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생명이 태어나 살아가는 데에 불변의 진리가 있다면, 그 끝은 반드시 죽음이라는 것이다. 천지에 영생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생물은 가장 젊은 시절에서 조금씩 노화하며 끝내 죽는다. 생명은 연장될 수 없다. 되살아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몸을 건강하게 가꾸거나 기술로 노화를 늦출 수는 있어도 한 종의 개체가 평균 수명을 한참 넘어 생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지구상 수많은 종은 그들의 특성을 가진 자손을 남기며 ‘연속’해왔다. 목숨을 무한정 늘릴 수는 없지만, 모든 생물은 몸속 유전 물질을 복제하고 후대에 전달해가며 멸종을 피했다.
그러나 오직 인간은 이런 자연법칙을 거슬러, 발전된 기술로 목숨을 연장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영혼이 깃든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려는 것뿐 아니라 인공물로 교체, 추가, 또는 삭제하는 방법으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 방법을 찾는 중이다. 이전에는 단순히 ‘오래 살기’를 원했다면 지금은 ‘죽지 않기’를 원하는 듯한 이 종의 소원에 따라 죽음의 정의도 조금씩 변화하는 중이다. 죽음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무엇부터를 죽음이라고 할까. 숨을 쉬고 있는 것만이 생존의 조건일까. 의학적으로는 뇌사와 심장사 등을 들 수 있겠지만, 조금 더 다양한 상상에 기대 보자.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미래의 어느 날 해동되기 위해 냉동된 사람은, 육신이 죽었지만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이 모든 것도 아닌 기억의 데이터나 뇌만 남아 의식만 이어가는 사람은. 그들은 생존하는 인간일까.
온라인상에 업로드된 하나의 의식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기억 데이터는 넓은 범위에서 온전한 하나의 ‘개체’로 인정받을 수는 있다. (‘생명’으로까지 범위를 확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에 ‘원본’이 있다고 한다면, 이 데이터의 업로드는 의식의 ‘연장’과 ‘연속’ 중 무엇으로 보아야 할까. 이건 흥미로운 상상이다. 죽기 직전에 데이터 모음을 완성해 마치 뇌가 컴퓨터로 옮겨간 듯한 모양새라면, 기억의 연장처럼 보이겠지만, 이 기억과 저 기억 사이에 미세한 단절은 반드시 존재한다. 하지만 그걸 그저 ‘잠’이라고 생각한다면, 일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억 ‘단절’ 중 하나로 생각한다면 이 데이터 모음은 의식의 ‘연장’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두뇌를 온전히 복제한 데이터가 온라인상에 저장되어 있을 때, 그것은 내 ‘의식’의 연장이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연속성은 지닌다. 좀 더 범위를 넓혀 보자. 생전의 한 사람이 남긴 글, 그가 방문한 모든 장소, 그곳에서 그가 선택한 시선, 그의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나의 AI를 만든다. 그것은 사람의 뇌나 신체를 원본으로 하지 않는, 그야말로 거대한 자료의 집합체다. 하지만 이 AI를 구성하는 모든 자료는 단 하나의 인격에서 형성되었다. 이것 또한 생명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 ‘그럴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짧은 소설이 있다. 이런 AI의 개발을 ‘강령술’에 빗대고자 한 라그린네 작가의 〈네크로멘서.ai〉는 한 작가가 생전에 남긴 글을 모두 수집해 “인격을 재구성”한 이후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살면서 자의식이 깃든 글을 가장 많이 쓰는 직업은 단연코 작가다.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답게 그들 중 상당수는 일상을 공유하며 SNS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시간과 체력을 들여 다듬고 매만져 내놓는 것부터 즉석에서 마음 가는 대로 써 가볍게 온라인에 올리는 것까지. 집필한 글의 종류와 다양성이 짐작조차 되지 않는 작가들도 허다하다.
그중 한 사람을 고른다. 다작하는 동시에 SNS에 영혼이라도 심어둔 것처럼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다. 그의 모든 글을 수집한다. 깔끔하게 정돈해서 모아두기 위한 아카이브의 개념이 아니다. 그야말로 그가 쓴 모든 글을 휴지 조각까지 모은다. 그것들을 모두 스캔하고 분석하여 하나의 AI를 만든다. 이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소설 속 일인칭 주인공 ‘나’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네크로멘서’는 주로 비주류 강령술이나 흑마법으로 영혼을 불러내던 술사를 의미한다. 몸이 아니라 영혼만을 불러내어 산 사람과 이어주던 이들. 이 소설의 제목에 포함된 ‘네크로멘서’는 본문의 내용과 딱 맞는다. ‘나’는 다작했지만, 비운의 죽음을 맞은 작가의 ‘영혼’을 불러낸다. 보통은 생명공학자들이 하는 일을 컴퓨터 기술자가 했다는 점에서 비주류로 볼 수도 있다. 육신이 아닌 기억과 의식을 복원했다는 점에서도 강령술과 다르지 않다.
