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매우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매우매우 스포일러 함유합니다.
매우매우 매우매우 매우합니다(?)
타임리프는 건드리기 어려운 도구이다. 사용하기 어려운 도구라고까지는 말 할 수 없겠지만, 훌륭하게 휘두르려면 반드시 작가 본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동반하여야 한다. 이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떠올린 두 작품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보고 싶다. 그 두 작품이란 ‘스즈미야 하루히의 폭주(그 중에서도 엔들리스 에이트)’와 ‘엣지 오브 투모로우’이다. 두 작품 모두 소설로 읽어본 적은 없기에 여기서 내가 떠들어대는 내용은 각각 애니메이션과 영화 상의 이야기라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자 한다.
엔들리스 에이트와 엣지 오브 투모로우는 타임리프라는 도구를 극과 극으로 사용한 예시로 매우 적합하다. 우선 엔들리스 에이트를 살펴보자. 이 작품은 쿄애니의 위상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거의 완벽하게 동일한 내용에 세부적인 디테일만이 조금씩 달라지는 애니메이션이 무려 8화에 걸쳐 계속되었다. 8화라고만 이야기하면 어쩐지 대단찮아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달 동안의 분량이었다.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의 팬들은 무려 두 달 동안 진전 없는 내용을 참아내야만 했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경우는 어떨까. 이 작품의 경우 평단과 관객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흥행에는 실패하였다. 여기에는 워너 브라더스 등 어른의 문제가 깊게 얽혀있다. 나는 흥행 실패의 까닭이 작품성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었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는 타임리프 영화 중에서도 수작이다. 매우 잘 만들어져있다. 무한히 죽을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게임적인 재미’를 끌어내었다. 그렇지만 내 관점에서 이 작품이 수작인 까닭을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리듬’이라 답할 것이다.
모든 작품은 저마다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그 리듬이 내용과 어우러져 독자로 하여금 속도감을 가지고 읽어내리게 만든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죽음은, 타임리프는 매우 리드미컬하였다. 그렇지만 엔들리스 에이트의 리듬은 지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까놓고 말해 하루히의 타임루프는 20분에 한 번씩 돌아오는데, 쓰잘 데 없는 디테일에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뭐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알 수 없다. 똑같은 걸 여덟 번 보는 느낌이다.
이 작품이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어쩔 수 없이 엔들리스 에이트 쪽을 고를 것이다.
1. 타임리프의 사용에 대하여
타임리프는 도구이지 주제가 아니다. 이 지점을 망각하는 순간 작품은 망가져버리고 마는데, 여러 타임리프 단편에서 이걸 놓치고 넘어가버리는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 역시 타임리프에 너무 함몰되어서, 주제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 반복적으로 이어진다.
타임리프의 서사는 반복될 때마다 조금씩, 하지만 명확하게 변화해나가는 종류의 것이다. 이 작품의 서사는 뭐가 어떻게 변화하는 지 조차 알 수 없다. 바뀌는 건 알겠는데, 뭐가 바뀌는지 독자가 바로 캐치하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2. 작품의 디테일에 대하여
가령 이런 것이 있겠다. 작품 내에서 겨울은 미나가와 히로미를 두고 ‘히로미 씨’라고 부른다. 실제 일본에서는 ‘미나가와 씨’라고 부르는 편이 옳다. 또한 히로미 역시 겨울의 성씨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를 이름으로 부를 정도로 친한 사이라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히로미 씨’는 어색하다. 히로미 쨩이나 히로밍 정도가 일본에서의 일반적인 호칭이 되지 않을까.
심계항진 역시 그렇다. 심계항진이라는 병명은 일반적이지도, 익숙하지도 않다. 나 역시 그러해서 네이버에 찾아보았다. 심계항진은 약물, 음식, 정신적 요인, 기저 질환이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되어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히로미’는 하루 세 번 약을 먹고, 이것은 기저 질환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며, 매번 닭으로 조리된 요리를 먹고, 시험과 레포트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1) 원래 심계항진을 앓다가, 그것이 심해져서 죽은 것인지
2) 아니면 기저 질환을 앓다가, 다양한 요인의 작용으로 인해 죽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작품의 제목에 들어갈 정도로 중요한 키워드지만, 정작 작품 내에서 심계항진이 디테일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저 죽음의 원인으로서 작용할 뿐.
