적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 화자에게 그 사건은 일종의 발생학적 재난으로 해석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화자는 모친으로부터 소실된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소실’이 ‘두려운’ 사건이라는 인식(‘엄마는 나까지 잃고 말까 봐 두려웠다고 했다’)을 전달받고 자신의 태명이 가진 의미를 분석하며 소실에 ‘부정적’ 정서를 결부시켰다(‘왜 나는 모든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해가 될 수는 없었는지를.’). 뒤이어 자신이 자칫 소실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는 위기를 상상 속에서 재경험하고(‘내가 비실거리는 동안 햇님은 생명력을 뿜어냈다’), 상대방 대신 자신이 생존했다고 받아들이며 죄책감을 느끼기까지 한다(‘사랑받아 마땅해서라기보다는 남은 것이 나뿐이라 어쩔 수 없이 거두어진 것만 같았다’).
그런 화자에게 개체의 절반이 사라지는 현상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화자는 일종의 재난 생존자로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으며(‘햇님이 사라졌을 때, 엄마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화자에게 가장 두려운 생각은 자신이 겪은 위기와 자신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어떠한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건강히 잘 자라던 애가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걸까.’)이 드러나는 상황이다. 그것은 자신이 상대방 대신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믿음을 영원히 상실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나는 머리를 늘 짧게 두지만 햇님은 허리까지 길러 냈을 수도 있다. 나는 긴 치마를 자주 입지만 햇님은 짧은 반바지를 즐겨 입었을 수도 있다.’). 화자는 재난의 고통을 딛고 스스로에게 가치 있는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내지 못한 상태였고(‘특별한 이유 없이 어딘가 마음이 쓰이는 찜찜한 것. 햇님은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때문에 자신의 재난을 우주적 질서에 결부시키면 자기 경험과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나는 내 온몸을 순환하는 뜨거운 피의 흐름마저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찾으러 ‘자동반사적’으로 도달한 학회장에서 화자가 마주한 것은 결국 어떠한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차갑고 공허한 물리적 인과의 더미였다. 그리고 그 즉시, 화자 스스로가 느끼는 자기 존재의 정당성은 질량의 절반이 사라지는 외부 재난의 원인을 설명하는 언어까지 흡수하며 극단적으로 약화된다(‘내게 햇님이라는 존재가 거부할 수 없는 블랙홀의 중력과 같다면, 내가 햇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꼭두각시인 게 당연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의미 부여의 기회로부터 이탈하며 재난의 무의미성에 대항할 마지막 힘을 잃자, ‘단단한 개체’가 되기를 포기한 화자의 마음 속에는 허탈과 냉소만이 가득 채워진다(‘이렇게나 연약할 거라면 나는 무엇을 위해 내 삶을 들여 단단한 개체가 되고 싶었던 걸까.’) (‘내 발이 딛고 선 이 땅이 …. 그러니까, 정보 값의 투사 결과에 불과한 것이었다.’)
화자가 이와 같이 심리적으로 극과 극을 오가는 동안 물리적 재난은 무심하게 세계를 집어 삼킨다. 선박이 동강나는 재난에서 해양 생물을 거쳐 결국 인간의 정신과 신체까지 소실되는 파국 속에서 화자는 의도치 않게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해방의 단서를 찾는다. 자신이 살아남고 상대방은 소실되었다는 공간적 비대칭이 사라지고 ‘한데 편평해져’ 버림으로써 화자는 자신이 햇님과 동등한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원래의 몸이 소실된 그 자리에서야, 마침내 화자는 죄책감을 벗어 던지고 비로소 온전한 자신으로서 난생 처음 존재할 수 있게 된다는 역설을 경험하게 된다(‘진정으로 온전해지는 순간이다.’).
고통을 경험한 인간이 얼마나 의미를 갈구하는지를, 그리고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상실한 경험이 인간의 정신에 어떠한 상흔을 남기는지를 스케일 큰 물리적 파국의 스펙터클과 재난처럼 해석된 배니싱 트윈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감싸 전달하는 김민주 작가의 <배니싱 트윈>. 이 작품은 이유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의미를 구축해내는 대신 문학적 방법을 통해 우리를 이유가 필요 없는 가상적인 차원으로 소환함으로써 의미에 대한 집착 자체를 벗어 던지는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비록 작중의 화자는 개체의 소실을 겪은 후에야 평온을 얻어낼 수 있었지만, 화자의 이야기를 읽은 우리에게는 화자의 파국이 전달한 문학적 경험을 단서로 스스로를 잃어버리기 전에 의미에 대한 또다른 태도를 발견할 가능성이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