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페이지의 여성영웅서사 태그에 혹해서, 거기다 처음 듣는 이름의 러시아 영웅서사라는 소개가 흥미로워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하면 떠오르는 게 우울한 문학과 혹한, 애절한 노래 정도인데, 한편으로는 드넓은 땅과 우거진 숲에 불곰과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술취한 남자들의 땅이라, 사드코의 여성 버전이라는 이 작품도 후자와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보통 남자 영웅들은 술과 여자를 밝히는 호걸이니까요!
그래서 첫 장면의 슬픈 배회도, 덜덜 떨며 피가 나도록 황금 비파를 연주하는 주인공도 나중에는 다 해결돼서 떵떵거리나 적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 줄 알았습니다. 영웅서사란 게 단순하게 말하면 시련을 이겨내고 주변의 인정을 받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에는 꼭 개인의 물리적인 힘만 써야 하는 게 아니라 주변의 도움을 받아 재치 있게 속여넘겨도 영웅으로 쳐 주니, 주인공이 약한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인공의 손에 상처가 가실 날이 없는 시간 끝에 오고 만 결혼식 날을 저는 그런 기대감 속에서 읽었습니다. 비록 고의는 아니었지만 학살하는 데 영향을 끼쳤고, 그간 혼자서 너무나 아프고 두려웠지만, 호수의 왕을 죽였으니 이제 모든 게 잘만 풀릴 줄만 알았죠. 호수 밑바닥은 호수 바깥과 그저 표면으로 연결된 다른 세상인 것도 잊은 채로 말이에요.
주인공은 호수 밑바닥에서 고향에 돌아가길 꿈꿨습니다. 편안한 곳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아는 유일한 세상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돌아온 고향에서 환대는커녕 박해를 받는 모습을 보니, 이런 취급을 받으려고 그렇게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발버둥쳤나 싶은 좌절감이 들었습니다. 주인공이 떠날 수 있는 다른 세상을 많이 알아 뒀어야 했을까요? 생존만으로도 힘겨웠는데 대체 뭘 더 할 수 있었을까요. 눈앞이 깜깜해지더라고요.
끝내 주인공은 홍길동처럼 호수 밑바닥이라는 분리된 세상에서 비슷한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자기 이야기를 기억하듯 명주실을 바친 여자에겐 기쁜 음악을 들려주지만, 일 년 중 딱 하루는 고향에 돌아가 탄식하는 주인공이 살아갈 날이 그리 즐겁게만은 느껴지지 않아 서글픈 이야기였습니다. 그 하루만 슬퍼하는 거면 좋을 텐데, 아마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