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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작품: 네크로멘서.ai (작가: 라그린네, 작품정보)
리뷰어: 0제야, 23년 4월, 조회 38

한 생명이 태어나 살아가는 데에 불변의 진리가 있다면, 그 끝은 반드시 죽음이라는 것이다. 천지에 영생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생물은 가장 젊은 시절에서 조금씩 노화하며 끝내 죽는다. 생명은 연장될 수 없다. 되살아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몸을 건강하게 가꾸거나 기술로 노화를 늦출 수는 있어도 한 종의 개체가 평균 수명을 한참 넘어 생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지구상 수많은 종은 그들의 특성을 가진 자손을 남기며 ‘연속’해왔다. 목숨을 무한정 늘릴 수는 없지만, 모든 생물은 몸속 유전 물질을 복제하고 후대에 전달해가며 멸종을 피했다.

그러나 오직 인간은 이런 자연법칙을 거슬러, 발전된 기술로 목숨을 연장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영혼이 깃든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려는 것뿐 아니라 인공물로 교체, 추가, 또는 삭제하는 방법으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 방법을 찾는 중이다. 이전에는 단순히 ‘오래 살기’를 원했다면 지금은 ‘죽지 않기’를 원하는 듯한 이 종의 소원에 따라 죽음의 정의도 조금씩 변화하는 중이다. 죽음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무엇부터를 죽음이라고 할까. 숨을 쉬고 있는 것만이 생존의 조건일까. 의학적으로는 뇌사와 심장사 등을 들 수 있겠지만, 조금 더 다양한 상상에 기대 보자.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미래의 어느 날 해동되기 위해 냉동된 사람은, 육신이 죽었지만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이 모든 것도 아닌 기억의 데이터나 뇌만 남아 의식만 이어가는 사람은. 그들은 생존하는 인간일까.

온라인상에 업로드된 하나의 의식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기억 데이터는 넓은 범위에서 온전한 하나의 ‘개체’로 인정받을 수는 있다. (‘생명’으로까지 범위를 확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에 ‘원본’이 있다고 한다면, 이 데이터의 업로드는 의식의 ‘연장’과 ‘연속’ 중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 이건 흥미로운 상상이다. 죽기 직전에 데이터 모음을 완성해 마치 뇌가 컴퓨터로 옮겨간 듯한 모양새라면, 기억의 연장처럼 보이겠지만, 이 기억과 저 기억 사이에 미세한 단절은 반드시 존재한다. 하지만 그걸 그저 ‘잠’이라고 생각한다면, 일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억 ‘단절’ 중 하나로 생각한다면 이 데이터 모음은 의식의 ‘연장’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두뇌를 온전히 복제한 데이터가 온라인상에 저장되어 있을 때, 그것은 내 ‘의식’의 연장이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연속성은 지닌다. 좀 더 범위를 넓혀 보자. 생전의 한 사람이 남긴 글, 그가 방문한 모든 장소, 그곳에서 그가 선택한 시선, 그의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나의 AI를 만든다. 그것은 사람의 뇌나 신체를 원본으로 하지 않는, 그야말로 거대한 자료의 집합체다. 하지만 이 AI를 구성하는 모든 자료는 단 하나의 인격에서 형성되었다. 이것 또한 생명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 ‘그럴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짧은 소설이 있다. 이런 AI의 개발을 ‘강령술’에 빗대고자 한 라그린네 작가의 〈네크로멘서.ai〉는 한 작가가 생전에 남긴 글을 모두 수집해 “인격을 재구성”한 이후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살면서 자의식이 깃든 글을 가장 많이 쓰는 직업은 단연코 작가다.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답게 그들 중 상당수는 일상을 공유하며 SNS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시간과 체력을 들여 다듬고 매만져 내놓는 것부터 즉석에서 마음 가는 대로 써 가볍게 온라인에 올리는 것까지. 집필한 글의 종류와 다양성이 짐작조차 되지 않는 작가들도 허다하다.

그중 한 사람을 고른다. 다작하는 동시에 SNS에 영혼이라도 심어둔 것처럼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다. 그의 모든 글을 수집한다. 깔끔하게 정돈해서 모아두기 위한 아카이브의 개념이 아니다. 그야말로 그가 쓴 모든 글을 휴지 조각까지 모은다. 그것들을 모두 스캔하고 분석하여 하나의 AI를 만든다. 이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소설 속 일인칭 주인공 ‘나’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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