‘나’는 자신이 복원한 기억 데이터가 ‘사람을 되살린 정도’의 수준이라고 이야기하며 기자회견을 이어간다. 기억을 복원하는 데에 쓰인 자료를 어떻게 수집했는지. 그 과정에서 윤리, 도덕적인 문제는 없었는지도 간단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의응답 시간. 기자들은 이 획기적인 기술의 개발에 앞다투어 질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의외로 몇 개의 질문에만 짧게 답변하고 회견장을 빠져나간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전반에 배치한 이 기자회견 장면은 분명 인상적이고 독자를 집중시킬 수 있는 도입이지만, 갑작스럽게 끝난다. 소설 속 ‘나’는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들을 대부분 무시한다. 서너 가지에 대해 답변은 하지만 그 뒤로 날아드는 기자들의 의문을 ‘뭉갠다’. 그러나 이 장면을 잘 활용하면 이야기의 초반부터 다채로운 상상이 가능해질 뿐 아니라 철학적 의미를 형성할 수도 있다. 소설 속 기자들이 언급한 질문으로 볼 때 작가는 ‘네크로멘서’ 프로그램으로 인간의 기억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답은 보류된 채 질의응답은 끝나 버린다.
사회적으로 큰 피해를 준 인물의 의식을 되살리게 될 경우, 그 위험성과 윤리적 논제는 간과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기술적으로 생명 실험이 가능함에도 아직 시도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사회·윤리적 문제를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생명 윤리에 관한 글을 쓰는 작가는 그에 대한 의견과 생각을 소설 안에서 적극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 그것들은 소설의 주제와 밀접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자회견과 같이 상징적인 장면에서 발생하는 질문을 그저 넘기는 것은, 자칫 이런 논제에 관한 답변을 작가가 유보하는 것처럼 보일 위험도 있다.
작가가 잘 만들어 놓은 이 ‘네크로멘서’ AI 프로그램이 실제로 탄생하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언급했듯 이 소설의 초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방대한 양의 텍스트로 한 사람의 인격을 형성할 때 어떤 쟁점이 오고 갈지 면밀히 따져보는 단계가 필요하다. ‘나’는 작가가 만든 인물이며 일인칭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람이다. 그가 오히려 기자들의 질문에 철저히 대비하고 완벽히 답변하는 모습을 그려보는 건 어떨까. 그런 ‘나’의 모습에서 네크로멘서 프로그램에 대한 확신을 보여준다면 독자들도 마음 편히 이후의 내용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기자회견 장면을 보완한다면 좋은 점이 또 하나 있다. 이 소설은 네크로멘서로 되살린 작가의 데이터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을 발견하며 사건이 고조된다. 만약 ‘나’가 네크로멘서 프로그램에 결함이 없다고 굳게 믿었다면 사건의 극점과 주인공의 내적 갈등은 더욱 선명해진다. 완벽한 줄 알았던 발명품에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한 결함이 발견되는 건 개발자로서 큰 손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자들이 던진 질문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인공지능의 인격성을 인정할 수 있는가’, ‘인공지능이 원본과 연속성을 지니는가’, ‘인공지능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가’. 소설 속 정확한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이 “인간인가, 원본과 같은가, 학습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 세 질문은 이야기 안에서 완벽히 답변되고 있을까. 우선, 첫 번째 질문에 관한 답은 어딘가 어색한 데가 있다. ‘나’는 ‘인공지능이 인격성을 가지지 않을 때’ 윤리위원회에게 발생하는 문제로 반론을 제기했어야 하는데 ‘인공지능이 인격을 가질 때’의 문제로 답변을 대신하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인공지능이 인간이 아니다’라고 밝히는 데에 다. ‘나’의 반론대로라면 위원회는 인공지능의 인격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폐기를 요구하면 된다.
두 번째 질의에 관한 답이 재미있다. ‘나’는 새로 구성된 인공지능 자아가 죽은 작가의 소설을 완성할 수 있다면 연속성이 보장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역시 엄밀히 따지자면 틀렸다. 이미 인공지능은 소설 하나를 완성할 수 있을 정도의 단계에 도달했다. 중간까지 쓰인 소설을 끝맺는 건 그들에게 더더욱 쉽다. 이 답의 문제점은 인공지능이 이어 쓴 부분과 비교할 작가의 원본이 없다는 데에 있다. 위원회는 이런 반박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변수가 발생한다. 인공지능이 생전 작가가 쓴 복선과 상황을 분석해서 내놓은 후속편은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는다. 재구성된 작가의 의식은 여론과 언론에 의해 연속성을 인정받는다.
