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우리는 만두로 진화 중일지도 감상

대상작품: 우리가 찜통 속 만두라면? 거기에 누군가가 실험을 하고 있는 거라면? (작가: 유혁,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46분 전, 조회 7

우리나라는 여름만 되면 뉴스에 날씨 얘기가 나올때마다 ‘찜통 더위’라는 말이 기본으로 붙어 있는 나라다. 습도도 높고 기온도 높다.

이 소설이 올라왔던 2022년 서울의 기온을 찾아봤다. 6월 21일에 이미 최고기온이 32.6도였다. 7월 30일 최고기온 36도. 그리고 9월 어느 날 최고기온이 32.5도까지 치솟았다가 하루이틀사이에 최저기온 13도, 최고기온 25도까지 떨어진다.

올해를 보자. 며칠 전에 결국 서울은 40도를 찍었다. 오늘 최저기온은 22도였다.

하루이틀만에 20도를 오가는 날씨. 말 그대로 ‘인간 자체가 강한’게 아니고서야 이 나라에서는 버티고 살기가 참 힘들다. 이러다가 내내 온도가 오르내리다가 겨울 될 쯤에서 또다시 하루에 20도 가까이 떨어지겠지.

이쯤되면 항간에 도는 농담처럼 환웅 할아버지가 부동산 사기를 당했거나, 귀양을 온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잠시. 우리 까놓고 말해보자.

오늘 낮에 더웠는가?

아마 절반 이상은 ‘시원했다’라고 말할 것 같다. 바람도 강했고, 최고기온은 27~8도 정도였다. 사실 햇빛의 세기나 기온 자체만 본다면 ‘약간 덥다’ 라고 말하는 게 더 맞는 온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원했다.’ 아마 30도 정도로 떨어졌을 때 ‘어 갑자기 춥다’ 라고 말한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낮기온이 20도 이하로 내려가는 정도는 되어야 시원하다고 느낄 정도로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다. 아니, 체질이’었’다. 그런 나조차도 지금 ‘시원하다’라고 느끼는 중이다. 현재 저녁 이시간, 선풍기조차 돌리지 않고 있으니까. 40도를 육박하던 날씨가 갑자기 20도 가까이 떨어졌으니 뭐.

어쩌면 이것을 ‘진화’라고 불러야 될지도 모르겠다. 열대야 기간은 점차 늘어날 것이고, 40도 가까이 되는 날도 점차 늘 것이다. 여름이라 부르는 기간도 늘어날 것이고, 봄과 가을은 더 짧아서 며칠 안에 끝나는 계절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몸이 점차 높은 기온에 적응해가고 있다. 30도 정도는 시원하게 느끼는 게 정말로 일상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더운 날이 오래 지속되니 사람이 안 미치면 그것도 이상할 지경일 것이다.


[코스믹 호러로 시작해서]

처음에 이 소설은 마치 ‘코스믹 호러’처럼 시작한다. 너무 더워서 가난한 사람들은 어영부영 죽어가고, 그 사실조차도 어영부영 묻히던 어느 날, 하늘에서 누가 봐도 ‘젓가락’같이 생긴 긴 막대기 두 개가 내려와 사람들을 꿰뚫기 시작한다. 대화도, 협상도, 심지어 적개심조차 느껴지지 않는 압도적인 무언가. 인류가 가진 최첨단 무기도, 세계 최고의 과학자와 언어학자도 이 존재 앞에서는 무력하다.

이유도 목적도 설명되지 않은 채 그저 ‘집히고, 찔리고, 찢기는’ 폭력만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젓가락은 러브크래프트적인 공포의 문법을 아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초차원적인 공포 앞에서 인류가 택한 대응 방식이다. 사람들은 이 존재를 이해하려 하는 대신 ‘신’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만두교’다.

