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살다보니 리뷰 의뢰를 받는 날이 다 오고…
[역설의 치료-기울어진 쪽으로 더 밀어붙이기]
균형을 잃은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치료기법 중에는, 균형이 기울어진 쪽으로 오히려 더 밀어버리는 방법이 있다. 이렇게 하면, 뇌가 ‘아 몸이 기울어졌구나’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반대방향으로 균형을 잡으려고 한다고 한다. 솜사탕을 문제적으로 좋아하는 아이에게, 한꺼번에 20개가 넘는 솜사탕을 안겨주면, 더 이상 솜사탕을 먹으려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이 소설의 내용 또한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죽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정말로 죽을만큼의 공포를 준다. 붉은 방에 가두고, 칼을 든 남자가 쫓아오게 하고누칼협?, 탈출구는 모두 막아버린다. 그리고 묻는다.
“정말로 죽고 싶어요?”
이것은 역설적으로 “너 살고 싶지? 정말로 죽고 싶었어?”라고 삶으로 되돌리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준혁이 재현에게 가하는 모든 공포는 일종의 ‘역설적 개입’이다.
죽음을 원한다면 왜 창문으로 도망치는가? 끝내고 싶었다면 왜 계단을 달려 내려가는가?
재현은 마포대교에서 스스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붉은 방에서는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전자는 선택이었지만, 후자는 본능이다. 준혁은 재현의 선택을 무력화시키고 본능을 깨운다. “당신은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살기 싫었던 것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은 다르다. 한쪽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고, 후자는 삶을 회피하는 것 뿐이다. 살아야 할 이유를 부여해주면 후자는 살 수 있다.
[준혁은 누구인가: 생존본능의 의인화]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준혁의 정체다. 그는 실재하는 인물인가?
마지막 장면을 보면, 이 모든 것이 재현의 임사체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강에 빠진 그는 의식을 잃었고, 생사의 경계에서 내면의 여정을 겪었다. 붉은 방, 복도, 교실은 모두 그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공간이다. 그럼 준혁은?
준혁은 재현의 생존본능이 만들어낸 페르소나일 가능성이 크다. 재현의 의식은 죽기로 결심했다. 정확히는 삶을 회피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의 무의식, 그의 몸, 그의 본능은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준혁이 나타난다. 그는 재현을 구조하지만 동시에 공포에 빠뜨린다.
왜? 재현에게 선택을 강요하기 위해서다.
“정말로 죽고 싶은가? 아니면 사실은 살 이유가 필요한가?”
의식적으로는 죽음을 선택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생존을 갈구하는 재현. 이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무의식은 준혁이라는 인격을 만들어낸다. 준혁은 재현에게 묻는다.
“당신이 그곳에서 뛰어내리기 전에 어떤 사람이 괜찮냐고 물어왔었잖아요. 그때 왜 괜찮다고, 산책 중이었다고 거짓말한 거예요?”
이것은 재현이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는가? 정말로 죽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 붙잡아주기를 바랐던 것인가?
재현의 다리를 잡고 상처를 내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재현이 자기 자신에게 해온 일이다. “이것이 네가 너 자신에게 하던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아픈지 이제 알겠는가?” 생존본능은 자기 파괴적 충동에게 묻는다. “정말로 이게 네가 원하는 거야?”
그래서 준혁은 재현을 죽이지 않는다. 상처는 내지만 끌어당기지는 않는다. 쫓아오지만 결국 잡지는 않는다. 왜? 그는 재현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재현의 생존본능 그 자체다.
“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래서 그랬어요.”
이 대사는 준혁의 정체를 암시한다. 재현의 무의식은 알고 있었다.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붉은 방이라는 극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죽음으로 밀어붙여서, 생존본능을 각성시키기 위해. 마치 “도망쳐. 살아남아. 그것이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이니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공포라는 이름의 구원]
“내가 살린 목숨인데 죽을지 살지 결정되는 그 시간은 내가 쓸 수 있는 거잖아요.”
준혁의 이 대사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누군가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소설은 자살 시도자를 구조한 남자가 그를 납치하고 감금하며 공포에 몰아넣는다는 기괴한 설정으로 시작한다. 표면적으로는 스릴러지만, 그 이면에는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살게 만들 것인가”라는 윤리적 딜레마가 깔려 있다.(하 이거 하필 이번에 시작한 연재물 막판에 나올 상황인데)
재현은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렸다. 그것도 “정말 오래 고민했고 며칠 전 마포대교에서 끝내겠다고 마음먹었다”. 충동이 아닌 결심이었다. 그런 그를 건져 올린 준혁은 병원이 아닌 붉은 방에 테이프로 묶어 가둔다. 이것은 구조인가, 납치인가? 작가는 이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린다. 준혁이 재현에게 가하는 공포는 삶이 가한 공포의 재현이자, 역설적으로 “그래도 죽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극한의 방법론이다.
