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파라파라, 너의 파라파라. 공모(비평)

대상작품: 귀신 무지개를 보는 소녀 (작가: 사피엔스, 작품정보)
리뷰어: 윤휘, 57분 전, 조회 9

※이 리뷰에는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57매의 짧은 글이니, 부디 읽고 오시기를 권합니다.

 

 

주관적인 별점

  • 스토리 구성: ★★★☆☆ (탐사 이야기의 뼈대는 단정한데, 밝혀진 사실과 인물들이 내린 결론이 어긋나는 자리가 있다.)
  • 인물 매력도: ★★☆☆☆ (아이샤와 삼촌은 살아 있으나, 나머지 인물들은 태도가 바뀌는 계기가 불분명해 보인다)
  • 표현 및 묘사: ★★★★☆ (귀신 무지개와 황무지의 묘사는 이 작품에서 가장 잘된 부분이다.)
  • 진입장벽: ★★☆☆☆ (초반에 고유명사가 몰려 나오지만, 삼촌의 실험 장면이 그걸 거의 다 받아준다.)

 

 

 

1. 주제에 대한 이야기

 

나는 사람이 짐승과 구분되는 기준이 “언어”라고 생각한다. 곧장 짐승들도 언어가 있다는 반론을 받은 적도, 나 스스로 떠올린 적도 있지만, 사실 짐승들이 사용하는 건 언어라기보단 신호체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신호체계는 특정 음성과 발음으로 특정 행동을 보통 1:1로 가리키게 되는데, 고급 체계를 갖춘 언어는 “없는 것”을 지칭할 수도 있다. 과거와 미래의 이야기가 바로 대표적인 “없는 것”들이다. 물론 짐승도 학습을 통해, 어떤 조건이 주어지면 어떤 결과가 이어지리라는 예측을, 그래서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걸 전달할 언어가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정작 인간은 그런 고도의 언어를 갖추고도 소통의 문제를 겪는다. 말이 통해야 마음이 통한다고 하고, 외국에 나가면 말이 안 통해서 답답하다고 하고, 아이가 말을 배우면 이제 대화가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언어를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조건으로 놓는 사고방식인데, 이게 얼마나 철저한 통념이냐면, 우리는 반대 경우를 훨씬 자주 겪으면서도 이 생각을 잘 바꾸지 않는다.

 

반대 경우라는 건 이런 것이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끼리 몇 시간을 떠들고도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는 일이다. 부모와 자식이 삼십 년을 같은 집에서 같은 언어를 쓰고도 서로를 전혀 모를 수 있다. 회의실에서 모두가 발언을 주고 받았는데 회의가 끝나고 나면 아무도 무엇이 정해졌는지 모르는 일도 있다. 물론 직장 내 회의에서 이런 일은 거의 없(어야 겠)지만. 또, 정치적 신념이 다르면 언어가 같아도 같은 사건을 정반대로 해석하며 부딪는다. 이런 게 예외적인 사건이라면 통념이 유지되어도 좋겠는데, 솔직히 말해 예외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숱하다.

 

그렇다면 소통을 성립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예외라거나 반례라고 불릴 법한 것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답을 금세 알아챌 수 있다. 나는 20대 초반부터, “이해”라는 게 대체 무얼까 골똘한 적이 간혹 있었다. 사람들은 “쟤가 왜 저러는 거지? 이해가 안 되네”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그 말에서 느껴진 건 오직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할 마음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나중에 양쪽에 가서 말을 들어보면, 그렇게 큰 일도 아니었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도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사람이 혹은 서로가 얼마나 자신의 것만을 들어달라고 강하게 마음 먹었는지만 확인할 뿐이었다.

