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없던 시절, 신화, 전설, 민담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이 사람에게서 일어난 일이 저 사람에게로, 이 집에서 벌어진 일이 저 집으로, 이 마을에서 생긴 일이 저 마을로 옮겨가는 데에는 몇 개의 입이면 충분했다. 문자와 기록의 발명 후, 이야기는 정돈, 가공된 상태로 좀 더 긴 역사와 생명을 얻었지만, 그만큼 구전되는 양은 줄었다.
지금은 동네마다 이야기를 팔러 다니는 사람이 없다. 과거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통신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이 마을과 저 마을의 왕래가 적었던 시절에는 직접 발품을 팔아 재미난 이야기를 수집하던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돗자리 하나 딱 피고 길가에서 범상찮은 목소리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쪼르르 달려오는 어린아이와 슬그머니 자리를 잡는 어른들, 호기심 어린 얼굴의 아낙들. 낯선 이야기와 외지인 한 명이 불러 모았을 마을 사람들의 무리를 생각하면 절로 흥이 나고 마음이 따듯해진다.
옛이야기가 주는 정은 남다르다. 오직 청자를 위해 화자가 주의 깊게 듣고, 기억하고, 분위기에 맞게 가공한 내용이 입에서 입으로 정성스럽게 전해진다. 겹겹이 입김을 타고 흐르기에 ‘구전 동화’는 여전히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랑받는다.
여기 외눈박이라는 이름의 한 이야기꾼이 있다. 단순히 눈이 한쪽뿐이라 ‘외눈박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박가(家)의 외눈이라는 뜻의 ‘외눈 박’이다. 자기소개부터 범상치 않은 이 사람의 전공은 ‘요괴’ 이야기다. 이 마을에서 하나, 저 마을에서 하나 소중히 모은 듯 신비한 사건을 풀어놓는데, 금세 사람들의 눈과 귀를 홀린다. 청자들은 죄 없는 이에게 피해를 주는 요괴의 등장에 분노하고, 그것을 처치하는 사냥꾼의 활약에 환호하며, 교훈에 탄복한다. 요괴처럼 타인을 속이고 괴롭히던 이들은 ‘내 얘기구먼’ 중얼거리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고 이야기를 즐겁게 들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만연하다.
이 외눈 박가의 이야기에는 어딘가 남다른 구석이 있다. 사람을 홀리는 즐거움은 이야기꾼인 그가 갈고닦아야 하는 능력이라지만, 마치 직접 겪은 듯한 생생함에는 어딘지 묘한 설득력이 있다. 순식간에 고조되고 끝나는 열다섯 편의 이야기에는 외눈 박가의 경험이 조금씩 서린 듯하다. 하지만 그가 소개하는 요괴들은 살면서 한두 번 만날까 싶은 무시무시한 생물인 데다, 이미 오래전 저 유명한 요괴 사냥꾼 서리태가 전멸한 것들이 아닌가. 세상 물정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제 한 몸 건사할 식량과 두 발로 떠돌아다닐 체력만 있다면 영원히 이야기만을 풀어놓을 듯한 이 신비로운 사내. 도대체 ‘박 씨’의 정체는 무엇일까.
몸과 마음을 보는 눈
《척안재담》. 한쪽 눈을 가진 사내가 들려주는 재담 모음집에는 이런 이름이 붙었다. 시대도, 연대도, 이야기꾼의 나이와 이름도 짐작할 수 없는 이 기묘한 책. 기담(奇談) 또는 괴담(怪談)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 설화들을 재담(才談)이라고 부르는 그의 유머 감각 역시 비범하다. 박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항상 요괴가 등장한다. 그 요괴는 죄 없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 한 마을을 불태우거나 아이의 눈을 파먹는 등, 억울함과 공포가 똘똘 뭉쳐 만들어진 이물이다 보니 잔혹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신묘한 능력으로 사람을 홀리고 삼키는 요괴에 기가 질릴 즈음, 어디선가 소문을 듣고 요괴 사냥꾼 서리태가 나타난다.
