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종교도 믿지 않지만, 군생활 동안의 종교활동 덕분에 내 성격의 기반에는 불교적인 가르침이 강하게 잔존해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예수교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김훈 작가의 <흑산>은 천주교 박해에 대해 쓴 글이지 천주교에 대해 쓴 글이 아니라서 읽기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단편이 읽기 어려웠다는 것은 아니다. 읽어내려가는 것에 큰 문제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하고 싶은 말 전부를 내가 이해했는가, 혹은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작가가 장치를 제대로 장치하였는가.
안타깝게도 나는 예수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이 단편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였다. 두 번 읽어보았는데, 두 번째에는 나무위키를 옆에 끼고 이것저것 검색해보면서 읽었다. 이해를 위한 지식의 기반이 마련되자 보다 쉽게 읽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그래서 수준 높은 독서는 반드시 기본적인 독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나보다). 나같은 종교 멍청이를 논외로 친다면, 단편 내의 종교적인 은유는 꽤나 정밀하게 배치되어있다. 덕분에 누가 어느 포지션에 위치한 캐릭터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담과 이브, 야훼와 미카엘, 카인과 아벨, 노아와 예수와 기타등등까지!
물론 소설의 흐름이 창세기의 흐름을 완전히 따라가지는 않는(것 같)다. 개인적인 감상을 묻는다면 나는 이 편이 좋았다. 종교에 기반한 소설을 쓴다고 해서 굳이 플롯까지도 가져올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족을 붙여보자면 창세기의 플롯에서 조금 더 멀어졌다면 훨씬 괜찮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유전공학을 통해 창조설을 재해석하는 방식은 아주 멋있다. 내 친구들이 그렇게 입 닳도록 칭찬하는 빠삐용(벨날벨벨 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는 후반부가 너무 노골적으로 창세기적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빠빠용보다 이 작품을 높게 치는 까닭은, 누가 무슨 캐릭터를 맡고 있는지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열려있으면서, 동시에 노골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화자의 정체를 도통 모르겠기 때문이다. 이게 추리 소설이었으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겠지만, 작품의 장르적 특성 때문인지 굳이 몰라도 감상에 문제가 없다.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다(달바라기님, 쪽지로 알려주시면 안 되나요ㅎㅅㅎ).
다만 조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동물 주인의 캐릭터이다. 작품 내에서 야훼의 위치를 갖는 것은 분명 동물 주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화자 역시 어느정도 야훼의 위치를 갖는다. 야훼는 두 명의 캐릭터로 분화되었는데, 동물 주인은 처벌하는 존재로서의 야훼라면, 화자는 창조하고 보살피는 위치로서의 야훼이다. 그런데 화자는 야훼일 뿐만아니라 다른 존재이기도하다. 추측하기로는 성경에서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권하는 뱀인 거 같다.
화자의 모호한 스탠스 때문에 작품 전체적인 ‘암호적인 재미’가 퇴색된 감도 없지 않다(도대체 화자는 무슨 캐릭터를 맡았는가! 아무래도 여러 캐릭터가 짬뽕된 거 같은데!). 그렇지만 퇴색되고 나서도 충분히 재미있다. 아래의 이야기는 스포일러 중에서도 스포일러라서 감춰놓는다.
제목이 뱀을 위한 변명이라는 것에서 미루어 생각해보건데,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준 뱀은 두 사람을 타락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을 사랑하기에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는 가정을 달바라기 님께서 하신 거 같다. 다르게 생각하는 것. 이런 반짝이는 아이디어야 말로 소설의 본령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