 

고로, 나는 소통이자 이해의 조건을, “마음 상태(의사)”라고 부르고 싶다. 말하는 쪽의 유창함도, 완고함도, 논리성도 아닌, 받는 쪽에 듣겠다는 의사가 있느냐 내지는 받아줄 마음을 먹고 있느냐가 소통의 진짜 조건이라는 뜻이다. 그런 의사가 있으면 언어가 없어도 통하고, 의사가 없으면 언어가 아무리 정교해도 통하지 않는다. 특히, 내가 이것을 몸소 깨달았던 곳이 바로 군대였다. 나는 아주 영광스러운 부대에서, 솔선수범하는 선임들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받은 사람이었다. 얼차려를 받을 때에도, 우리 부대에선 선임이 스스로 얼차려를 함께 받으며 자신이 시킬 수 있는 만큼을 시켰다. 그러니 선임은 늘, 후임보다 더 강인해야만 했다. 또, 자신이 후임의 잘못에 책임을 진다는 의식도 갖추어야 했다. 그런 곳에서 어떤 선임은 내게 “아무리 수도꼭지로 상수를 틀어줘도, 바가지가 썩었으면 물이 썩는다”고 얘기를 했었다. 그렇게 칭찬을 받았던 때가 있었다.

 

잠시 얘기가 샜는데, 나는 그때 더 확신했다. 소통에는 받는 마음이 아주 중요하다고.

 

그런데 얼마 안 가서, “받을 마음이 생기도록 해주어야 한다”고도 생각하게 됐다.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꼽았다는 설득의 세 가지 요건 로고스, 파토스, 에토스를 보고 나서였다. 로고스, 이성과 논리. 설득을 위해서는 응당 갖추어야만 하는 것일 테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파토스. 마음의 동함이라고 보아야 할까. 그러니 상대방의 마음에서 감정적인 동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이었다. 에토스는 평판인데, 이것도 결국 상대방의 마음에 긍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정리를 하자면, 소통을 위해서는 의사가 갖추어져야 하고, 소통을 하려거든 의사가 생기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언어”라는 건, 그저 감정을 조작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만큼, 인간이 얼마나 감정에 취약하고, 인간에게 감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 수 있기도 하다.

 

<어떤 작품을 두고 주제를 함부로 단정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고, 아래는 어디까지나 내가 읽어낸 것임을 먼저 밝혀놓는다.>

 

그런 내게, 이 작품은 이런 내 생각을 증명해주려는 듯이, 세 종류의 따옴표로 소통을 묘사하고 있었다.

 

작품에는 세 가지 소통 표기가 등장한다.

 

맨 처음 큰따옴표다. 작중에서 이는 음성을 담는다. 다만 초점화자인 아이샤는 소리를 듣지 못하므로, 이 대사들은 전부 입술을 읽어서 얻은 것이다. 그래서 삼촌이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아이샤는 무슨 말인지 “대강” 알 뿐이고, 멀리 떨어져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대화는 입술이 보이는 순간부터만 들어온다. 둘째, 작은따옴표는 아이샤 자신의 말, 곧 수어다. 그리고 마지막, 낫표는 파라파라와 기계들의 말이다.

 

이 셋의 배치가 아주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파라파라는 이 작품에서 가장 말이 많은 존재다. 인사를 하고, 회사 이름을 대고, 방사능 차폐 기술을 자랑하고, 가동 시간을 초 단위까지 읊고, 의료법 조항을 인용하고, 급기야 동의서에 서명하라며 판을 내민다. 그런데 그 말들은 단 한 마디도 전달되지 않는다. 카림 아저씨는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지”라고 되묻고, 아이샤는 내밀어진 판을 이리저리 만져보다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끝내 알지 못한다. 그리고 한 기계는 아이샤를 물속으로 눌러 넣으면서 권리를 고지하는데, 화자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적어 놓고 그 이유를 이렇게 단다 — 그 기계에게는 입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이 한 줄에서 이 작품이 무엇을 하려는 소설인지 알았다(고 생각했다). 소리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읽을 입이 없어서였다. 말은 넘치는데 그 말을 건네줄 얼굴이 없는 것, 그게 이 작품이 그려낸 불통의 형상이(라고 읽었)다.

 

그런데 그 정반대 극에, 피칸이 있었다. 피칸에게는 따옴표가 없다. 피칸은 결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샤와 피칸은 처음부터 끝까지 통한다. 고향에 데려다주겠다는 말이 전해지고, 지켜주겠다는 말이 전해지고, 마지막에는 고맙다는 말까지 전해진다. 어떠한 언어도 통할 수 없는 존재와는 소통이 되고, 각종 고급진 언어로 중무장한 쪽과는 통하지 않는, 아주 깔끔한 대칭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작가가 의도한 바가 아니라면, 나 혼자 감탄한 게 되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혼자 만족한다.)

