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정이담(모로 Moreau) 작가의 장편 연재 《괴 물 장 미》의 전자책 출간본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이후 언급하는 내용 및 인용 중 연재분과 상이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괴물로 만들 수밖에 없는 시대. 사람이 사람을 괴물처럼 대하는 시대. 문명화된 지금은 아니라 하고 싶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런 사회를 살아간다. 뉴스와 신문만 보아도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없는 일들이 즐비하다. 때로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게 실감조차 나지 않을 때도 있다. 어쩌면 사람은 살아 있는 한 모두 괴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요즘이다.
‘괴물’은 그야말로 ‘괴상한 이물’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권력과 힘을 지키고 과시하기 위해 괴물이 된다. 또는 우발적으로, 조금의 감정도 다스리지 못해서 괴물이 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괴물은 대부분 ‘궁지에 몰려서’ 만들어진다. 이성을 가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괴물로 화하려면 얼마나 구석에 몰려야 할까. 내가 죽거나 상대가 죽는 것, 둘 중 골라야 하는 상황에서 괴물이 되지 않을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살아가기 힘들거나,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은 때로 괴물이 된다.
그러나 그들마저 ‘괴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고민해 봐야 할 문제다. 그들은 ‘상황’이 없었다면 괴물이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벼랑에 몰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삶을 이어가기 위해 도리어 괴물이 되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살아날 구멍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괴물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 또는 힘의 과시, 우발이나 감정 조절의 문제가 아닌 순전히 강제로 괴물이 된 사람들. 그들을 괴물로 만든 것은 주어진 ‘조건’이다.
점점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간다. 구조부터 망가진 세상에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괴물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문제의 본질이 아닌, 눈에 보이는 개인을 향하는 돌이 많아지고 있다. 과거에도 그러했다. 범죄의 양형과 처벌은 모두에게 공정하고 엄격해야 하지만, 인간이 존재하는 한, 법은 사회적 약자에게는 유독 더 엄정하고 강하게, 강자에게는 오히려 약하고 유연하게 적용 되어왔다. 심지어, 과거에는 ‘약한 사람’을 ‘악한 사람’으로 서슴없이 만드는 법까지 존재했다. 아직 괴물이 되지 않은 사람을 괴물로 지정하는 법. ‘마녀사냥’은 종교법이 만든 최악의 사건이다.
사람을 악마로 규정하는 기준은 그때그때 다르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약초를 다루거나 여자로서는 알 필요 없는 지식에 해박”하다는 이유로 마녀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여성도 마녀가 아닐 수 없으며, 평균에서 조금만 튀어도 저주받은 인간이 되던 시대. 그런 때의 여성은 미치지 않고서야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마법을 행하는 이들은 대부분 여성입니다. 여자(Femina)라는 말은 믿음(Fides)과 적다(Minus)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더 적은 믿음’이란 뜻이지요.”1
‘여성’이라는 말의 어원 자체가 기울어져 있으니, 그런 관점으로 특정 사회의 구성원을 보는 이들의 눈이 평등했을 리 없다. 세상에 이름이 괴물로밖에 남을 수 없던 시대에 마녀사냥으로 죽은 희생자는 수만 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시대에 살았던 두 여성이 있다. 다니던 교회의 사제에게 스토킹에 가까운 집착을 당하던 한 사람은 그 남자를 끊임없이 밀어낸다. 사제는 그녀에게 종교인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하면 안 되는, 사람이 차마 견딜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한다. 여성은 그런 사제에게 쓸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한다. 그러던 그녀는 교회의 눈 밖에 나 마녀로 몰리게 되고, 결국 끔찍한 고문을 참지 못해 자신이 마녀임을 진술한다. 그 사실을 안 그녀의 여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누명에서 구하기 위해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낸다. 뒤늦게 구출 당한 여인은 연인이 목숨을 걸어 그녀를 구출했다는 것을 깨닫고, 갈가리 찢어지는 정신 속에서 괴물이 되기로 결심한다.