그들은 작가의 후속을 읽고 열광한다. 윤리위원회도 이런 반응에는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학문적으로는 틀릴 수 있는 것이 여론과 대중이 인정해야 하는 ‘작가’라는 직업과 맞물려 우회적으로 적합성을 획득한다. ‘어? 이런 반전과 복선의 이용이라면 연속성이 인정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여론과 이론의 대비를 조금 더 극명히 이용한다면 두 번째 질문에 조금 더 정확한 답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학문적으로 인정받는 데에 한계가 있을지라도 독자에게 인정받아야 하는 작가는 죽어서도 그들에게 연속성을 판단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 번째 질의는 학습에 관한 내용이다. 이것에 관한 답은 가장 정확한 동시에 완성도 있다. 재구성된 의식은 생전에 써 놓은 소설 후반부의 진행이 사후에 관용적인 트릭이 되어 버려 그것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소설을 썼다고 답한다. 이렇게 세 질문의 답이 모두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찰나에 문제가 발생한다. 백데이터 오염을 발견해 버린 것이다. 이 장면은 인공지능이 완벽하다는 입증을 코앞에 둔 개발자에게 그야말로 최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그럼 ‘나’가 발명한 인공 의식의 정체는 무엇인가. 소설의 후반을 끌고 나가는 쟁점은 이것이다.
문제는 그때 일어났다
먼저, 복원된 의식 자체를 이전의 작가와 ‘연속적’인 존재로 볼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자. 이 질문에는 두 가지 관점으로 답할 수 있다. 첫째는 살아온 ‘시간’에 집중해 재구성된 의식을 판단하는 것이다. 첫째 관점에서 애초에 이 의식은 완벽한 작가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연속적’ 의식을 지닌 채 살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을 분초 단위로 끊어 살지 않는다. 잠을 자거나 정신을 잃거나, 외압을 받지 않는 이상 우리는 연속적으로 산다. 시간을 ‘나누는’ 개념은 삶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제작 과정에서, 그리고 죽음 이후의 시간에 공백이 생긴 작가의 의식은 완벽히 연속적이라 할 수 없다. 게다가 재구성된 의식은 작가의 ‘글’로 만들어진 것이다. 글이야말로 불연속적인 기록의 대표다. 문자와 단락은 일정한 규칙을 기준으로 끊어진다. 게다가 우리는 항상 기록하지 않는다. 중요한 일이 있거나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그것을 적는다.
이런 관점에서는 〈네크로멘서.ai〉 속 작가가 완벽히 복원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떤 글도 연속적인 생각으로 쓰이지 않기 때문이다. 비단 멈추지 않고 글을 쓰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작가도 자신의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정하지 않고 단번에 써 내려가지 않는다. 그들은 편집과 재배치를 통해 작게는 띄어쓰기부터 크게는 문장과 문단 단위까지 끊임없이 고치고 보완한다. 하물며 온라인 메신저도 쓰다 내용이 이상하면 지우기를 반복하는데 긴 분량의 글은 오죽할까. 요컨대 그런 ‘불연속적’인 데이터가 온전한 의식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니 아무리 다작한 작가라 하더라도 그가 쓴 모든 글의 모음이 완벽한 작가의 의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가 살아온 시간이 ‘연속적’이지 않다면 그 모든 결과물은 ‘의식’으로서 기능하기 힘들다. 가령, 뇌의 스캔으로 의식을 복제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사후 이루어지는 과정이라면 뇌세포의 성장과 소멸, 시간의 흐름으로 자연스럽게 망각된 시간을 복원할 수는 없다. 단 한 가지 방법, 그 사람의 탄생 직후 뇌에 장치가 삽입되어 일평생 그의 모든 시간을 살아온 결과물만이 의식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두 번째 관점으로 이 ‘의식’을 판단해 보자. 사실 소설 속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첫째 관점으로 ‘의식’의 불연속성을 판단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그러나 이 두 번째 관점은 조금 흥미롭다. 의식의 복원 ‘목적’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이 의식이 만약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자의 생전 기록을 이어가기 위해 복원되었다면 어떨까. 물론 소설 안에는 의식의 복원 목적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가정해보자. 소설 속 작가의 복원된 의식은 어느 정도 ‘정제된’ 글을 토대로 한다. 순간순간 충동적으로 한 행동은 모두 지워지고 정돈된 문장들만 이 AI를 만드는 데에 쓰였다. 물론 SNS의 글은 종종 충동적이다. 감정적이거나 보통의 의식 흐름과 전혀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행동보다는 말이, 말보다는 글이 정제되어 있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 AI는 본래의 작가보다 조금 덜 충동적이고 차분하며 글을 쓰는 데에 최적화한 의식이지 않을까.
