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부제 : 라캉의 관점에서 본 ‘무의식의 자기 발언’ – 인간에게 현현한 언어적 정보다양체를 탐색하는 방법
0. 부제 : ‘ ‘ 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0. 부제 : 왜 ‘판타지에 추리를’ 넣었는가에 대하여( 톨킨이 에거시 크리스티의 구조로 조이스의 생각을 쓰면 이렇게 될 듯, 어떻게든 비온의 ‘미래의 비망록’에 닿겠다는 생각? )
0. 부제 : 타자의 강박적 반복을 나쁘게 보지는 않는 이유
0. 부제 : 어차피 읽는 사람 마음인데 이런 말이 다 무슨 쓸모냐?
0. 부제 : 이 리뷰는 전체 스토리를 밝히는 데에 아무 죄책감이 없습니다. 그러니 더 읽고자 하시는 분은 조심하세요.
0. 부제 : 내가 이걸 이틀동안 읽었으니 이틀동안 리뷰를 써보겠다.. 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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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의 작품은 다분히 정신분석적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작가가 같이 묶이길 싫어하니까 작품만 분석하고자 한다. 뭐랬지? 작품은 뭐 독자한테 속한다.. 어쩌구 했는데..
2. 이 소설의 말미에 밝혔듯이 이 소설의 끝에서는 ‘글’이 태어났음을 말한다. 어스탐이 ‘글’을 쓴 걸 부정하진 않는거 같은데 소설의 표현대로라면 모니터위에 갑자기 ‘글’이 등장했다고나 할까..? 여튼간. ‘글’이 태어났다. 우리는 ‘글’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나? ‘글’이 난 오늘 저 ‘작가’의 손 끝에서 태어날꺼야!. 이런 말이 가능할까?
3. 2. 를 정당화하기 위해 작가는 앞에 긴 도입부를 준비한다. ( 책으로 거의 500쪽 분량이다. )
4. 도입부는 판타지의 소재 위에 추리소설의 형식을 띄는 것처럼 보이며 끝에 범인도 밝혀지고 동기도 밝혀지는 것으로 보인다.
5. 한 가상의 인물의 동기를 밝히기 위해 4년동안 글을 쓴다는건 좀 과해보인다. – 게다가 몇명이나 고생을 한걸 생각하면 더더욱.
6. 그래서 우선 ‘추리’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보자. 추리소설은 무엇인가? 추리소설의 욕망은 무엇인가?
7. 추리소설은 어쩌고 저쩌고 해도. 결국 우리에게 결과적인 이해를 제공한다. 이해 못 할 이 세상에서 어떤 논리적인 인과적인 이유가 있어서 내가 납득하고 너도 납득하고 우리 모두 납득할 수 있는 어떤 이해를 추리소설을 읽는 독자는 제공받기를 바란다. 그게 추리 소설을 향한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추리소설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8. 그러면 판타지 소설의 욕망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정신분석가 비온의 개념을 빌려오고자 한다. 비온의 정신분석 개념에는 베타요소 – 알파요소, O, 카타스트로픽 체인지, 콘테이너 – 콘테인드와 같은 것들이 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베타요소) 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요소(알파요소)가 되기 위해선 누군가가 이렇게 이해되지 않는 요소들을 담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같이 버텨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담고 담기는 곳이 컨테인드 컨테이너 개념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궁극적 진실(O) 에 닿아서 결정적인 변화(카타스트로픽 체인지)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9. 우리가 가진 이해할 수 없는 공포나 불안은(베타요소)는 판타지 세상의 대상(드래곤, 악마, 요정, 마법..) 등에 담겨 이해가능하게 되고(알파요소) 이 이것들을 다루며 여행하는 여정이 묘사되는 과정이 바로 판타지 세상이라는 컨테이너에 담긴 컨테인드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불안한 생각인 판타지라는 생각에 담겨 생각할 수 있게 되고 진실을 향한 주인공의 여정(O)에 같이 참여하여 우리 또한 변화( 카타스트로픽 체인지 )를 같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 우리의 후치 네드발 께서는 ‘뻥’ 차버렸지만.
10. 추리소설이 우리가 인식하는 인과관계에 대한 욕망을 대변해 준다면 판타지 소설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무의식적 욕망을 대변해 준다고 볼 수 있다.