완전히 망가진 그녀의 곁에는 의문의 노파가 있다. 마녀사냥으로부터 살아남은 여성을 돌보던 노파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존재”. 노파는 제정신이 아닌 여성에게 묻는다. ‘괴물의 운명’을 원하느냐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 타는 냄새와 찢어지는 비명들 사이에서, 마음에서 피어나는 불꽃을 주체하지 못한 채, 그녀의 고개는 저절로 끄덕여진다. 원해요. 나는 그 운명을 온몸으로 원합니다.
그 말을 들은 노파의 눈이 번뜩인다. 그녀의 앞에는 어느새, 괴물로서의 영생이 주어진다.
1. 백 명의 여자가 죽으면, 한 명의 괴물이 탄생하지.
모로 Moreau 작가의 장편 연재 《괴물 장미》는 마녀사냥에 몰려 자기 대신 억울하게 죽은 연인 멜리사를 그리워하던 흡혈귀 바네사가, 멜리사와 몹시 비슷한 소녀 메리 제인을 보고, 새로운 사랑의 미스터리에 빨려 들어가는 로맨스 스릴러 소설이다. 브릿G 제1회 로맨스릴러 문학 공모전 우수작으로, 괴물이 될 수밖에 없던 시대를 타고나 고통의 세월을 견딘 흡혈귀와, 인간 연인 사이의 사랑을 긴장감 있게 그려냈다.
주인공 바네사는 마녀사냥으로 애인을 희생당한다. 그 고통으로 오랜 시간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그녀의 앞에 한 소녀가 우연히 보인다. 오랜 시간 아버지에게 학대받고, 그 집에서 탈출하기를 원하는 메리 제인이다. 메리 제인은 아버지 몰래 그림을 그린다. 그림은 그녀에게 감정의 탈출구다. 자기의 이름과 감추고 싶은 정체성을 숨기고, 스스로 살고 싶은 모습으로 마음껏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 메리 제인은 어느 날, 평소처럼 밤에 벽화를 그리다 끔찍하게 사람이 죽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녀에게 익숙했던 동네에서, 익숙하게 그림을 그리던 벽에서 그녀는 이제 이전과 다른 공포감을 느낀다.
메리 제인은 눈앞에서 누군가 머리 잘린 채 죽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다음 날 아침, 꿈인 줄 알았지만, 뉴스에 생생히 보도되는 현장의 사진에는 그녀가 그린, 미완의 황금 장미가 분명히 새겨져 있다. 바네사와 메리 제인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바네사는 메리 제인에게 일상적이던 공간에 우연히 침입한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서 사람을 잔혹하게 살해한다. 하지만 소설의 도입에서 희대의 살인마가 누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이야기는 바네사의 정체를 잠시 뒤로 숨기고, 메리 제인과 그녀의 두 번째 만남 장면이 이어진다.
그들의 두 번째 대면은 처음처럼 끔찍하지는 않다. 오히려 낭만적이다. 사람이 아닌 듯 아름다운 미모에 ‘조각처럼 무심한’ 표정, 세련된 모습의 바네사는 메리 제인의 주유소에서 아이에게 묵을 장소를 청한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메리는 당황하지만, 바네사의 손에서 나온 큰돈을 본 메리의 아빠는 금세 입이 귀에 걸려 방을 내주고 술을 마시러 간다. 바네사는 메리의 벽화 골목에서 집안까지 점점 사적인 공간으로 깊이 침투한다. 이미 황홀해진 메리 제인에게 바네사는 “혹시 죽이고 싶은 사람 있어?”라고 묻는다. 답은 명확하다. 메리에게는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이것이 메리의 인생을 구출하기 위한 바네사의 첫 시도다.