껍질로 소를 감싸는 만두라는 음식이 전 세계 어디에나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근거로, 인류는 스스로를 ‘찜통 속 만두’로 정의하고 젓가락의 주인을 신으로 섬긴다. 성당과 교회는 ‘찜통’이라 불리고, 승천은 신자에게 가장 영예로운 죽음이 된다. 젓가락에 찔려 죽은 사람은 반대로 ‘속이 안 익은 만두’, 즉 천벌 받은 자 취급을 받는다.

 

[종교라는 이름의 익숙한 탐욕]

만두교의 교리가 처음엔 웃기다가 점점 씁쓸해지는 지점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다. 주일마다 만두를 빚는다든지 하는 애교스러운 디테일에서 시작해서, 비신자에게 저주를 퍼붓고, 거대한 ‘찜통’을 짓기 위해 강제로 헌금을 걷고, 급기야 유명 냉동만두 회사가 만두교에 청탁을 넣어 부당하게 매출을 올린 사실까지 드러난다. 인류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은 초자연적 존재보다, 그 공포를 이용해 돈을 긁어모으는 인간들의 모습이 훨씬 더 적나라하고 익숙한 공포로 다가온다. 자신이 천국으로 승천했다가 지구라는 찜통에 남아 고통받고 있는 설익은 만두들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왔다고 주장하는, 누가봐도 예수의 열화판 사기꾼들의 존재는, 이 소설이 외계의 공포를 빌려 결국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인간군상들의 민낯을 겨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전, 그리고 무너지는 경계]

그렇게 화자는 결국 사이비 종교 시설에 갇혀 다단계 교육을 받다가 진짜 젓가락의 습격을 맞이하고, 붙들려 하늘로 ‘승천’하며 거대한 입 속으로 던져진다. “나는 한입거리 만두.”

여기서 한 챕터가 끝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면서, 지금까지 읽은 모든 이야기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화자의 앞자리에 있던 노숙자 아저씨의 ‘헛소리’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젓가락도, 만두교도, 승천도, 그 모든 거대하고 우주적인 공포가 사실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한 사람의 망상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 전환이 이 소설을 재난물이나 종교 풍자를 넘어서게 만드는 지점이다.

아저씨는 결국 병원 앞 나무에서, 나뭇가지 두 개가 몸통을 꿰뚫은 채로 발견된다. 타살인지 자살인지 알 수 없는 죽음. 하지만 화자는 그것이 “아저씨가 원하는 죽음”이었으리라고 말한다.

아저씨가 그토록 이야기하던 젓가락이, 결국 현실에서도 그를 찔렀다는 이 오싹한 장면은 독자에게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 망상과 현실의 경계, 은유와 실제의 경계가 마지막 문장이자 이 소설의 제목에서 완전히 허물어진다.

우리가 “정말로” 찜통 속 만두라면? 거기에 누군가가 실험을 하고 있는 거라면?

 

리뷰 서두에 적었듯, 이 소설이 올라온 2022년의 폭염과 지금의 폭염을 나란히 놓고 보면 소설이 그리는 ‘기후 위기의 일상화’가 과장이 아니라 사실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게, 아니 이미 기정사실이고 점점 극심해지고 있다는 게 가장 소름 끼친다. 소설 속에서 사람들이 “이상기후로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별 생각을 가지지 않”고, 몇 달째 오지 않는 에어컨 수리기사에 적응하며 ‘익숙해지는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지금 우리가 40도를 찍고 며칠 뒤 30도로 떨어지니 ‘시원하다’고 느끼는 감각의 마비와 정확히 겹친다.

소설은 거대한 외계의 공포(젓가락)를 통해 정작 우리를 갉아먹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진행되는 재난과, 그 재난을 견디다 못해 조용히 무너지는 소외된 개인이라는 걸 말하고 있다. 만두교라는 우스꽝스러운 장치는 그 공포와 고립을 감당할 수 없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방어기제이자, 동시에 그 공포를 이용해먹는 또 다른 착취 구조가 아닐까.

이 여름, 언젠가 또다시 폭염 특보가 울릴 때 문득 이 소설이 생각난다면, 우리는 이미 찜통 속 만두로 ‘진화’ 중인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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