그는 사람들을 괴롭히던 요괴를 무찌른다. 그의 능력만 따지자면 전설 속 영웅이나 대업을 달성한 장군처럼 보이지만, 그를 움직이게 하는 건 단 하나, 개인적인 원한이다. 서리태가 요괴를 소탕하겠다고 결심한 건 원대한 꿈이나 커다란 사명감이 있어서가 아닌 그저 사적인 원수를 갚기 위해서다. 한 개인이 큰일을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경우는 생각보다 적다. 큰 다짐과 포부, 원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적인 원한, 특히 가족에 관한 것들은 때로 개인의 모든 감정을 마비시킨다. 우리는 가족의 복수를 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떠난 무모한 여행기를 하나쯤 알고 있다. 서리태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이 요괴들에게 몰살당하고 자신도 요괴에게 눈을 뺏겼다. 그렇다면 어찌 그들에게 한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서리태는 조선 팔도를 누비며 요괴를 잡는다. 그리고 그 과정이 모두 이야기로 남았다. 독자는 문득 궁금해한다. ‘타오르는 한기’라고 불리는 서리태와 이야기꾼 박가는 어떤 관계일까. 그는 어떻게 서리태의 일화를 구전하게 되었을까.
처음 만난 요괴와 마지막 만난 요괴 사이에 흐른 시간을 가늠할 수도 없는, 전설의 요괴 사냥꾼 서리태는 소설의 세계관에서 일정 시간 동안 실존과 가상의 묘한 경계에 서 있다. 실제로 있던 인물이라기에는 그가 죽인 요괴와 겪은 일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가상의 인물이라기에도 그가 겪은 사건이 지나치게 생생하다. 그건 이야기꾼 박가가 정교하게 짜 놓은 서사의 구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왠지 서리태라는 이름과 그가 세상에 이름 석 자를 걸고 모습을 드러낸 과정, 여정과 결말에는 실제가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생동감이 있다.
사실 서리태와 박가가 같은 사람이라는 건 소설의 도입부터 암시된다. 그리고 〈서리태〉와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비로소 확실히 드러난다. 박 씨는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직접 겪은 일을 정리해 요괴 이야기, 재담으로 만든다. 그가 진멸한 요괴는 세상에 해를 입히는 존재다. 요괴는 없어졌으나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성품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요괴보다 더 흉악하고 잔인한 인간들도 허다하다. 서리태라는 이름은 벗어 던졌지만, 그는 여전히 ‘외눈 박’이라는 이름 아래 요괴보다 골치 아픈 사람들을 이야기로 훈계한다.
‘외눈 박’의 삶은 그가 지닌 ‘눈’의 종류와 개수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뉜다. 두 눈이 모두 그의 것이던 때, 요괴의 습격으로 한쪽 눈만 가지고 살 때, 심의안을 가진 이후. 만약 그의 눈이 양쪽 다 상하지 않았다면, 그는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살았을 것이다. 물론 내면의 눈과 마음을 갈고닦을 수는 있지만, ‘심의안’이라는 보구를 쉽게 착용하지는 못했을 테다. 그에게는 사람의 외형을 판단하는 눈이 한쪽만 있는 대신 마음을 보는 심의안이 있다. 요괴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내면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기술. 요괴 사냥꾼 서리태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요괴를 모두 무찌르고 은퇴한 박가에게는 어떨까. 서리태였던 과거의 그는 본래의 눈으로 요괴를 무찌를 때 쓰는 물리적인 힘을, 심의안으로는 요괴의 선악을 판단했다. 그러나 요괴 사냥을 그만두고 난 후의 박 씨에게 심의안은 사람의 마음을 읽는 도구다. 박가는 상황에 맞는 이야기를 고를 때 그것을 사용한 듯하다. 그의 눈앞에 놓인 상황과 여건뿐 아니라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심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관련된 이야기를 고르는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 《척안재담》의 모든 에피소드는 현실의 사건에서 과거의 요괴담으로 이어진다. 심의안은 어쩌면 요괴보다 사람의 마음을 읽기 위해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의 눈이 모두 밝은 박가는 오늘도 어디나 자리를 펴고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누군가를 달래기 위해, 누군가를 훈계하기 위해, 희노애락을 전달하기 위해 그가 고르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즐겁다. 박가의 인생이 위와 같았다면, 그가 전하는 이야기들은 어떨까.