사실 《괴물 장미》 속 모든 인물은 다소 전형적이다. 여성에게 성적 폭력을 일삼는 사제와 아버지, 그들에게서 견디지 못하고 각성하거나 대항하는 여성 주인공들. 크게 새롭지 않고 평면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인물들이 소설 안에서 충분한 의미를 만드는 이유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연대에 있다. 바네사는 마녀사냥이 시행되던 때부터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 메리 제인에게 닿았다. 역사가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회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바네사에게 성적인 모욕과 집착을 서슴지 않던 사제처럼, 메리 제인의 아버지는 딸에게 육체적인 노동과 성적인 행위를 강제로 요구한다.
인간이었던 과거의 바네사에게는 연인 멜리사를 구할 힘이 없었다. 거대하게 뒤틀린 사회 구조 안에서 무력한 개인, 특별히 목숨의 무게가 인간 이하로 취급받는 여성으로서 끔찍한 경험을 한 바네사에게는 ‘사람을 구하지 못함’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초인적인 힘이 생겼다. 연인을 닮은 그 소녀를 구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주유소에서 만난 소녀 메리 제인은 집에서 탈출하기를 절실히 바라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놓인 메리를 바네사에게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 건 과거 연인 멜리사의 존재다. 멜리사는 바네사에게 연인을 죽게 내버려 뒀다는 죄책감을 심는 동시에 메리와 비슷한 용모로 과거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멜리사는 메리와 닮았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처음 메리는 마치 멜리사의 아류인 것처럼 취급된다.
“충고하는데, 넌 평생 ‘멜리사’를 이길 수 없어. 그러니까 포기해.”
바네사의 친구 리사는 메리에게 이런 모욕적인 말까지 한다. 설상가상으로 메리는 리사를 통해 살인을 목격하던 밤, 사라졌던 황금색 물감을 돌려받는다. 그렇다면 메리가 살인을 목격한 밤, 그것을 저지른 사람은 바네사였다. 그녀를 연인처럼 사랑했던 메리에게는 관계의 큰 위기가 찾아온다. 하지만 메리의 아버지가 친구들을 데려와 그녀를 성폭행하려 할 때, 바네사가 모든 남자를 죽이고 메리를 구해줌으로써 모든 오해가 풀린다.
메리, 멜리니라는 이름을 새로 얻은 그녀는 바네사와의 관계를 회복한다. 죽음으로 인한 오해를 죽음으로 바로잡는다. ‘붉은 잎 아래에 수많은 가시가 숨겨진’ 장미처럼 아름다운 영생을 얻고 그 속에 잔혹한 본성을 남겨둔 바네사는 본능을 터뜨려 평생을 괴롭히던 죄책감을 마침내 씻어낸다. 그리고 사랑을 완성한다. 메리의 장미 그림을 마무리하면서.
2. 천 명의 여자가 살면, 한 명의 삶이 돌아온다.
1부와 2부가 바네사의 과거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다면, 3부와 4부는 흡혈귀인 바네사와 리사로 인해 현재 발생한 살인을 수사하는 과정이 주된 내용이다. 수사관 데보라와 기자 재클린이 새로운 인물로 등장하고, 멜리니와 바네사의 사이에 새로운 갈등이 발생할 것임이 암시된다. 전반부에서는 멜리니와 바네사 사이의 외적 갈등의 양상이 두드러졌다면, 후반부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견고하게 뭉친 둘을 외부에서 공격하는 갈등이 주가 된다.
좁혀오는 수사망의 한편으로 바네사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한다. 인간을 사랑하는 흡혈귀는 죽음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죽어가야만 하는 흡혈귀의 운명이 다시 한번 바네사와 멜리니의 사이를 흔든다. 바네사가 죽지 않으려면, 멜리니의 목을 물어 흡혈귀로 만들면 된다. 멜리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흡혈귀가 되고자 하지만, 바네사는 영원히 타인의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 흡혈귀의 삶을 멜리니가 경험하지 않았으면 한다.