 

그 사이 어디쯤에 펠리티아가 있다. 약간은 어색하지만 친구 사이임에도, 정작 이 둘은 작품의 대부분을 통하지 못한 채로 지나갔다. 또 촌장이나 무당 같은 어른들이 있다. 대화를 하지만, 어린 아이들의 말을 들어줄 마음 자체가 보이지 않는 인물들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듣지 못하는 아이가 말하지 못하는 것과 통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소통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는 명제가 도출된다. 나는 이것이 아주 좋은 주제라고 생각하고, 그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도 아주 좋은 배치라고 생각한다.

 

한 걸음 더 밀어보자면, 이건 지금 우리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말이 오가는 시대에 산다. 하루에 수백 개의 문장을 읽고 수십 개를 쓴다. 그런데 그렇게 말이 늘어난 만큼 서로를 알게 되었느냐 하면, 나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말이 늘어난 자리마다 듣겠다는 의사는 줄어든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파라파라가 무서운 건 그것이 괴물이어서가 아니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저 말이 통하지 않는, 일방적으로 대화를 밀어붙이는, 소통불가의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매일,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있지는 않을까. 나의 파라파라도, 너의 파라파라도, 우리 모두가 서로를 파라파라로 볼 수 밖에 없도록 말하고 있지는 않을까.

 

또, 이 작품의 장르가 SF였기에 주제 전달에 더 효과적이었다고도 생각한다. (SF라는 장르가 원래 해온 일이 이런 주제를 다루는 일이었다고도 생각하지만.) 외계인과, 기계와, 인간이 아닌 것과 어떻게든 통해보려는 시도. 그 시도가 실패하는 이야기와 성공하는 이야기를 번갈아 써오면서, 이 장르는 사실 인간끼리도 잘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계속 우회해서 말해온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만 이 명제가 작품 안에서 온전히 증명되려면 조건이 하나 있다. 양극이 둘 다 무거워야 한다는 것. 통하는 쪽이 따뜻한 만큼, 통하지 않는 쪽은 무서워야 한다. 피칸이 사랑스러운 것은 충분히 성공했는데, 파라파라가 무서운 것은 그만큼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나에게 피칸이 사랑스러운 만큼 즐거웠고, 파라파라가 무섭지 않았던 만큼 아쉬웠다.

 

 

 

2. 좋았던 점에 대한 이야기

 

① 가장 좋았던 점은, 초점화자의 감각을 문장부호로 관리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세 종류의 따옴표 이야기다. 청각을 쓰지 못하는 인물을 초점화자로 세우면 작가에게는 성가신 숙제가 하나 생긴다. 이 인물이 지금 저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를 매 장면 독자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것. 그걸 문장으로 매번 처리하면 “아이샤는 듣지 못했다”, “아이샤는 입 모양을 읽었다”가 수십 번 반복되면서 글이 순식간에 설명체가 된다. 이 작가는 그 숙제를 부호로 넘겼고, 그 규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켰다. 덕분에 독자는 설명을 한 번도 듣지 않고도 아이샤가 무엇을 알 수 있는 사람인지를 계속 인지하게 된다. 특히 좋았던 건, 라이터를 고치러 멀찍이 물러난 두 사람의 대화가 입술이 달싹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들어오는 대목이다. 시점 규칙이 그냥 지켜지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장면의 연출 기법으로 승화되었다.

 

② 그 규칙을 마지막에 사건으로 만들었다는 점.

이게 두 번째로 좋았다. 규칙을 잘 지키는 것과 그 규칙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것은 다른 일이다. 강물 속에서 기계가 아이샤에게 권리를 고지하는 장면에서, 작가는 앞서 백 번쯤 지켜온 규칙의 값을 한 번에 회수한다. 아이샤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이유가 소리가 아니라 입이라는 것. 원고지 백 쪽이 넘도록 쌓아온 설정이 한 문장에서 주제로 바뀌는 자리이고(나에게는), 정말 찰떡 같은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③ 귀신 무지개의 묘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자기장 같은 소재는 조금만 방심하면 설명으로 도망가게 되어 있고, 그러면 그건 소설이 아니라 과학 교양이 된다. 이 작가는 끝까지 감각어로 버텼다.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색깔, 구불구불한 형태, 누가 하늘을 흔든 것처럼 높은 허공에 너울거리는 물결, 그리고 자글자글한 주름 같은 빛줄기. 무엇보다 좋은 건 마지막에 삼촌이 그 원리를 설명하며 잔잔한 강물에 돌을 던지는 비유를 꺼낼 때다. 앞에서 물결로 묘사해둔 것이 뒤에서 물결의 비유로 설명되면서, 묘사와 논리가 한자리에서 맞물린다. 아주 탁월한 설계라고 생각한다.