[붉은 방: 심리의 미로]
소설의 공간 설정은 이러한 역설적 치료의 무대로서 완벽하다. 재현이 갇힌 곳은 단순한 방이 아니라 끝없이 이어진 복도, 계단, 교실이 있는 폐교 같은 구조물이다. 그는 창문을 통해 탈출하지만 그 너머는 또 다른 복도다. 계단을 내려가도 또 다른 복도가 나오고, 교실로 도망가도 창문은 밖에서 봉쇄되어 있다.
이 무한 반복되는 공간은 재현의 심리 상태를 완벽하게 은유한다. 우울증 환자에게 세상은 이렇게 느껴진다고 한다. 탈출구 같은 것이 보여도 결국 또 다른 막다른 골목일 뿐이다. “창문 너머는 또 다른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는 문장은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을 정확히 포착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재현이 그 공간에서 도망치려 한다는 사실이다. 마포대교에서는 스스로 뛰어내렸던 그가, 붉은 방에서는 미친 듯이 탈출을 시도한다. 이것이 바로 준혁이, 아니 ‘재현의 생존본능’이 노린 것이다. 죽음을 선택하려는 의식적 자아를 무력화시키고, 살아남으려는 무의식적 본능을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것.
특히 붉은 방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얼룩덜룩한 벽지를 덕지덕지 붙인 붉은 천장”,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고 원래 벽지 색과는 별개의 얼룩들이 군데군데” 있는 공간. 이것은 재현의 상처투성이 내면을 시각화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가 마침내 눈을 뜨는 한강 둔치의 “푸른 하늘”은 붉은 방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해방의 순간을 알린다.
[질주하는 문장: 숨 쉴 틈 없는 공포의 형식]
이 소설의 기법적 특성은 추격 장면에서 나타난다. 작가는 재현이 창문을 빠져나가 복도와 계단을 질주하는 장면을 거의 쉼표 없이, 줄바꿈 없이, 쉴새없이 몰아쳐 이어쓴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갓 잡아 올린 생선이 죽기 전 마지막 발버둥을 치듯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몸을 밖으로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내 다리를 잡고있는 손은 다리를 잡아당기지는 않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내 다리를 할퀴어 댔다. 힘주어 내 피부를 파고드는 손톱에 종아리는 불에 덴 듯 아팠다. 나는 더욱 격하게 발버둥 쳤고 몸이 거의 다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을 때쯤 손이 내 다리를 놓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고 나는 복도 같은 공간으로 고꾸라졌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내 다리를 잡은 손에 정체를 확인하지도 못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눈앞에 이어져 있는 복도로 정신없이 도망쳤다. 도망치다 보니 계단이 나왔고 나는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계단은 계속해서 이어져 있었고 나는 그냥 저 공포스러운 존재로부터 멀어지고 싶을 뿐이었다.”
헥헥헥헥
이 문장들은 의도적으로 단락을 나누지 않는다. 마침표는 있지만 호흡을 가다듬을 여백이 없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공백이 없다. 이것은 단순한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재현의 심리 상태를 형식으로 구현한 것이다.
재현에게는 숨 쉴 틈이 없다. 생각할 시간이 없다.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 복도로 고꾸라졌다 – 도망쳤다 – 계단이 나왔다 – 달려 내려갔다 – 또 복도가 나왔다” 이 모든 것이 한 호흡으로 이어진다. 독자는 재현과 함께 숨이 가빠진다. 문장을 읽으며 같이 달린다. 형식과 내용의 완벽한 일치다.
더 나아가, 이 ‘줄바꿈 없는 질주’는 역설적 치료의 메커니즘과도 정확히 부합한다. 재현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의식이 개입할 여지를 차단한다. “나는 죽고 싶어”라고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오직 본능만으로 반응하게 만든다. “도망쳐, 살아남아, 뛰어.”
작가는 문장의 모양새로 이것을 구현한다. 쉼표를 최소화하고, 줄바꿈을 제거하고, 한 문단 안에 수십 개의 동작을 압축한다. 독자는 그 문단을 읽으며 실제로 숨이 가빠지는 경험을 한다. 이것은 단순히 ‘재미있는’ 문장이 아니라, 재현의 생존본능이 작동하는 순간을 생리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사실상 ‘글’이 아니라 ‘그림’이다.