이야기를 낳는 이야기
구전 민담을 엮은 듯한 전개와 이야기꾼 박가의 구성진 목소리 때문에 이 소설은 마치 원형 설화가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척안재담》 속 요괴담은 작가의 창작에서 비롯되었다. 재담이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 존재하며, 지금의 우리가 과거의 시점을 참고하여 설화를 창조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지만, neptunuse 작가의 설화 구성력은 참으로 신묘하다. 그는 분명 현대의 웹소설을 썼지만, 그 안에 기묘한 시간의 흔적을 켜켜이 쌓는다. 독자들은 박 씨의 요괴담에 정말 오랜 역사와 전통이 깃든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마치 할머니의 무릎에 누워 옛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그의 말에 귀 기울인다. 이 소설은 정말 옛날에 쓰인 것만 같다. 그러나 여전히 유효하다.
고전의 반열에 올라 지금도 읽히는 구전과 민담, 재담은 시공간을 제약받지 않는다. 인간이 고작 백 년뿐인 수명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시대와 공간이 전혀 다른 나라와 비슷할 수 있듯이, 꾸물대며 살아가는 세상의 인간들 역시 그 모양과 형태가 완전히 새로워지지는 않았다. 백성의 고혈을 빠는 탐관오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 한 변 사또가 지금도 왜 없겠는가.
그러니 지금도 ‘옛날이야기’ 같은 재담이 충분히 탄생할 수 있다. 재담은 우리네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저 사람의 모양 중 일부를 빌려와 예스러움을 묻히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이 어느 창작자에게나 쉽지는 않다. 누구나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척안재담》의 작가는 이 모든 과정을 훌륭하고 적절하게 마친다. 열다섯 개의 에피소드와 십수 개의 요괴, 수많은 약자와 강자의 얼개를 조심스럽게 다듬으며 독자를 홀린다. 그는 현대에 적용될 수 있는 옛이야기를 쓰는 작가다. 시대와 현실을 뛰어넘어 공감받는 이야기를 뽑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는 때로 옛이야기를 낡았다고 여긴다. 실제로 많은 옛이야기가 현대의 시선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여성을 남성보다 천하게 보거나 특정 사회적 계층에게 마땅한 권리가 돌아가지 않던 시절의 서사는 충분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중에는 분명 지금의 관점으로 보아도 괜찮거나 심지어 신선한 것들이 있다. 때로는 잘못된 시선으로 왜곡된 부분을 충분히 다듬을 때, 더 현대적인 울림을 주는 스토리텔링도 있다. 지금의 판타지처럼 환상적이던 과거의 민담, 지금의 로맨스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간질이는 과거의 사랑, 지금의 추리처럼 호기심을 자극하는 과거의 사건들. 현대의 첨단이 줄 수 없는 분위기와 배경이 녹아든 이야기에 우리는 끌린다. 전통과 옛것에 서린 기이한 아름다움은 그것들이 계승되도록 한다.