 

④ 관찰이 발견으로 바뀌는 구조.

왕벌들이 서로 부품을 떼어 모아 새 개체를 조립하는 장면을, 아이샤는 그림을 그리다가 알아차린다. 이게 좋은 이유는, 정보를 인물이 스스로 알아차리게 만들려면 그 인물에게 그럴 만한 습관이 미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초상화를 그리고 싶었지만 제지 공방에 배치되어 불량 종이나 얻어오는 아이라는 설정이 초반에 짧게 지나가는데, 그 한 문단이 여기서 정확히 값을 한다. 그리고 그 발견의 순간, 화자는 왕벌을 기계가 아니라 벌이라고 다시 부르기 시작한다.

 

⑤ 계급을 논설로 쓰지 않고 배치로 처리한 점.

왕벌에 맞아 죽거나 다친 사람은 전부 밖에 나와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협곡의 광부, 초원의 목동, 벌목꾼. 그리고 원로원 사람들은 중요한 일을 한다는 이유로, 그 가족들은 건강이 안 좋다는 이유로 집 안에 있다. 그러면서 대피 요령을 숙지하지 않은 탓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이 구조를 한 번도 직접 비판하지 않고 그냥 누가 어디에 있는지만 적어둔다. 하루만 쉬어도 배급이 깎여서 일을 나갈 수밖에 없었던 오빠의 죽음도 그 배치 위에 놓인다. 이런 건 설명하지 않을수록 잘 읽힌다.

 

 

 

3. 아쉬웠던 점에 대한 이야기

 

다섯 가지를 적을 텐데, 사실 이들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 같다는 말을 먼저 해두고 싶다. “이 이야기에서는 아무도 크게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곱 명이 몇 달을 걸어 미지의 땅에 들어가 괴물과 맞닥뜨리는데, 결과는 팔 하나가 부러진 것으로 끝난다. 주인공은 사람을 죽인다는 것들에 두 번 맞고도 멀쩡히 일어난다. 괴물은 분해되고,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갈등은 남아 있지 않으며, 심지어 촌장과도 부딪히지 않은 채로 이야기가 닫힌다. 잃은 것이 없으면 긴장이 생기지 않는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끝내 마음이 조여들지 않았던 이유는, 결국 이 한 가지였던 것 같다.

 

① 가장 아쉬운 것은, 괴물에 무게가 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품은 파라파라라는 이름을 아주 오래, 아주 조심스럽게 준비한다. 이 땅과 함께 태어난 괴물, 인신 공양을 거부당해 앙심을 품고 왕벌을 보내는 존재, 할아버지가 그쪽으로는 가지 말라고 유언을 남긴 방향. 그렇게 백 페이지를 준비해놓고, 마침내 마주친 파라파라는 응대를 시작한다.

이 낙차 자체는 작가가 노린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두려움의 대상이 알고 보니 고장 난 자동응답이었다는 것이야말로 이 소설의 핵심이고, 나도 그렇게 읽었다. 그러니 이건 설계 실패가 아니라 강도의 문제다.

낙차가 성립하려면 착지가 웃기거나 무섭거나 둘 중 하나는 확실해야 하는데, 지금은 어느 쪽도 충분하지 않다. 지메르는 팔이 부러지고 기절한다. 그게 전부다. 동의서에 서명했으면 어떻게 됐을지 우리는 끝내 알지 못하고, 이 기계가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 물건인지도 알지 못한다. 곁에 있던 미라와 그 몸에 남은 자국은 정황이지 사건이 아니다. 결국 파라파라가 정말로 위험한 존재였는가 하는 질문에, 나는 작품을 다 읽고도 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걸린 대목인데 — 호아킨과 트리스탄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다. 호아킨은 용수철에 맞아 고꾸라졌고 트리스탄은 흩어져 달아났는데, 마지막 천막 장면에 있는 사람은 아이샤와 삼촌과 펠리티아와 카림 아저씨와 지메르다. 아무도 그 둘을 찾지 않고, 그 둘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나는 이걸 오래 들여다봤다. 만약 두 사람이 죽었다면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크게 잃은 자리인데 그것이 통째로 비어 있는 것이고, 죽지 않았다면 파라파라가 부른 보안 기계들은 사람을 쏘아 넘어뜨리고도 아무 일도 일으키지 못한 셈이 된다. 어느 쪽이든 위협의 무게가 새어나간다.

