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마법이라고 불리던 것 중 일부는, 오늘날에도 효과가 입증된 약초를 이용한 것입니다. 연금술은 화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여러 실험 도구와 방법을 발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주와 주술은 그 자체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겠지만, 원한이 섞여 날 선 폭언과 사람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조롱은 듣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저버리도록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나름의 가치를 지니며, 유용성을 가짐을 압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과학과 합리성의 이름으로 막 해명될 즈음에는, 그런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미신이라고 치부되는 대부분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져 사라지거나 과학적인 설명이 동반된 무언가로 수정되어야만 했죠. 작중 배경이 되는 18세기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작중 헨리 하커가 당시의 풍조를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 냉철, 계몽주의, 그리고 그 사이에 때처럼 껴있는 인간의 오만함까지 말입니다.
헨리 하커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은 단연 안야 사브키나라고 할 수 있겠지요. 칠 년 전에 화형된 마녀의 딸, 주술사이자 치유사이자 산파인 포비투카. 마을의 생존을 위해 필요로 하지만, 그 누구도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인물. 옛 관습에서 이어진 온갖 미신과 주술을 다루는 사람이자, 동시에 그러한 관습과 미신, 주술에 묶여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 갇혀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안야를 관통하는 감정은 마을 사람들을 향한 원한과 분노임과 동시에,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자신에 대한 분노이기도 합니다. 미신, 분노, 몰이해, 그리고 우매함은 안야와 그 주변 환경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헨리 하커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안야만이 아닐 것입니다. 미쉬킨도 관점에 따라서는 대척점이 될 수 있습니다. 미쉬킨은 정교회의 수사입니다. 정교회, 즉 종교는 18세기 현시점에서 미묘한 위치에 있습니다. 종교는 관습을 주도했습니다. 자신들의 관습과 맞지 않더라도 미신의 일부는 수용했고, 다른 일부는 배제했습니다. 마녀사냥이 단적인 예시가 되겠지요. 이외에도 이교도들의 행적이나 기적이라 공인되지 않는 모든 신비로운 일들이 배척됐습니다. 오직 신의 말씀만이 진리였고, 그에 따른 세계관 또한 진리였습니다.
그러나 과학 또한 종교가 만들어놓은 세계관을 부수는 존재였습니다. 18세기는 아이작 뉴턴과 제임스 브래들리의 발견과 연구에 따라 지동설이 완성을 코앞에 두던 시기였습니다. 종교가 1500년가량 견고하게 쌓았던 천동설 세계관에는 치명적이었죠. 라 메트리는 르네 데카르트의 동물기계설을 확장하여 인간 역시 기계이며 영혼은 없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르네 데카르트의 동물기계설이 인간의 영혼을 인정하여 종교의 탄압을 피했음을 생각하면, 상당한 파격이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미쉬킨의 태도는 상당히 양가적입니다. 그는 안야와 키리야에 대해 애틋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뿐입니다. 심지어 이교도이자 이방인이었던 키리야로부터 양봉 기술을 배웠음에도, 그의 장례와 매장에는 개입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은연중에 나타나는 탄압과 차별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배워왔으니, 내면화된 것입니다. 하지만 헨리 하커의 등장으로 인해 구도가 바뀝니다. 미쉬킨과 헨리 하커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은 종교와 과학 사이의 힘겨루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과학의 관점에서 미쉬킨과 안야는, 종교와 미신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묶입니다. 묶여서, 대척점을 이룹니다.
그러나 과학이 진정 믿음을 배제한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사실이던가요? 과학을 구성하는 수많은 이론은 절대적인 진리보다 아직 논파되지 않았을 뿐인 가설들의 조합인 쪽이 더 많습니다. 반박 가능성을 지니지만 논파되지 않았다는 것은 일종의 무류성을 지닙니다. 즉, 그 자체로 믿음의 근거가 됩니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온갖 연구와 실험들은 과거의 과학들이 귀납적으로 쌓아온 가설들을 신뢰하기 때문에, 혹은 반박하기 위해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과학은 믿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무관할 수 없습니다.
붉은 비가 내리고 사람들의 몸에 병증이 일어날 때, 헨리 하커는 수도원에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결론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의 추가 한 번 기울었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미신일까요? 종교일까요? 과학일까요? 헨리 하커가 선택한 것은 과학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셋 다일지도 모릅니다. 애초에 그가 이 마을로 왔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괴물들을 모아도 아무런 재앙이 쏟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을 실현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작중에서도 표현되지만, 주술이나 미신이라는 것은 매듭에서 시작해 매듭으로 끝납니다. 끈으로 묶고, 문자로 묶고, 말로 묶습니다. 두 사람의 피를 묶어서 하나의 가족으로 만들고,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내쫓기도 합니다. 끊어지거나 풀어낼 때까지 매듭은 영원합니다. 설령 우연의 연쇄일지라도, 누군가가 그것을 매듭으로 묶었다고 선언하면 곧 주술의 결과가 되기도 합니다. 한편, 매듭의 또 다른 이름은 믿음입니다. 매듭을 묶음으로써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 혹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풀 수 없는 매듭. 믿음은 때로 광신이 되기도 하고, 원한이 되기도 하며, 모순이 되기도 하며, 강박이 되기도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랜 관습과 종교의 가르침이라는 믿음, 광신의 매듭에 목이 묶여 있었습니다. 괴물로 태어난 아이는 재앙의 징조였으며, 마녀를 죽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안야는 오랫동안 그런 마을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직접적으로 저주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원한의 매듭을 풀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미쉬킨은 키리야를 제대로 장사 지내지도 못하는, 안야의 원한을 풀어줄 수도 없는 자신의 모순된 처지에 발이 묶여 있었습니다. 헨리 하커는 자신이 옳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괴물이나 주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기에,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매듭을 풀기 위해서, 어떤 때에는 그 위에 새로운 매듭을 묶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상수학을 이용한 트릭처럼요. 안야가 주술을 행했을 때를 기점으로, 모든 것이 과학으로 해결될 것처럼 보이던 작품의 잿빛 풍경이 핏빛으로 물듭니다. 병이 번지고, 붉은 비가 내립니다. 그 속에서 모든 진실이 함께 쏟아지고, 죽은 자들이 산 자들 사이에 들불처럼 섞입니다. 그렇게 되었기에 모두의 믿음은 한 번 깨어지고, 매듭이 풀릴 수 있었습니다. 광신을 끝내 희생을 알고, 원한을 풀어내 용서를 베풀고, 모순을 끊어내 안식을 받아들이고, 강박을 잘라내 겸허함을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어딘가에서 괴물이라 불리던 표본들은 분칠을 받고 레이스로 엮은 아기옷을 입은 채 꾸며지게 됩니다. 표본들에 대한 관심을 끌고 관리의 효율성을 위한 방침이라고 하나, 그 행위는 작중 인물들을 말마따나 과학과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표본의 기능은 잘 관찰하고 설명하기 위한 것. 즉 괴물을 관찰로 죽이기 위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꾸며주는 행위는 주술이나 종교적 의례처럼 보입니다. 가여운 이들에게 관심을 베풀고 경외하는 행위 말입니다. 미신적인 두려움과 동정심으로, 과학에 대한 관심을 붙잡아두는 것은 결국 그들이 믿음이라는 이름 아래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서로를 엉키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미 엉킨 것을 풀고 다시 묶어내었으니까요.
오컬트광인으로서, 또한 매듭을 묶는 사람으로서 공감이 많이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써주신 검은새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