11.어스탐이 써내려가는 것은 무엇인가? 어스탐이 범인을 밝히길 바랬다면 그냥 범인의 이름만 적으면 됬는데.. 뭐 다른걸 적고 싶었던게 틀림없다! 길게 적어야만 하는 그것! 4년동안 적어야 하는 그것! ( 정신분석 상담이 보통 이렇게 걸린다. )
12. 우리는 ‘죽는’ 순간에 뭘 보게 될까? – 누구는 ‘주마등’을 본다고 한다. 생존을 위한 뇌의 ‘정보 탐색’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분석적 상담을 받고 ‘자아’가 죽는 순간에 혹은 자기 안에 있는 내적 대상이 심정적으로 ‘죽는’ 순간엔 뭘 보게 될까? 누군가는 과거를 후회한다고 하던데? 대체 뭘 후회하는 걸까? 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지? 설명을 해야지.
13. 우리는 모두 ‘자아’를 가지고 있다. 어릴때부터 천천히 커지고 강해지고 자라난 우리의 ‘자아’는 보통 바뀌지 않는다. 우리 뇌가 기본적으로 버리는 걸 싫어하고 손해를 싫어하고 위협적인걸 싫어해서 그런지.. 한 번 애착이 생긴 대상은 바꾸지 않는게 생존에 유리해서 그런지 뭐 이런저런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해 ‘자아’는 거의 바뀌지 않는다. ‘자아’의 존재 자체가 생존의 증거니까. 낯설거나 힘든거라도.. 그냥 익숙해지려고 하거나.. 인식을 재구성해서 감정적으로 편해지거나 다루려 하지 보통 나 자신을 ‘해체’시키지는 않는다. ‘해체’시킨다는 것은 그건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것들이 틀린것 위에서 돌아갔음을 의미하니까. 그러면 날 보호해 줄 게 없으니까. 불안하니까. 그래서 보통 ‘자아’는 ‘자아의 해체’를 택하지는 않는다.
14. 어스탐은 4년의 죽음의 유예의 시간에 이 ‘해체’를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이전의 어스탐은 존재하지 않는다.
15. 어스탐이 어떤 사람인가? 위키 설명에 따르면 – ‘ 인간성은 굉장히 좋지 못한 인물로, 용의자들의 동기를 보면 하나같이 제 명을 재촉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생전에 어그로를 많이 끌고 다녔다.’ – 왜 그럴까?
16. 누구 한테는 설명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그냥 저런 사람인가 보다 할 수 있다. 피해도 된다. 맞서 싸워도 되고. 내가 말하고 싶은건 저 어스탐이라는 인물이 왜 저랬냐는 거다. – 이 부분은 사란디테가 너무나 잘 소설 끝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사란디테가 말한 – 사랑에 서투른 사람. 그렇게 어스탐 경이 되었다.
17. 어스탐 경만 ‘그렇게 어른이 된 건’ 아니다. 눌드 레초가 그러했고, 에이바 레초가 그러했으며, 세티카 로우가 그러했고, 네모파니가 올코아가 그러했다. 모두 원하는 것이 있었지만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고 그렇게 어스탐에게 사랑을 주지 못했다. 너무나 사랑을 받고 싶었던 그렇게 완전해지고 싶었던 어스탐은 역설적으로 자기를 파멸시키면서 누구도 자기를 상처 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자기가 바랬던 환상을 깨닫고 자기를 해체하고 적기 시작한다. 무려 4년동안. 자기 반성문을. 처절한 자기기만의 추억을.
18. 어스탐은 사랑을 받지 못한 자신을 ‘해체’했지만 모두가 ‘해체’를 택하지 않는다. 다른 식으로 어른이 된 눌드 레초와 에이바 레초는 어떻게 했는가? 자기인식을 바꾼다.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후 그 둘은 내외하기 시작한다. 서로 소통하지 않고 교류가 없이.. 서로의 방식으로 각자 서고에, 그리고 예배실에 틀어박힌다. 처음엔 상대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의식하고 했던 행동이지만 어느순간 이유는 저 뒤편으로 잊혀지고 서로 피하는 행동만이 남았다. 세티카 로우와 어스탐의 고모는 본인의 상처로 인한 행동과 성격을 받아들여서 살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모두 상처를 대하는 방법이 같지는 않다. 이걸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아프다고 쓰러져 우는 사람에게 ‘난 별거 아니던데?’ 라고 할 수 있나?