해결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지메르가 실제로 잘못되었거나, 파라파라의 그 많은 공구 중 하나라도 사람 몸에 닿았거나, 하다못해 호아킨을 데려오지 못했다는 한 문장만 있었어도 이 괴물이 조금은 더 무게감을 가지고 무시무시해졌을 것이다. 뭐, 물론 작가께서 아무도 잃지 않는 이야기를 쓰고 싶으셨을 수도 있고, 그건 그것대로 존중받아야 할 선택이겠지만.

 

② 밝혀진 사실이 인물들의 결론을 받쳐주지 않는다.

이게 두 번째로 아쉽다. 결말에서 카림 아저씨는 촌장이 우리를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제 욕심을 채우려고 옛날이야기를 이용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삼촌은 이제야 촌장이 파라파라를 들먹이며 사람들을 마을에 가둔 이유를 알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이 두 문장 앞에서 잠깐 멈췄다. 여정에서 밝혀진 것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기 때문이다.

파라파라는 실재했다. 위험했고(적어도 인물들은 그렇게 믿을 만한 것을 보았고), 조상들의 미라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 그쪽으로 가지 말라던 노인들의 유언은 옳았다. 마을에 머무르라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안전한 지시였던 셈이다. 게다가 촌장 본인이 왕벌을 두고 악독한 놈들이라고 말한다. 의지를 가진 적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만약 촌장이 파라파라가 허구임을 알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묶어두고 있었다면, 수색대를 보내는 것은 자기 발등을 찍는 일이다. 진실이 돌아오는 순간 통제 수단이 사라지니까.

작가가 촌장을 왜 이렇게 썼는지는 짐작이 간다. 촌장은 앞에서 아이샤를 협박했고, 삼촌의 연구 기록을 훔쳐봤고, 밭일이나 하라며 모욕했다. 독자가 그를 미워하도록 만드는 데는 완전히 성공했고, 나도 미워하며 읽었다. 다만 미워하는 것과 논증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카림 아저씨는 출발 전부터 이미 파라파라가 지금은 없다고 말했던 사람이다. 그가 여정 끝에 내리는 판정은 새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갖고 있던 의심의 반복이고, 그 사이에 발견된 사실들은 그 의심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인들의 경고보다도, 카림 아저씨의 의심이 모두 허구였던 것에 가깝다.

그래서 나에게 이 마무리는, 한쪽의 모름(노인들의 무지함)을 다른 쪽의 모름(탐사대원들의 무지함)으로 덮는 이야기처럼 읽혔다. 여기서 노인들의 무지함은 “정말로 모르는 것에 대한 경솔함”이라면, 탐사대원들의 무지함은 “아는데도 남을 헐뜯는 경솔함”에 가까워 보인다. 참 조심스러운 말인 줄 알지만, 이 작품이 원로원의 무지를 비판하려 했다면 탐사대의 결론만큼은 무지하지 않아야 했다고 생각한다.

고칠 방법은 의외로 가까이 있었을 것 같다. 촌장의 집은 조상들이 타고 온 우주선의 일부로 지어진 집이다. 그 집 어딘가에 조상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거나, 파라파라가 등장하기 전에 미라들에서 어떤 단서들이라도 발견할 수 있었더라면, 촌장이 알고도 이용했다는 결론이 그 자리에서 성립했을 수도 있다. 이미 삼촌의 관찰 기록을 몰래 훔쳐보는 인물로 그려두셨으니, 성격상으로도 어긋나지 않는다.

 

③ 초점화자의 공포가 지나치게 담담하다.

