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Grief)의 5단계를 거쳐 나의 ‘장례식’으로 가는 여정 감상

대상작품: 나의 첫 장례식 (작가: 박꼼삐,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4시간 전, 조회 8

줄거리

 

Grief의 5단계로 본 화자의 여정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제시한 애도(grief)의 5단계는 ‘부정(Denial) → 분노(Anger) → 협상(Bargaining) → 우울(Depression) → 수용(Acceptance)’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화자는 전형적인 단계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부정 → 탐색 → 혼란 → 깨달음 → 수용’이라는 변형된 경로를 걷는다.

 

1단계: 부정(Denial) – “내가 알고 있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소설은 “누나가 죽었다”는 직선적 선언으로 시작하지만, 화자는 실제로 그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다.

“대답을 하면서도 나는 누나의 시체에서 눈을 뺄 수가 없었다. 내가 알고 있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죽은 사람이 ‘다른 사람 같다’는 것은 죽음의 부정이다. 화자는 누나가 죽었다는 사실은 인지하지만, 그것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장례식 3일의 기억이 “흐릿할 정도”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의식은 있으나 실감은 없는 상태. 관 속에 누운 누나의 얼굴을 보고서야 “조금 내가 알던 누나가 정말로 죽었다는 실감”이 들지만, 이것은 부정의 종료가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부정의 시작이다. “하지만 왜?” “무엇 때문에?” 화자는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이유를 부정한다.
전통적인 애도의 5단계에서 분노는 부정 다음에 오지만, 이 화자는 분노하지 않는다. 대신 의문을 품는다. 이것이 이 소설의 독특한 지점이다. 화자의 애도는 감정적 폭발이 아니라 인식적 탐구의 형태를 띤다.

 

2단계: 탐색(Searching) – “뭔가가 석연치 않아서”

“장례 후에 누나의 방을 정리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였다. 뭔가가 석연치 않아서,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화자는 능동적으로 누나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방을 정리하고, 사진을 보고, 카메라를 들고 바다로 간다. 이것은 전통적인 5단계에는 없는 단계다. 하지만 실제 애도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죽은 이의 물건을 만지고, 그들이 좋아하던 장소를 찾아가고, 그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 하는 것. 이것은 죽은 이를 다시 살리려는 시도가 아니라,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시도다.

“카메라를 켜서 사진을 몇 장 넘겨보다 방파제를 찍었다. 희게 흩어지는 물방울은 잘 나오지 않는다. 역시 사진 찍는 데에는 딱히 소질이 없는 것 같다.”

화자는 누나처럼 사진을 찍으려 하지만 실패한다. 이 실패는 중요하다. 죽은 이와 같아질 수는 없다는 것, 그들의 시선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도 자체가 의미 있다. 화자는 적어도 누나에게 다가가려 노력하고 있다.

 

3단계: 혼란(Confusion) – “낯선 듯 익숙한 얼굴”

“누나는 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저렇게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은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숙소 벽의 사진에서 발견한 누나의 얼굴은 화자에게 충격이다. 화자가 알던 누나는 “잔잔하게 웃으면서 놀러 오라고 하던” 사람이었다. “작은 미소를 짓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진 속 누나는 “활짝” 웃고 있다. 이 순간 화자는 인지적 혼란에 빠진다.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실은 전혀 다른 성격의 사람이었다면?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조차 상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면?
채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혼란은 깊어진다. 사진을 좋아하고, 카페를 좋아하고, 자전거를 타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 그것은 화자가 알던 “조용하고 평범한” 누나가 아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조잘거리는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여자의 친구는 사진을 좋아한다는 점, 그리고 바다를 꽤 좋아한다는 점을 빼면 누나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다.”

화자는 여전히 부정하려 한다. ‘누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하지만 독자는 안다. 그것이 바로 누나였다는 것을. 화자가 모르던, 아니 보지 못했던 누나의 진짜 모습이었다는 것을.