3. 캐릭터에 대하여
정확히는 겨울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이 캐릭터를 종잡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무능한 까닭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령 두 번째에서의 겨울과 세 번째에서의 겨울, 그리고 네 번째에서의 겨울이 서로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반응에 대한 원인은 대사에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타임리프, 그러니까 첫 등장에서 겨울은 조용히 손을 흔들며 히로미의 이름을 부르는 정도에서 끝난다. 수줍어하는 듯하다.
세 번째 타임리프, 그러니까 두 번째 등장에서는 조금 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이 때 겨울의 태도는 히로미를 존대하는 듯하게 느껴진다. 대사 하나하나가 조심스럽다. 이것은 수줍음에서 벗어나있지만,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네 번째 타임리프, 그러니까 세 번째 등장에서는 말투가 완전히 달라진다. 발랄하고 명랑하다. 특히 ‘쨌어요’가 그러한 감상을 부추긴다.
개인적인 소리를 조금 더 해보자면, 나는 대학생이 강의를 쨌다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어느정도 디테일과도 상통하는 부분이다. 보통의 대학생이라면 강의를 쨌다고 말하기 보다 자체공강 했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너 수업 있지 않아?”
“자체 공강이에요. 후후후, 대학생의 특권이죠.”
같은 식으로 처리하는 편이 더 ‘대학생 답지’않았을까 싶다. (작가가 의도한 겨울의 캐릭터와는 다소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4. 문제 해결과 로맨스에 대하여
일단 이 작품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끝난다. 겨울은 사랑하는 선배를 위해 선배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하루를 반복하기로 결심한다. 뭐, 열린 결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게 로맨틱한가? 여기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많다.
내가 로맨스를 읽거나 보면 늘 같은 느낌을 받는다. 요컨데 오랫동안 숨을 참는 듯한, 가슴 한 구석에서 이상한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느낌.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로맨스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쓸데없는 내용을 반복하느라 히로미와 겨울 두 사람의 관계를 깊이 보여주지 못했다. 또한 이 작품의 중심 시점이 매일 리셋되는 히로미에 맞춰져있다는 것도 큰 문제다. 히로미는 하루가 반복될 때마다 그 전의 기억을 잊는다. 그런 인물의 시점으로 작품이 진행되었으니 로맨스의 진도가 지지부진할 밖에. 또한 가끔 있는 두 사람의 대화가 매우 혼란스럽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어느정도 필요한 일이다. 문제는 이 작품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핵심을 모조리 빗나가고, 영양가 없는 대화만 이어진다는 점이다.
중단편은 짧은 분량 내에서 필요한 것을 선택적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형식이다. 선택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은 달리 이야기하면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지 역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이 보여주어야 할 것을 보여주지 않고, 보여줄 필요가 없는 것에 너무 연연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외에도 기본 설정의 까닭을 알 수 없다는 점도 껄끄럽게 느껴졌다. 이 작품의 배경은 일본이다(히로미가 겨울을 두고서 ‘유학생’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배경을 일본으로 정해놓은 것이 이 작품 내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잘 모르겠다. 또한 주요한 캐릭터 두 사람을 다른 국적으로 설정한 것 역시 이해가 가지 않는다(초반에 히로미와 겨울이 별로 안 친한 것처럼 읽혔다. 우선 상대방을 ‘유학생 소년’ 정도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그러하였다).
겨울이라는 이름이 주는 뉘앙스도 묘하다. 내게 겨울이라는 이름은 여성적으로 들린다. 실제로 나는 이 작품이 레즈비언의 사랑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두 번째 읽을 때야 비로소 겨울이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캐릭터의 이름이 주는 뉘앙스를 적절히 고르는 것도 작가의 주요한 능력일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실례가 되지 않기를 빈다. 나는 이 작품의 작가가 아직 덜 여물었다고 생각한다. 쓰고 싶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써내려가는 방법의 모호함에 갇혀있는 듯 느껴졌다. 내가 뭐 뛰어난 글쟁이는 아니지만 이거 하나는 말할 수 있겠다. 최고가 될 수는 없어도 괜찮은 글쟁이가 될 수는 있다고. 10년이 지난 후에 이 작품을 다시 쓴다면 훨씬 괜찮게 써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