몸이 약해지는 바네사를 대신해 리사와 멜리니는 사냥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표적은 모두 남성이다. 그들의 사냥에는 일종의 패턴이 있다. 수사관들이 보기에 그것은 ‘연쇄살인’과 같다. “피해자들이 모두 남성인 점, 살인과 방화의 시간 차가 협소하다는 점, 뒤처리가 노련한 점”을 들어 용의자는 건장한 체격의 사오십 대 남성으로 특정된다. 단순히 피해자들의 성별과 완력의 강약으로 용의자의 성별을 멋대로 유추하는 수사관들 덕에 멜리니와 바네사는 잠시 그들의 눈을 피한다. 하지만 언제나 진실을 숨길 수는 없는 법. 사건을 조사하던 이들에게 DNA 감식 결과로 메리 제인과 범죄의 상관관계가 밝혀지기 시작한다.
공교롭게 2부의 막바지에서 바네사가 행한 사냥으로 인해 젊은 목사가 사망한다. 성적으로 여성을 유린하고 폭력을 일삼던 목사의 행실은, 바네사를 마녀로 몰고 간 과거의 종교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바네사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비슷한 애인을 만나는 과정은, 단순히 평행한 사건으로 독자에게 흥미를 주려는 의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시간이 지나도 유린되는 여성은 어디에나 있으며,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 가해자 역시 변함없이 있음을 시사한다.
3부에서 주목되는 것은 데보라와 재클린의 관계다. 이들은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과 기자로 바네사 일행과 등을 지고 등장하지만, 결국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가해자였음을 깨닫는다. 결과적으로, 위험에 처한 데보라를 리사가 구해줌으로써 여성의 연대가 완성된다. 인간이든, 흡혈귀든, 정체성의 어떠함을 넘어 하나가 되는 그들에게 가해자는 오직 외부 세계뿐이다. 사건의 종결 후, 바네사는 끝내 정신을 붙잡지 못한다. 그녀에게 은빛 총알을 박아 넣으며, 멜리니는 사랑하는 여인을 언젠가 완벽히 되살리기로 다짐한다. 학살당하는 목사들은 바네사의 부활을 위한 제물이다.
멜리니는 자신이 학살자임을, 잘린 남자의 머리를 들고 가 자수한다. 그녀에게 감옥은 오히려 바깥과 격리될 수 있는 안식처다. 4부의 교정 치료사 마리안나는 멜리니를 망상장애로 여긴다. 그녀가 경험한 세상을 본 적이 없으니 믿지도 못한다. 하지만 멜리니는 굳게 믿는다. 천 번째 제물이 완성된 날, 리사가 데리러 올 것이라고.
스스로 때가 되었음을 직감한 어느 날, 멜리니는 감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세상의 법이 막지 못하는 자유를 향해 그녀가 질주해 갔음을 암시하며 이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제는 ‘정이담’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는 모로 작가의 《괴물장미》는 익숙한 서사와 신선한 메시지의 균형으로 독자에게 편히 다가가는 소설이다. 인물과 사건의 전형성을 뛰어넘어 세상을 조명하는 로맨스가 초인적인 시간을 타고 흐른다. 시련은 사랑을 이길 수 없다는 로맨스의 고전적인 주제 속에서, 괴물이 될 수밖에 없던 장미들의 역사는 가시처럼 날카롭게 빛난다.
한 명의 괴물이 탄생하기 전에 백 명의 여자를 지키는 세상. 아니, 어떤 여자도, 어떤 사람도 죽지 않는 세상이어야만 한다. 백 명이, 천 명의 목숨이 손쉬운 지금, 그 안의 고통스러운 사랑이 꽃피길 기대하기보다 이미 피어난 꽃을 지켜야 함에도, 왜 아픈 로맨스의 가시에 스스로 찔려 울고 있을까. 왜 물렁한 살에 따끔히 박히는 사랑은 여전히 아름다운 것일까.
그건 아마도 가시를 기르지 않고서도, 송곳니가 자라지 않고서도 사랑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기보다, 따갑고 아픈 사람이 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용기가 주는 초인적 숭고함 때문이 아닐까.
감히 쥐는 사람에게는 경고하고, 조용히 흠향하는 사람에게는 매혹을 선물하는 장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