 

4단계: 깨달음(Realization) – “누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나는, 누나가 잘 웃지도, 잘 울지도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 그랬는데. 누나도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과 있을 때 깔깔 웃기도 하며, 실연을 당하기도 하고, 실연을 당하면 엉엉 울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누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이 소설의 정점이자, 화자의 애도 여정에서 가장 깊은 지점이다.
소설에서 “누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문장이 두 번 반복된다. 처음에 화자는 “누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며, 자신이 알고 있던 그대로라고 확인한다. 하지만 마지막에 다시 “누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때, 그 ‘평범함’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 처음의 평범함은 ‘특별할 것 없는, 무난한’의 의미였다. 마지막의 평범함은 ‘사랑하고, 상처받고, 절망하는, 인간으로서의’라는 의미다.
화자는 채원의 결혼 이야기와 누나의 격렬한 반응을 연결하며, 누나의 죽음을 재구성한다.

“드레스를 입고, 본 적 없는 남자의 손을 잡고, 흰 카펫을 지나 단상 앞에 서고, 맹세를 하고 서약의 증표를 나누어 갖는 남녀. 신부 대기실에서 활짝 웃던 모습은 간 데 없이, 식장 밖에서 우는 여자.”

이것은 화자의 상상이지만, 동시에 화자가 도달한 진실이다. 누나는 채원을 사랑했고, 채원의 결혼은 누나에게 견딜 수 없는 상실이었다. 누나는 혼자 집에서 울었고, 약을 먹지 않았고(혹은 홧김에 쏟아버렸고), 죽었다. 이것은 자살일까, 병사일까? 어떤 죽음은 단순한 한 단어로 분류될 수 없기도 하다.

이 깨달음은 전통적인 애도의 5단계 중 ‘우울(Depression)’에 해당하지만, 성격이 다르다. 화자는 누나의 죽음에 우울해하는 것이 아니라, 누나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사실에 압도된다. 이것은 슬픔이면서 동시에 각성이다.

 

5단계: 수용(Acceptance) – “내가 가지고 있기로 했다”

“지금 눈에 들어온 알갱이들을 차마 치워버릴 수 없어서, 나는 그것을 한데 모아 가루약을 싸듯이 챙겼다. 종이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알갱이들을 내가 가지고 있기로 했다.”

이것은 진정한 수용이다. 누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하지만 그냥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기로 하는 것.

바닥의 투명한 알갱이들은 누나의 눈물이 결정화된 것이다. 눈물로 흘러내릴 수 없었던 슬픔, 말로 표현될 수 없었던 고통,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사랑. 화자는 그것을 치우지 않고 모은다. 쓰레기로 버리지 않고 간직한다.

“가루약을 싸듯이 챙겼다”는 표현이 중요하다. 가루약은 쓰다. 삼키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필요한 것이다. 화자는 누나의 고통과 죽음을, 약처럼 쓰디 쓰지만 반드시 삼켜야 할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장례식이 끝났다.”

 

 

애도란 이해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이 소설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애도’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작가가 제시하는 애도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를 이해하는 것이다.
화자는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을 것이다. 3일의 기억이 흐릿할 정도로 멍했으니까. 하지만 섬에서 돌아와 누나의 방에서, 누나가 왜 죽었는지 이해했을 때, 이 소설이 끝난 뒤에 비로소 진짜 슬픔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진정한 애도는 상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상실된 것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누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을 사랑했는지, 어떻게 고통받았는지. 그것을 이해했을 때 비로소 화자는 누나를 제대로 애도할 수 있게 된다.

 

평범함의 재발견

“누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어찌보면 이 소설의 핵심 문장이다.

처음에 화자는 누나를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특별할 것 없는, 조용한, 사진이나 좋아하는 사람. 하지만 그것은 누나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

누나와 채원의 관계는 명시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작가는 ‘퀴어’ ‘레즈비언’ ‘동성애’ 같은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는 안다. 그리고 화자도 알았을 것이다.
누나의 사랑은 말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채원에게도, 가족에게도, 아마 누나 자신에게도. 그래서 누나는 혼자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축하해줄 수도, 반대할 수도, 울부짖을 수도 없었다. 그저 혼자 방에서 울다가 죽었다. 퀴어라는 명칭이 붙는 순간, 사회가 말하는 ‘평범함’에서는 이미 멀어진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화자가 도달한 ‘평범함’은 전혀 다른 의미다. 누나도 그저 사랑하고, 질투하고, 상처받고, 절망하는—그러니까 한 인간으로서 지극히 평범한—사람이었다는 것.