19. 모두가 이런 ‘동기’를 가지고 있지만.. 신기하게 모두 ‘잊고’ 있었다. 그렇지만 분명 용의자들 과 작가의 ‘행동’의 원인으로 ‘이해’된다. – 우리는 이것을 ‘무의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20. 어스탐의 경우 이런 ‘무의식’적 체험의 일부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그렇게 남들을 상처를 줄 수 있을 정도의 공감가는 글을 쓸 수 있었을 터이다. – 연극의 대본 중 어스탐이 자신의 칼과 방패 왕관을 세명의 ‘사서’에게 건네주는 모습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대로 이해되지 않은 체험은 나르시즘으로 귀결되는 법. 그렇게 마지막 ‘사서’는 떠나갔다.
21. 이 때 도서관의 사서들이 나타났다! 도서관의 사서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누군지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행동부터 보자. 베일에 쌓인 엄청난 지혜! 무섭고도 압도적인 위력! 게다가 보석까지! 유와르는 자신의 성게에 있는 가시를 떼어 레초 공작에게 준다. 이미 작가는 가시는 트라우마의 상징임을 퓨처워커에서 말한적 있다. 레초는 이 가시를 들고 아내와 트라우마를 직면하게 된다. 이 유와르는 우리가 모두 가진 잊혀진 기억들을 다루는 무의식적 ‘도서관’에서 온 것 같다.
사란디테는 자신의 남동생이 ‘너(네롤 에길)’ 때문에 남동생이 ?!ㅌ% 했다고 한다. 에길은 별장의 사람들을 안타까워 하고 최대한 도움을 제공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똥’고집’을 부리는 배추를 타고 다니며. 이런 똥고집 어디서 왔을까? 우리의 무의식에는 우리가 다른 ‘대상’을 사랑하게 하는 원초적인 이미지가 있다고 한다. 이 이미지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보통 인식되지 않는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소통하게 해주는(사서들 중 에길 사서만이 유일하게 소통이 그럭저럭 잘 되는거 같았다.) 원초적인 이미지들의’ 도서관’에서 온 대리인이 에길 사서인 것 같다. 내 안의 대상이 착한지 아니면 위험한지에 따라 내가 이 세상을 인식하는 모습이 달라지는 이것은 보통 쉽게 바뀌지 않는다. 똥고집도 이런 똥고집이 없다.
어둑이는 그냥 말하면 안된다고 한다. 그냥 기분 나쁜거지 위험한거지.. 모를 그것. 그렇기에 모두 말하면 안되는 그것.. 모지..? 해리포터 처럼 말해선 안되는 사람인가? 그리고 스벤터 날바이와 합체하여.. 기적을 선보인다. TABOO (폴라리스 랩소디의 오닉스 나이트가 두려워 한 그것) . 말해선 언급해선 인식해선 안되는 그 무엇. 도덕적이지 않을수 있고 논리적이지 않을수 있고 공동체의 이득에 해악을 끼치기에 나의 존재에 위협적이기에 생각하면 안되는 그 무엇. 논리로서 이해할 수 없는 그것. 자신이 아닌 그 무엇. 그래서 이 도서관에는 이름조차 없다. 우리 엔파 백작.. 조사하면서 얼마나 논리를 통해 누가 범인인지 얼마나 알아내고 싶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욕구와 중립을 지켜야 하는 그 입장에서 오는 스트레스.. 4년 동안이나 나를 스트레스 주었던 저 작자.. 그러나 스스로 인식하려고 하진 않는듯 하다. 그래 오늘 스트레스 많이 받을거야. 그런데 그런 스트레스도 필요해. 그렇게 엔파백작은 자신의 어두운 부분을 인정하고 그리고 사서와의 합체?를 통해 어떤 ‘경이’에 다다를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이 세명의 사서는 각자 무의식의 어떤 일부분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인다. 트라우마, 원초적 대상 이미지, 터부시 되는 그 무엇. 들이 사는 곳.