세 번째다. 왕벌 떼가 덮치는 장면과 물속에서 붙들리는 장면, 둘 다 목숨이 걸린 자리인데 문장의 온도가 평소와 거의 같다.

방향 자체는 맞았다고 본다. 소리를 지우고 진동과 흙내로 처리한 것, 그리고 기도를 삼백스물일곱 번 올렸다고 세어둔 것. 특히 그 숫자는 아주 좋은 디테일이다. 셀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라는 뜻이니까.

다만 아까운 것은, 이 작품이 청각을 쓰지 않는 화자를 골라놓고 그 조건을 공포에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포 묘사에서 청각의 부재만큼 유리한 조건도 드물다. 소리가 없으면 다가오는 것이 얼마나 가까이 왔는지 알 수 없고, 끝났는지도 알 수 없다. 엎드려 머리를 감싼 채로 눈을 감고 있는 아이에게는 세상이 진동뿐인 어둠일 텐데, 그 어둠이 얼마나 길고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작품은 알려주지 않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이샤가 올리는 기도의 내용이 자기 목숨이 아니라 왕벌들의 안부다. 착한 아이라는 건 알겠지만, 나에게는 잘 믿기지 않았다. 물속 장면도 마찬가지여서, 소리도 시야도 없이 눌린 채로 물을 들이켜는 상황이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으로 정리되고 만다.

 

④ 인물의 태도가 바뀌는데 그 자리에 사건이 없다.

지메르와 펠리티아 이야기다.

지메르는 피칸을 바닥에 내던져 밟으려 했던 사람인데, 결말에서는 붕대 감은 팔 위에 피칸을 올려놓고 헤벌쭉 웃고 있다.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은 함께 위기를 겪은 것뿐이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면, 그를 다치게 한 것은 왕벌이 아니라 파라파라다. 왕벌에 대한 원한이 풀릴 이유가 없다. 더구나 왕벌들이 몰려와 기계들을 들어올려 떨어뜨리는 그 장면을, 지메르는 기절해 있어서 보지 못했다. 그가 마음을 바꿀 근거가 될 만한 유일한 사건을 정작 본인만 놓친 셈이다. 물론 다른 탐사대원들이 후에 알려줬을 수는 있지만, 너무 급격한 감정변화가 아닌가 싶다.

펠리티아 쪽은 조금 다른 종류로 아쉽다. 이쪽은 작가가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흔적이 오히려 뚜렷하다. 열이 오른 펠리티아가 고맙다는 말만 반복하는 대목에서, 화자는 저 애가 하고 싶은 말은 미안하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하고, 지금은 그 말을 하기에 너무 이르거나 늦은 것 같다고 적어둔다. 아주 정확한 관찰이다. 그런데 그 자리를 그렇게 짚어놓고도, 화해는 결말에서 손을 잡는 것 하나로 끝난다.

작가 입장에서는 이게 (내가 파악한)주제와 맞는 처리라고 보았을 수 있다. 말로 하지 않는 화해야말로 언어 없는 소통이라는 주제에 어울리고, 실제로 손을 잡는 쪽이 수어보다 정확한 표현이기도 하다. 나도 그 판단에는 동의한다. 다만 그렇다면 그 손을 잡기까지 펠리티아가 무언가를 걸거나 잃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예시일 뿐이겠지만, 아이샤에게 등을 돌린 이유가 밥을 굶고 시집을 강요당하는 삶이었으니, 그 삶을 다시 각오하는 선택 하나만 있었어도 손을 잡는 장면의 값이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은 아이샤가 일방적으로 참아주다가 상대가 마음을 열어주는 모양이 되어서, 이 오래된 관계에 비해 값이 헐하다.

 

⑤ 왕벌의 무게가 장면마다 다르다.

마지막은 조금 사소한 것이다. 왕벌은 이 작품에서 정수리에 맞으면 사람이 죽는 물건으로 거듭 규정된다. 첫 장면부터 하늘에서 떨어져 청년의 머리를 강타했고, 촌장의 조카손자도 그렇게 죽었으며, 광산에서 돌아오던 오빠는 헬멧을 쓰고도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습격 장면에서 아이샤는 가방으로 왕벌을 두 번 맞는다. 엄청난 충격이 등을 강타했다고 적혀 있고, 정수리였다면 어땠을까 하고 아찔해하기까지 한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이 일어나 걷는다.

