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으로 보는 세계 감상

대상작품: 당신이 보는 세계 (작가: 천휘린아, 작품정보)
리뷰어: 뿡아, 4월 26일, 조회 12

 

* 주의 *
이 리뷰는 소설의 전체 내용과 결말을 포함합니다.
작품을 감상하신 후, 리뷰를 읽으시길 권합니다.

 

 

이 이야기는 ‘전단지 괴담’이라는, 언뜻 보면 미래 SF와는 어울리지 않는 참신한 소재를 사용하여, 기술적 편의로 인한 혜택과 그 이면에 자리한 문제점 사이에서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주제를, 미스테리를 추적해 가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두 개의 이야기, 혹은 두 개의 세계

이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가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진행됩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주관리국 연구팀에 소속된 ‘슬’입니다. ‘슬’은 항간에 떠도는 전단지 괴담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브레인 네트워크라는 장치를 통하여 직접 자료에 접속합니다. (이 과정에서 미래 세계에서 쓰일 법한 도구를 등장시켜 이야기의 배경과 설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데, 이는 소설의 절정부에서 문제해결에 핵심이 되는 장치가 출현하는 대목에 서사적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슬’의 눈에 전단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발표를 맡은 후배는 전단지가 분명히 붙어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는 전단지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해결되지 않은 수수께끼를 그대로 남겨둔 채, 이야기는 우리를 또 다른 주인공에게로 안내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설란’입니다. 설란은 방금, 자신의 동거인 ‘시서’와의 말다툼 끝에 집을 나와버렸습니다. 둘의 다툼이 발생한 원인은 정치적인 견해의 차이였죠. 설란은 생각합니다. ‘왜 시서같은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보지 못하는지’라고요. 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첫 번째 이야기에서와는 조금 다르게 쓰입니다. ‘보다’라는 말이 단순히 ‘육안으로 식별한다‘ 라는 뜻이 아니라, 영어에서의 ‘I see(알겠어요)’와 같은, ‘알아차리다’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즉, 여기서는 ‘본다’는 말이 기본적인 뜻에서 한층 더 나아가 ‘살피다, 헤아리다’라는 의미로 확장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이어서 다시 소설은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슬의 시점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슬의 이야기가 조금 전개되고 나면, 또다시 두 번째 이야기인 설란에게로 돌아옵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두 가지 트랙이 서로 왔다리 갔다리 하며 진행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형식은 흔히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궁금한 지점에서 이야기를 끊어버림으로써 독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기술인, 이른바 ‘절단 신공’으로 기능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이런 이중 트랙 구성은 주제를 드러내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01(슬) – 02(설란) – 03(슬) – 04(설란) – 05(슬) – 06(설란, 슬) – 07(슬) – 08(설란)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하는 곳은 바로, 번갈아 가며 진행되던 두 세계의 이야기가 만나는 06번 지점입니다. 두 주인공이 만나게 됨으로써 헤이트 이레이저의 존재에 대해 파악하게 되고, 서로가 보지 못했던 것의 원인(보기 싫은 것을 차단한 채, ‘자신의 세계에만’ 갇혀 있는 것)에 대해 알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두 세계가 만나면서 사건이 해결되는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구조가, 소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낼 뿐만 아니라, 주제를 매우 잘 뒷받침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두 개의 관점

절정부에서 드러난 ‘헤이트 이레이저’라는 기능은 그 직관적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꺼려지는 대상을 사전에 내장 칩에서 차단합니다. 저는 이 설정을 보고 ‘사전검열’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많은 분이 아시다시피, 사전검열은 위헌입니다. 즉 표현의 자유를 막지 못하도록 헌법상에 규정해 둔 거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누구나 어떤 것이든 표현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보기 싫은 것을 ‘보지 않을 권리’는 어떨까요? 그 또한 존중받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얼핏 보면 헤이트 이레이저는 제법 괜찮은 기능처럼 보입니다. 표현하고 싶은 자유만큼이나, 어떤 것을 안 볼 수 있는 권리도 중요하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보기 싫은 대상을 사전에 차단해주는 이 기능은 일단 편리해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런 편리함에서 한발 더 나아가, 보다 심층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과연 보기 싫은 것을 보지 않고 사는 게 좋은 결과만을 가져올 것인가, 하고요. 사전 필터링의 유용성, 그 이면에 감춰진 부작용을 파헤쳐보고 돌아보게 합니다.

 

 

두 눈으로 보는 세계

우리는 어떤 것을 보고도 못 본 척을 할 때, ‘한 쪽 눈을 감는다’라고 합니다. 이는 곧 어떤 사실이나 대상을 외면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의학적 지식에 따르면, 우리의 두 눈은 협응을 통해 작동한다고 합니다. 사물의 거리감을 탐지하고, 무언가를 제대로 알아차리는 데에는 두 눈이 힘을 합치는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거죠. 어쩌면 이러한 신체의 구조는 무언가를 외면하게 되면 제대로 세상을 인식하기 어렵다는 이치를 시사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결말에서 어떤 정해진 교훈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같은 것을 봐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최소한 외면은 하지 않겠다는 의지로부터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방법이 옳다고 뜻을 관철하려는 태도와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결말부에서 설란과 시서는 헤이트 이레이저 기능을 끄기로 결정하지만, 해당 기능 활성화 여부를 선택가능한 옵션으로 남겨둔 점을 보면, 작가는 어떤 대상을 외면하는 행위를 무작정 옹호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대신 이런 식으로 환기해 볼 만한 질문을, 제목이라는 형태를 빌어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소설의 제목은 ‘당신이 보는 세계’입니다. ‘본’이라는 과거형이 아닌 ‘보는’이라는 진행형 문구는, 계속하여 이런 문제를 상기하도록 시점을 현재에 붙잡아둡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닌, 작품의 바깥 세계에서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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