산 넘고 들 질러 머나먼 곳을 다니며 보통 인간보다 많은 지혜와 경험을 쌓은 서리태는 현자와 같다. 일반적인 현자의 이미지는 온화하고 자비로운 성인(聖人)에 가깝지만, 문자 그대로 보면 ‘현명한 사람’이다. 요괴는 ‘기운’으로 똘똘 뭉쳐 있다. 이 ‘기운’은 대체로 어둡다. 벌레의 형태로 인간에게 기생해 끝없는 갈증을 일으키거나, 환각을 보이는 요괴. 물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곱씹으며 저승길 동지를 찾는 요괴. 그러나 그들은 드물게 밝거나 온화하기도 하다. 때로 드물게 생기는 착한 이들은 운명을 뛰어넘어 ‘대모’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의 선행을 베푼다.
요괴에는 인간의 감정이 응축되어 있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이야기’가 많다. 서사는 욕망과 감정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척안재담》에는 인간뿐 아니라 요괴의 전사(前史)도 종종 등장한다. 그들도 사람으로부터 기인했기에 요괴의 세상 또한 인간세와 다르지 않다. 사람과 사람만큼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요괴와 요괴 사이에 숨어 있을 이야기. 척안의 사나이 외눈 박의 속에는 사람을 홀리는 요괴담이 가득하다.
《척안재담》은 옛것이 지닌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오롯이 보존한 채, 한 사람의 일대기를 형성한다. 동시에 여러 요괴의 사연으로 교훈과 가르침을 주는 걸 잊지 않는다. 에피소드 형식의 기담이 파편화하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서리태’ 또는 ‘박 씨’의 인생이 되는 과정은 그럴듯하고도 참신하다. 게다가 이 이야기들은 최근 유행하는 시리즈 콘텐츠로의 가능성 또한 내포한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최고의 요괴 사냥꾼 서리태, 완고하고 냉철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아픔을 지닌 자. 완벽한 능력을 얻기 위해 보냈을 인고의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죽인 수많은 요괴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선한 이야기들은 서리태의 여정이 길수록 더 다채로워진다.
서리태는 지상의 모든 요괴를 잡아넣겠다는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긴 세월을 살았다. 그 과정에서 만난 요괴는 단순히 십수 마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야기꾼 외눈박이 들려주는 재미난 이야기”는 과연 얼마나 뻗어갈 수 있었을까. “저 산 넘고 들 질러 멀고 먼 마을”은 도대체 어디까지를 포함할까. 독자로서 바라는 것은 이 지평을 시험하는 작가의 용기다. 지금의 서리태는 단순히 눈과 가족을 요괴에게 잃고 복수를 위해 떠돌이 인생을 보낸 사람이다. 물론 지금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소설은 완성되었지만,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척안재담》은 오직 한 사람이 겪어낸 다양한 이야기다. 과거의 ‘재담’과 ‘민담’이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엮어낸 것과 달리 이 소설은 조금 더 창작의 영역에 가까이 있다. 단순히 민담을 나열하기보다는 그 시간을 오롯이 한 몸으로 통과해 낸 외눈의 박 씨를 화자이자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마치 백발의 노인이 되어 손주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듯, 깔고 앉을 자리만 있다면 술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주는 이 의문투성이 박가의 앞에는 항상 군중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낳는 이야기. 서리태의 여정 끝에서 박가의 여행이 시작되었듯이, 아직 조선 팔도를 누비고 있을 외눈 박의 발걸음을 상상해 본다.
어디선가 호탕한 너털웃음이 들려온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노자라고는 하나도 없어 뵈는 사내가 자리 하나 펴고 그 위에 서 있다. 그런데 그 몸짓과 손발짓이 예사롭지 않다. 으레 볼 수 있는 이야기꾼의 호객이 아니다.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니 선 외눈의 노인. 그의 얼굴에서 읽히는 세월감은 복잡하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 억겁의 세월 동안 소리를 내었을 성대를 울려 힘차게 외친다. 그 소리는 바람을 타고 조선 땅의 끝까지 퍼져 나갈 것이다.
자자, 이 이야기는 “저 산 넘고 들 질러 멀고 먼 마을”, 이 넓은 세상 어딘가에서 일어난 일이오!