위에 사실들을 이용하면 이제 소설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 일부 이해를 할 수 있게 된다.
22. 어스탐 경은 ‘무의식’적으로 상처를 있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어떤 ‘소설’을 써내려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무의식의 ‘사서’들이 알고서 서로 자기 도서관에 넣겠다고 찾아온다. 그러나 결말이 쓰이기 전 ‘무언’가 찾아온다.
23. 그 전에 먼저 다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우리 모두는 이런 ‘무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 ‘무의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정신분석에서는 이것을 다루는데 몇년은 평균이고 심지어 누군가는 몇십년간 받기도 한다. — 이미 퓨처워커에서는 이 상처를 가지고 사는 것도 괜찮다고 했고, 없앨 수 있으면 없애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이 상처들을 다루는 것은 분명 조심해야 한다. 폴라리스 랩소디의 ‘키’선장님 처럼 상대의 욕구를 반영해 내줄 수 있지 않으면( 많은 선장들이 키 선장 곁에 있다가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고야 만다. ), 즉 스스로 자신의 욕구를 찾지 못하고 남에 의해 ‘폭로’ 된다면 ( 폴라리스 랩소디의 ‘반왕’ 이신 우리 카밀카르 공주님이 휘리 노이에스 에게 한 ‘짓’을 생각해보라. 휘리는 가수가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 자신의 욕구를 찾지 못한 자아는 그 ‘폭로’된 욕구조차 멋대로 해석하여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다.
24. 이렇게 다루는 것도 위험하고, ‘폭로’하는 것은 더더욱 위험한 무의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전에 보통 이 무의식은 어떻게 묻혀 있는가? 아니 ‘검열’되는가?
25. 우리가 의식적으로 떠올리기에는 너무 힘들기에 보통 무의식은 ‘검열’된다고 한다. 우리 무의식에 있는 것들은 보통 ‘강박적’인 행동을 통해 그 모습이 바꿔서 나타나기도 하거나 좀 더 내가 다루기 편한것으로 모습을 바꿔서 행동을 드러내고, 의식에서 받아들이기에 너무 충격적인 것들은 ‘방어기제’를 통해 좀 더 이해되기 편하게 혹은 왜곡해서 받아들이기도 한다.
26. AI 의 학습을 보다보면 어떤 단편적 LAYER( 은닉층 ) 들의 결과값의 합을 통해 결과를 도출한다. 굉장히 기괴하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여러개의 은닉층을 통과한 값이 내가 모르는 ‘알고있는’ 값이라니. 앙지프 욜탄 마레스납도 그러하다. 앙지프이기도 욜탄이기도 마레스납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을 동시에 더한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별적인것이기도 하다. 앙지프이기도 욜탄이기도 마레스납이기도 한 것이다. 무엇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통과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된다. 우리의 무의식에 있는 ‘충동’이나 ‘욕망’ ‘기억’ ‘터부’와 같은 것들은 저런 욜탄 앙지프 마레스납을 지나서 , 즉 ‘검열’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인식할 수 있는 정보가 된다.
27. ‘무의식’의 정보는 그대로 드러나는것은 위험하기에 항상 ‘검열’하려고 한다. 어스탐 처럼 무의식적인 정보를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기에 ‘검열’은 일어난다.
28.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소설 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의 2개의 ‘층위’이다. 하나는 ‘의식적’으로 죽은 시체가 소설 쓰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각 인물의 ‘무의식’이 쓰여지는 걸 ‘무의식’적 구조로 표현한 이야기.
29. 작가는 결말 부분에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각 인물의 동기만 밝혀지면 된다고 이야기 하는게 아니라( 실제로 더스번 칼파랑 백작은 동기에는 관심 없다. ) ‘무의식’은 작가의 손을 빌어 스스로 태어나는게 아니냐고 이야기 한다.
30. 실제로 이 주장의 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몇가지 있다. 자동기술법이나, 융의 원형적 창조론, 라캉의 ‘실재’ ,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등 다 동의하는 것은 결국 ‘무의식’은 원래 존재하고 있고 그냥 작가는 이름만 빌려준 것이 아니냐는 논리가 가능하다. 해석은 독자의 몫이라는 논리도 여기서 가능해진다.
