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에서 은원(恩怨)이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감상

대상작품: 야운하시곡(夜雲下豺哭) (하) (작가: 하지은, 작품정보)
리뷰어: 임시제, 18년 11월, 조회 350

*리뷰 곳곳에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작품은 몇 달 전부터 브릿g에서 새로 시작한 작품 중 하나인 ‘언제나 밤인 세계’를 쓰신 하지은 작가님의 단편 무협 소설이다.

판타지 소설 팬들이라면 많이 들어봤을 ‘얼음나무 숲’, ‘모래선혈’의 작가님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작가님의 작품들 중 ‘오만한 자들의 황야’를 재밌게 봤다. 그런 여러 좋은 작품들을 쓰신 작가님의 무협 단편이 바로 이 ‘야운하시곡’이라는 작품이다. 상, 하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분량은 얼마 안 돼 금방 읽힌다. 물론 내용이 금방 읽힌다 해서 가볍다는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을 관통하는 건 많은 무협지에서 다루는 ‘은원(恩怨)’이란 것이다. 은원이란 은혜와 원한을 뜻하는 말로, 무협 세계관에서 무림인들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은혜를 입었으면 갚고, 원한이 있으면 갚는다’ 라는 간단하면서도, 폭력적인 인과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요소다.

 

작품의 시작은 주인공 ‘사혈공’의 아들이 죽은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사혈공은 죽은 아들에 대한 슬픔에, 오래 전 묻었던 은원을 떠올린다. 은원을 청산하기 위해 길을 떠나려 하지만 무리에서 떨어진 새끼 늑대를 발견하게 되고, 결국 멈춰 서게 된다. 사혈공은 새끼 늑대를 돌보면서 죽은 아들과 과거 자신에게 복수하러 온 무림인들을 떠올린다.

사혈공은 새끼 늑대에게 죽은 아들의 이름인 ‘휴’를 붙여준다. 하지만 새끼 늑대의 야생 본능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사혈공은 떠날 때가 됐다 생각한다. 사혈공은 새끼 늑대를 놔둔 채, 다시 오래 전 묻었던 은원을 향해 길을 떠난다.

사혈공은 계속 과거의 은원들을 떠올리고 만난다. 은원에 따라 사람을 죽이고, 은원에 따라 대신 복수해주고, 은원에 따라 아들은 죽었다. 그리고 사혈공은 은원에 따라 마지막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혈공이라는 인물은 끝도 없는 원한을 뿌리고, 결국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 왔으니, 당연히 그만큼의 은원이 쌓여있기 마련. 그 냉정하고 잔혹한 사혈공마저 따뜻하게 만들었던 아들을 죽게 만든 것도 그가 산 원한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무림인에게 있어 은원이란 당연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는 세계인 무림에서 오래 살아남았다는 건, 그만큼 은원도 쌓였다는 것이니. 얼핏 보면 사혈공이 흘러가는 대로,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이 모든 것에는 은원이 존재한다. 아들의 죽음, 과거의 인연, 원한의 싹을 남겨둬 다시 자신에게 칼날이 돌아온 것까지. 사혈공이란 인물은 평생을 은원에 휘둘려 살아왔다. 은원이란 결국 누군가가 멈춰야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사혈공은 끝끝내 멈추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중학교 때부터 무협지를 좋아했기도 하지만, 그만큼 질려있기도 했다. 늘 똑같은 중국 세계관과 구파일방, 오대세가, 외세 세력들까지, 언제나 같은 틀에서 사람만 바뀐 채 반복을 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야운하시곡은 무협의 중요한 요소인 은원을 짧은 분량 안에서 잘 살렸다. 분명 분량은 일반 단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다 보고 난 뒤에는 사혈공이라는 인물의 인생을 다 돌아본 듯한 느낌이 든다. 평소 다른 장르를 써오던 작가님이 무협을 쓰자 새롭게 다가왔다. 무공의 강함이 중요한 게 아닌, 그 안의 인간관계를 세심하게 다룬 것이다.

오랜만에 기억에 남을 무협 작품을 봐 좋았다. 새 작품이 나올 때마다 늘 좋은 평을 듣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은 작가님의 작품들이 지금껏 독자들에게 좋은 평을 듣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앞으로도 이런 좋은 단편과 장편들을 계속 내주셨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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