 

왜 제목은 「나의 첫 번째 장례식」이어야 했는가

제목은 ‘누나의 장례식’이 아니라 ‘나의 장례식’이다.

장례식은 죽은 자를 위한 의식이다. 하지만 동시에 산 자를 위한 의식이기도 하다. 죽은 자를 보내고, 산 자는 계속 살아가기 위한 통과의례.

화자에게 이 장례식은 누나를 보내는 의식이면서, 동시에 이전의 자신을 보내는 의식이다. 타인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던 자신,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안다고 착각하던 자신, 누나를 ‘평범한 사람’으로만 치부하던 자신.
그 자신이 죽는다. 그리고 새로운 자신이 태어난다. 타인의 삶을 독립적이고 완결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자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자신, 타인의 슬픔을 짊어질 수 있는 자신.

“나의 장례식”은 이런 의미에서 화자 자신의 재탄생 의식이다.

“첫 번째”라는 수식어는 두 가지를 암시한다.

첫째, 앞으로도 장례식이 있을 것이라는 것. 삶은 계속되는 상실의 과정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씩 잃어간다. 부모, 친구, 연인, 그리고 언젠가는 자기 자신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화자는 누나의 죽음을 통해 난생 ‘처음’ 장례식이라는 걸 겪어본다. 사회적 의례로서의 장례식은 이미 끝났다. 3일간의 장례, 관에 누운 누나, 납골당. 하지만 그것은 진짜 장례식이 아니었다. 화자는 그저 절차를 밟았을 뿐, 누나를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
진짜 장례식은 섬에 다녀온 후에 이루어진다. 누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누나의 시선으로 바다를 보고, 누나의 친구를 만나고, 누나의 사랑을 이해하고, 누나의 눈물(알갱이)을 챙기는 그 모든 과정.
이것이 진짜 장례식이다. 형식적 의례가 아니라, 진심 어린 이해와 수용의 의식. 화자는 스스로 이 의식을 거쳐갔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화자는 이 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진짜 애도가 무엇인지.

둘째, 화자는 누나의 죽음을 통해 ‘처음’으로 겪은 스스로의 ‘장례식’, 통과의례,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안다. “첫 번째”라는 단어는 슬픔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성숙의 시작이다. 이제 화자는 준비되었다는 것. 첫 번째 ‘자신의’ 장례식을 치렀으니, 다음번에는 좀 더 낫거나 다를 것이다.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어떻게 애도해야 하는지는 안다.

 

절제된 슬픔의 미덕

이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절제에 있다. 작가는 독자를 울리려 하지 않는다. 감정을 과장하지도,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하고 느릿하게, 거의 무표정하다 싶을 정도의 분위기로 사건을 따라간다.
하지만 그 담담함 속에 엄청난 슬픔이 흐른다. 마치 바다처럼. 누나가 반복해서 찍었던 그 바다처럼. 표면은 잔잔하지만, 그 아래로 깊은 해류가 흐르는.
“맨날 똑같은데, 이게 뭐가 좋다고 매일같이 나가서 사진을 찍었을까”라는 화자의 질문에, 이제 우리는 답할 수 있다. 똑같아 보이는 바다도 매일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은 매일 새롭다. 그리고 누나는 그것을 알았다. 화자보다 먼저, 독자보다 먼저.

이 소설은 또한 조용한 정치적 발언이기도 하다. 퀴어의 삶과 죽음에 대해, 말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해, 혼자 울다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하지만 작가는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퀴어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정직하게 그릴 뿐이다. 투명하고 반짝이는 결정 알갱이들. 눈물이 될 수 없었던 눈물들. 표현될 수 없었던 사랑들. 화자는 그것을 가루약, 또는 가루가 된 누나의 유골을 싸듯 조심스럽게 챙긴다.

이것이 애도다. 죽은 자의 슬픔을 인정하고, 기억하고, 함께 가지고 가는 것. 쓰디쓴 약처럼 삼키는 것. 그것이 산 자의 책임이다.

그렇게, 화자의 첫 번째 장례식이 끝난다. 아니, 이제 시작된다. 진짜 애도가, 진짜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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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쓰는 글들이 (취미로 만드는) 잡지기사나 특정 설명문 같은 것들이라 리뷰톤이 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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