작가의 계산은 가방이 완충했다는 것일 테고, 실제로 결말의 그물 아이디어가 정확히 그 원리다. 그러니 논리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 완충을 그 자리에서 한 줄이라도 적어주셨어야 했다고 본다. 지금은 주인공만 유독 튼튼해 보이고, 그만큼 왕벌이 덜 무서워진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아이샤가 맞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 같기도 하다. 맞고도 멀쩡한 것보다는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는 쪽이 위험을 훨씬 크게 만드니까. (물론 이건 취향의 영역일 테지만.)

 

 

4. 제목에 대한 이야기

 

「귀신 무지개를 보는 소녀」. 이 제목은 네 개의 단어가 각각 일을 하고 있다.

 

“귀신” 은 틀린 이름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신병이라 부르고 무당은 신의 선택이라 부르는데, 실제로는 태양의 활동이 만든 자기장의 교란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잘못 붙은 이름을 걸고 시작한다. 어른들이라는 파라파라(폭력)를 보여주듯이.

“무지개” 도 마찬가지로 어긋나 있다. 무지개란 원래 누구나 보는 것이고, 오히려 함께 본다는 사실이 그 단어의 알맹이다. 그런데 이 무지개는 몇 사람만 본다. 함께 볼 수 없는 무지개라는 조어 자체가 아이샤의 처지를 그대로 옮겨놓은 셈이다. 그리고 그런 아이샤이기에 겪게 되는 파라파라(폭력)의 이야기가 된다.

“보는 소녀” 이 가장 좋다. 이 소설에서 아이샤가 하는 일은 전부 보는 것이다. 입술을 보고, 하늘을 보고, 나침반을 보고, 왕벌이 서로를 조립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그림으로 옮긴다. 듣지 못하는 아이의 동사가 ‘보다’로 못박혀 있고, 결국 그 봄(視)이 마을을 구한다. 그런 아이샤를, “보는” 아이샤를 초점화자로 내세웠기에, 말이나 언어를 “말하는”이나 “듣는”이 아닐 수 있다. 또, 아이의 시선이기에 수많은 언어를 구사하는 어른들이라는 파라파라들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작가가 이 모든 것을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완벽한 제목인 듯하다.

 

 

 

5. 기타 개인적인 이야기

읽는 데에는 사십 분 남짓이 걸렸고, 그중 절반은 따옴표를 세어보는 데에 썼습니다. 작은따옴표와 큰따옴표와 낫표가 각각 어디에 붙는지 확인하면서 다시 읽었는데, 규칙이 끝까지 지켜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가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파라파라가 나올 때마다 낫표를 반가워하며 읽었습니다.

아쉬운 점을 다섯 가지나 적어놓아서 마음이 무겁습니다만, 이 작품이 시시하다고 생각해서 적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습니다. 주제와 설계가 좋으니 무게만 조금 더 실리면 훨씬 멀리 갈 작품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무게 이야기만 다섯 번 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긴장이 팽팽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된 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모험담을 좋아하는 독자도 많을 테고, 그분들께는 이 작품의 담담함이 오히려 미덕으로 읽힐 겁니다. 그러니 다른 분들의 생각도 있을 테니, 적절히 취사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을 이만큼 하시는 분이니, 다음 작품에서는 부디 무거운 것 하나를 독자에게 떨어뜨려 주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내는 작가님.

 

 

 

*이하는 읽으면서 눈에 걸린 표기들입니다. 향후 작품 활동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적어둡니다.

  • 한 피바다 → 광
  • 삼촌 관찰한 바에 따르면 → 삼촌 관찰한 바에 따르면
  • 그것의 표면에 흠만 겨우 냈을 → 흠
  • 파라파라가 지멜이 앉은 의자를 → 지메르가 (인명 표기)
  • 노트를 들여보는 그때 → 들여다보는
  •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다.” →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문맥상 의문형인데, “가야 한다…”와 같이 말줄임표를 쓰면 가능합니다.)
  • “네가 일하는 곳이 어디냐? → 닫는 따옴표 누락
  • 물이 점점 높아져 가슴까지 차올랐다 → 깊어져 (아이샤가 걸어 들어간 것이므로. 다만 의도가 있다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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