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처음 봤을 때, 전으로 끝나는 제목은 홍길동전이나 박씨 부인전밖에 몰라서 ‘외자혈손’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주인공의 이야긴 줄만 알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박씨 부인도 이름은 아닌데 말예요! 아마 이런 일을 방지하려 한자도 병기하셨을 텐데… 그래도 다 읽은 지금은 이런 오해가 싹 씻겨 나갔답니다.
고명딸이라는 단어도 참 웃기지 않나요? 음식 위에 얹는 조그맣고 예쁜 것을 귀한 자식에 빗대다니, 사실 그 ‘귀함’이라는 게 어떤 식으로 귀한지 엿보이는 구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작품 소개에서 쓰인 이 단어는 확실이 이쪽으로 쓰인 것 같고요.
천하태평의 시대, 주인공인 무명이 사는 집의 대감마님은 무엇도 불안하고 무서울 게 없을 텐데도 곳간에 술이며 가죽이며 물건을 그득그득 쌓아놓고선 건드리지도 못하게 눈을 부라리면서 화를 바락바락 낸다더군요. 있는 사람이 더한 거야 어제 오늘 예삿일인데, 글쎄 하나뿐인 딸을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혼사 치를 나이까지 무명이라 부르는 건 아무리 바깥사람이 된다지만 너무하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너무할 이유는 따로 있었더라고요…
무명이 겪는 일도 한탄도, 제가 사는 시대가 조선시대도 아닌데 참 익숙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환청인 줄 안 게 사실 뱀과 대화하는 거였어도, 그거야 뭐 영국의 어느 집 계단 밑 공간에서 살던 남자아이도 그랬으니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그간 집에서 제대로 관심도 못 받고 어디 구석에 박혀 지냈을 무명이 하룻밤 새에 으리으리한 대감마님의 곳간을 털어버린 게 놀라웠지요. 그게 어쩌면 출생의 비밀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의 제목이 가리키는 바깥 존재인 여인은 대감이 덫을 놓았던 걸 몰랐을까요? 나중에 대감이 덫을 풀 때 쓴 도구로 다른 덫을 풀다가 정체가 발각되고 말았는데요. 그렇지만 슬픔에 죽어가면서 대감의 연모를 믿었다고 하는 걸 보면, 알았더라도 대감의 입으로 직접 듣기 전까지는 부정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통곡 후에는 결국 받아들였겠죠. 아이를 거둬 달라고 하고 웃은 건 복수 때문이라고만 여겼는데, 이무기의 자식이라고 자기와 같이 묻혔을 아이는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봐서라고 생각하면 마지막의 행복해 보이는 이무기 모습의 무명이 떠올라 저도 조금 미소 짓게 됩니다.
비록 가상의 존재고 같은 종족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 땅의 많은 딸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무명이 꿈으로만 그리던 생활 속에서 바깥 존재가 아닌 가족과 함께 즐겁게 지낸다는 소식으로 작품이 마무리되어서 기쁩니다.
바로 이 맛에 이야기를 듣고 글을 읽는 게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