그것을 증명하듯 이 소설은 복원된 의식이 ‘작가’의 것임을 유감없이 보인다. 그가 복원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은 가족과 친척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것이었다. 오직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AI는 생전의 작가가 완성하지 못한 장편 소설의 끝부분을 이어서 쓴다. 이미 출간된 소설들의 앞부분을 참고하고 복선을 파악해 뒷이야기를 만든다. 그에게 필요한 건 일상적 기억의 연속이 아닌,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나’가 ‘작가’라는 ‘정체성’을 복원하길 원했다면 꽤 성공적이라고 평할 수도 있다.
재미있게도 위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듯, 우리의 기억이 치밀하게 연속적인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흐르는 시간이 연속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모두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불연속적이다. 연속된 시간 안에서 발생하는 중요한 일, ‘사건’이라 불리는 그것이 기억으로 남는다. ‘시간’이 연속적일 수 있지만 ‘기억’이 불연속적이라는 점에서 최소한 사망한 작가의 글을 이어 쓰는 데에 필요한 만큼의 데이터를 가진 이 의식은 꽤 괜찮게 복원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 소설에 작가 의식의 복원 목적을 단순히 ‘기록’을 위한 것으로 추가한다면 윤리위원회의 지지를 조금 더 빨리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이 데이터의 연속성 여부를 판단하고 있을 때, 백데이터의 오염이 발견된다. 이때, ‘나’는 첫째 관점으로 이 인공지능을 본다. 연속적이고도 치밀해야 하는 데이터가 오염되었으니 실험은 실패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자신의 ‘목적’에 집중한다. 그는 어쩌면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이 ‘목적’에 집중하는 순간 ‘연속성’은 덜 중요한 문제가 된다. 재구성된 지능은 자신의 ‘글’을 이어가는 데에 집중한다. 생전에 작가가 스스로 얼마나 자부심을 가진 채 글을 썼는지, 그것을 알리고자 한다. ‘나’의 실험과 발견은 실패로 끝났을지 모르지만, 인공지능은 자신의 삶을 쉽게 실패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필명’으로 글을 쓰기 원한다.
이 소설에는 분명 치밀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의미가 있는 이유를 찾으라면 결말에 집중하고 싶다. 한 사람의 인생, 설령 그것이 복원된, 혹은 복제된 의식이라 하더라도 ‘실패’했다고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기술과 윤리의 문제를 따질 때, 원본과 복제본을 구분하는 것도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이미 태어난 한 존재의 인격 자체를 독립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딘가에 종속된 것으로만 판단된다면 그것만큼 크게 오해를 빚을 수 있는 것도 없다. 이 소설은 그에 관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설령 백데이터가 오염되었다 하더라도. 잠시 정체성의 혼란이 온다더라도, 내 삶에 큰 결함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독립적 개체로서의 삶을 인정할 때, 인생에는 의미가 생긴다. 나의 삶이 누군가의 발명품처럼, 또는 다른 원본이 있는 것처럼, 종속된 것으로 느껴질 때, 때로는 근본보다 더 중요한 본질을 찾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뿌리를 황망하게 잃은 이 인공지능도 자신이 버려질 것을 걱정하다 문득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결심하는데, 하물며 이미 원본의 인생을 사는 인간들이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가지 못할 이유는 무엇일까. 재구성된 의식이 마지막으로 내리는 결단은, 앞의 모든 문제를 이겨내기 위한 새 신호탄과도 같다.
죽음의 경계를 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삶의 경계다. 삶을 시작한 이상.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인생이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문득, 의식이 아니라 주변의 환경이 나를 빚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럼 정말 인공지능과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둘 다 학습하고 연속적이며, 삶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데.
이 소설을 타인의 무수한 질문과 판단,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가 모호해질 무렵,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지. 인생의 목적이란 무엇일지를 돌아보게 한다. 인간의 손에서 탄생하고 복원된 의식조차 처음부터 꼬인 삶을 그대로 인정하고 새 시작을 해보고자 하는데, 우리라고 하지 못할 것이 있을까. 이 의식은 거창하게 새로운 삶을 선언하지도 앉는다. 그저 새로운 필명을 하나 정하기로 했을 뿐이다. 그러니 왠지 주저앉아 있는 나를 일으키기 위해 우리도 새로운 이름을 하나 정해보자. 문자 그대로의 작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 삶의 방향, 목적지를 과감하게 틀거나 신선하게 만들어볼 때, 그것이 힘들다면 그저 시선을 조금 틀어 주위를 환기할 때, 우리는 분명 새 걸음을 디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작가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의 새 결심처럼, 우리도 큰 품을 들이지 않고, 그저 마음의 고민으로 인해 들어간 힘을 빼고 이렇게 한번 말해보는 건 어떨까.
‘저는 다른 인생을 한번 살아볼까 해요. 생각보다 사는 데 적성이 있는 것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