31. 작가는 이 부분을 소설안의 ‘연극 대본’이라는 장치를 통해서도 드러낸다. 같은 이야기가 ‘연극’ 대본으로 쓰일 수도 있고, ‘소설’로 쓰일 수도 있다. 각 매체가 가진 장점도 있다. 그러나 결국 같은 이야기의 다른 전달 ‘매체’ 인것은 분명하다. 그럼 뭐가 원본이지?
32. 작가의 말을 다 들어주도록 하자. 뭐 소설의 동기는 인물들의 트라우마나 과거기억이고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며 어린시절의 아빠 엄마 문제고 옹알 왱알.. 그런데 이거는 무의식적 욕망이 되고 그 무의식적 욕망이 결국 사건을 일으키는걸 살펴보니 사실 ‘무의식’이 실체고 나머지는 다 뭐 ‘인형’같은거 아니냐 뭐 이런거.. 다 들어주도록 하자.
33. 그러면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34. 후치가 자기탐색을 종료했듯
35. 미와 파가 화해하듯
36. 키 선장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오스발의 ‘도망’을 끝까지 쫓듯 ( 키 선장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선택을 만들어낸 카밀카르 공주를 미워하는게 아니다. 자신의 ‘선택없이’ 풀려난 무의식 그 자체를 싫어하지. )
37. 케이건이 다시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바람이 되듯
38. ‘오버 더 초이스’ : 자기가 지금까지 했던 선택들이 과연 진정 ‘자신의 선택’ 인지 의심하고 넘어서 다시 선택할 수 있어야
39. ‘오버 더 호라이즌’ : 그러면 자신의 지평이 조금 더 넓어지지 않을까..
40.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은지 얼마 안되어 깨달았다고 흥분하는 사람을 ‘선’의 향만 맡았다고 한다. 아는건 쥐뿔도 없는데 아는척한다는 이야기다. 어스탐이 그래 보인다. 사랑 받고 싶어서 좀 깊이 들어가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글을 쓸 수 있었지만 결국 상처를 준 그런 사람. 그런 그가 자기 파괴의 순간에 다다라서야 알 수 있었던 사실이 있다.
41. 다른 세명의 무의식에게 자신의 칼과 방패 왕관을 주었지만.. 그리고 그것을 다룰 수 있다고 착각했지만
42. 사실 진정 바라던건 마지막 4번째.. 무의식에 있는 진정한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게 아니었을까.
43. 어쩌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 우리가 비록 무의식의 인형이라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선택 뿐임을 다시 이야기 하고 있는게 이 소설이 아닌가 생각한다.
44. 그러기에 굉장히 강박적이다. 이 작가는 했던 얘기만 한다. 그런데 뭐 어쩌겠는가 이걸 보는것도 내 선택인걸. 이영도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볼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45. 이영도는 본인 스스로 타자라고 한다. 아마 라캉의 타자라는 단어와 글을 쓰는 타자를 혼합해서 쓰는 타자의 욕망을 쓰는 타자 라는 뜻이 아닐까 생각한다. – 이 작품을 통해 생각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46. 공감각자라는게 있다고 한다. 난 공감각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지만.. 숫자에서 색깔을 느끼는 그런 사람, 색깔에서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이런걸 우리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인간은 때로 기존의 정보 체계가 붕괴되는 ‘자아의 죽음’을 경험한다. 뇌는 불확실한 가능성보다 익숙한 고통을 선호할 만큼 변화에 저항하기에, 이 체계를 포기하는 것은 근원적인 공포를 유발한다. 그러나 약물, 깊은 상담, 혹은 압도적 충격을 통해 이 견고한 방어 기제가 해체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필터링 되지 않은 날 것의 무의식과 마주하게 된다.
47. 이 과정은 분명 고통스러운 과정이며 쉽지 않은 과정이다. 그러나 그 끝에 자신을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어스탐 경처럼 할 수 있게 된다면 (죽으라는게 아니라 반추한다는 정도에서..) 해볼만 하지 않을까?
48. 사실 위에 적힌 모든 이야기들을 통과하는 불교의 이야기를 하나 알고 있다.
49. 다 헛것이다. 자아 좀 그만 괴롭혀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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