대조적으로, 소설의 다른 부분들 – 특히 재현이 테이프에 묶여 있거나, 교실에 숨어 있을 때 – 은 문장이 느리고, 단락이 짧고, 여백이 많다.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다. 이것은 분명한 작가의 의도다. 위기의 순간과 정적의 순간을 문장의 리듬, 길이로 구분하는 것이다.
“생각하지도 않은 채”,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재현은 생각하지 않는다. 본능만이 작동한다. 그리고 문장의 형식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문장. 쉴새없이 이어지는 문장. 이것이 바로 생존본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기법은 또한 독자를 재현과 강제로 동일시시킨다. 편안하게 관찰할 거리를 두지 않는다. 독자는 재현의 시점에 갇혀서, 그와 함께 달리고, 숨 쉬고, 공포를 느낀다. 줄바꿈이 있다면 거기서 독자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아, 이건 소설이구나” 하고 거리를 둘 수 있다. 하지만 줄바꿈이 없으면? 독자는 재현 안에 갇힌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준혁이, 아니 ‘재현의 생존본능’이 원하는 것이다. 의식을 제거하고, 본능만 남기는 것. “내가 왜 도망치고 있지?”라고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것, “나는 죽고 싶었잖아”라고 되돌아볼 여유를 주지 않는 것. 오직 “살아남아야 해”라는 본능만 작동하게 만드는 것.
고백하자면 나는 이 긴 문단 부분들을 읽지 않았다. 대강 작가의 의도가 파악되니 굳이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 잘못 썼는가? 아니다. 제대로 그렸다. 글이 아니라 그림이니까.
나는 재즈음악을 듣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 재즈를 하찮게 보거나 비난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 반대다. 정확히 말하면 듣기 힘들어한다. 내가 이해하기에는 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작가가 이렇게 긴 문단을 작성했다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나는 그렇게 길게 쓰거나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3줄 넘어가면 눈이 아파지는 ADHD). 그러나, 의도는 확실히 전달되었고, ‘생각할틈도 숨쉴틈도 없이 도망치고 있는 장면에 대한 삽화’처럼 생각하고 스크롤을 그냥 내렸다. 읽혀지지 않고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면 잘 쓴 소설인가?
음… 솔직히 말하면 조금 평이하다 생각했다(니는? 니는??). 하지만 이런 기법이 꽤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원래 아는 맛에 손이 잘 가는 법 아니겠는가. 오히려 종이책으로 발행하기에는 좋은 편이라고 봤다.
아쉬운 것은, 메시지가 너무 직접적이다. 준혁은 재현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기만 하고, 재현 스스로가 “여기서 살아서 나가고싶다.”를 스스로 깨닫는 걸로 해도 좋았을 것이다.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소설의 결말은 단순해 보이지만 강력하다. 한강 둔치에서 깨어난 재현에게 중년 여성이 다가온다.
“괜찮으세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병원에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마포대교에서 만난 조깅하는 남자와 똑같은 질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재현의 답은 다르다.
“저 좀.. 도와주세요..”
이 한 마디가 재현의 변화를 증명한다. 그는 더 이상 거짓말하지 않는다. “산책 중”이라고 둘러대지 않는다. 자신이 무너져 있다는 것을,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테이프’ 또한 꽤 적절한 은유다. 재현을 정말로 묶고 있던 것은 ‘붉은 방의 테이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입에 붙인, 침묵의 투명한 테이프였다. 준혁이 재현에게 가한 모든 공포와 폭력은, 역설적으로 이 테이프를 떼어내기 위한 극한의 치료였던 셈이다.
역설적 치료는 성공했다. 죽음으로 밀어붙여서, 생존본능을 깨웠다. 공포를 극대화해서, 도움을 청하는 용기를 끌어냈다. 문을 잠그게 내버려두는 대신, 문을 부수고 들어가 “정말 혼자 있고 싶은가? 죽고 싶은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재현은 대답했다. “아니요, 도와주세요.”
(살고싶다고 말해! ㅡ살고싶어!!)
여기서도 문장의 형식이 중요하다. 마지막 대사는 짧다. 간결하다. 앞의 질주하는 문장들과 대비된다.
그러나 이 한 마디를 하기까지 재현은 한강에 뛰어들어야 했고, 붉은 방에 갇혀야 했고, 끝없는 복도를 헤매야 했고, 자신의 생존본능(준혁)과 대결해야 했다. 그만큼 이 한 마디는 어렵다. 하지만 이 한 마디가 시작이다.
자, 이제 당신의 준혁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