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모든 생명에게 공통된, 삶보다 엄연한 현실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 아름다웠다 하리라-하는 어느 시구나 알지 못하는 신에게 엎드려 비는 기도로도 잠재우지 못할 불안은 우리 중 누구도 죽음을 피하지 못할 뿐더러 우리 중 누구도 죽음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데 있다. 사는 동안 우리는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거나, 인생은 찰나이기에 아름답다느니 생사는 하나며 순환이라느니 갖은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고, 인간의 기술이 마침내 영생을 가져오리라 sf적 상상력을 펼쳐 볼 수도 있고, 혹은 살아간다는 고역보단 죽는 게 낫겠다 냉소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럼 인간은 화장실 바닥에 떠있는 벌레 신세 아닌가. 벌레 입장에서야 이리저리 떠밀리는거 같겠지만 실은 새카맣게 입을 벌린 하수구를 향해 가고 막판엔 유속이 빨라지며 꾸르릉하고 빨려 들어간다.
여기,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는 증언을 들은 남자가 있다. 죽음이 무엇인가 확인하고 싶고, 뭔지도 모르는 죽음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뛰어들 타이밍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다. 그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생명을 돈주고 사들이는 일쯤 쉽다. 인간이기도 기꺼이 포기한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아내라는 속삭임. 죽음의 눈을 피해 목숨을 움켜잡으라는 충동.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인공의 행위가 아니라 ‘죽음이 하는 행위‘로 드러난다. 죽음이 하는 행위? 그렇다. 작가가 들여다 본 하수구 구멍 안에서 “죽음은 현상이 아니라 의지”고 ‘인생을 흡인하는 어떤 실체’이다. 구릉 아래서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불타버린 예배당 그리고 그 악취는 저 미지의 존재의 자취이자 곧 오리라는 예표같다. 마침내 종국에 이르러 생과 사는 고야의 <크로노스>보다 끔찍하고 거대한 이미지로 나타난다. 인생의 흔한 위로들을 갯강구 떼처럼 짓이기고 인간의 모든 웅변을 부실한 건물벽처럼 훼파하고 생명들이 발 딛고 섰던 땅을 뒤흔들어 대면서 그 것들을 흡인하고 있는 죽음을- 우린 목격하게 된다.
어느 화가가 상상으로 붓질한 꺼림칙한 그림 한 점에 불과할까? 사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인생이란 죽음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진 출생으로부터 콧등에 스치는 죽음의 숨결을 알아채는 순간까지 중력보다 거스를 수 없는 죽음의 힘에 빨려 들어가는 중이다. 소설 <냄새>는 그 눈감을 수 없는 공포, 장중한 참상을 그린다.
그러게 죽음이 임박하여 풍기는 냄새를 맡은 이라고 별 수 있을리 만무하다. 죽음과 대결해 이긴 이라면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